20화
‘좋긴 좋네.’
에슬린은 낡은 분수대에 앉아 생각했다.
훈훈한 봄바람이 그녀의 머리칼을 간질였다. 본채와 떨어진 이 버려진 정원까지 만개한 꽃향기가 닿았다.
그녀는 손에 든 소식지를 팔랑팔랑 넘겼다. 부드러운 종이의 감촉마저 만족스러웠다.
“소식지를 즐겨 읽는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불현듯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슬린은 고개를 들었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장신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가주님.”
“마음에 듭니까?”
옆자리에 와 앉으며 테베트가 물었다. 손에 쥔 소식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에슬린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네.”
그러자 그는 정말로 기분이 좋은 듯 목을 울리며 낮게 웃었다.
“좋아하는 소식지가 있으면 말해요. 그 출판사를 사 드리겠습니다.”
“아니, 아니요. 괜찮습니다.”
에슬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말에 순간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디엘의 말이 딱 맞네…….’
썩은 웃음을 짓던 마법사의 얼굴이 떠올랐다. 에슬린은 고개를 살짝 숙였다.
“무슨 생각을 하길래 혼자 웃어요?”
“아.”
나직한 속삭임에 입매를 더듬어 보았다. 자기도 모르게 살짝 올라간 입꼬리가 느껴져 민망했다.
테베트가 애정이 담긴 눈으로 그런 에슬린을 응시했다.
“마법사 놈의 치료가 효과가 있나 봅니다.”
“…….”
“떠오르는 게 있는지 말해 봐요.”
“아직은…… 없어요.”
기대에 부풀어 있던 그의 어깨가 살짝 가라앉았다. 에슬린은 괜스레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군요.”
쓸쓸한 듯 조금 낮아진 목소리였지만, 그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마법사 놈은 계속 붙잡아 두면 되니까요.”
디에리안이 저 말을 듣지 않아서 천만다행이었다.
“그놈이 거슬리게 하는 건 없습니까?”
“네. 좋은 사람이에요.”
에슬린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기본적으로 냉소적이고 까칠하지만, 디에리안은 당연히 좋은 사람이었다.
자신의 측근이었던 마법사 디에리안 프레이.
그러나 에슬린은 한 사람의 친구로서 디에리안이 소중했다.
“……좋은 사람이라.”
“왜 그러세요?”
옆에서 묘한 기색이 느껴져 돌아보자 눈이 마주쳤다. 테베트는 눈을 휘며 웃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든 생각이 멈출 만큼, 달콤한 눈웃음이었다.
꽃향기가 바람을 타고 넘실거렸다.
이 황량한 곳에도 꽃이 피긴 하는구나…….
에슬린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때 느슨하게 쥐고 있던 소식지가 바람을 타고 너풀너풀 날아갔다.
“앗.”
에슬린은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얇은 종이가 분수대 근처 덩굴에 걸려 있었다.
정원사들조차 잊은 버려진 정원이었다. 오랫동안 사람 손이 닿지 않아 덩굴은 무성하게 자라 제멋대로 몸을 얽고 있었다.
에슬린이 그 위로 손을 뻗을 때였다.
“에시.”
어느새 다가온 테베트가 그녀의 팔을 뒤에서부터 잡아 저지했다.
“가시덤불이라 위험합니다.”
귓가에 낮은 음성이 내려앉았다.
그제야 억세고 날카로운 가시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주님!”
에슬린이 놀라 소리쳤다. 테베트가 망설임 없이 덤불을 헤치고 떨어진 소식지를 손에 쥐었기 때문이었다.
“가시가…… 손에.”
바늘처럼 길고 두꺼운 가시들이 그의 손 여기저기에 박혀 있었다. 에슬린은 미간을 구겼다.
“그냥 놔두지 그러셨어요.”
“그랬으면 당신이 손을 뻗었을 것 아닙니까?”
“…….”
“전 단련한 몸이니 괜찮습니다. 당신 손에 상처가 생기는 것보다 낫고요.”
그는 당연하다는 말투로 중얼거렸다. 에슬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손을 보여 주세요.”
무슨 종류의 덤불인지 알 수 없었다. 독성이라도 있는 가시면 큰일이었다. 에슬린이 입술을 깨물었다.
정작 당사자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다칩니다.”
하, 기어코 에슬린의 입에서 짧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손바닥에 박힌 가시를 뽑다 다친 사람은 없어요.”
“혹시 모르는 일이에요.”
그러나 에슬린의 단호한 표정에 결국 테베트는 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에슬린은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그의 손에 난 상처를 닦았다. 그리고 섬세한 손길로 억센 가시들을 하나씩 뽑아냈다.
“남부의 소식지를 읽고 있었나 보군요.”
테베트의 시선이 문득 아무렇게나 구겨진 소식지에 닿았다.
“네.”
그 대답에 테베트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가시를 뽑는 데 집중해 있던 에슬린은 그 변화를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무슨 내용을 읽었죠?”
“남부의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 같더라고요. 바다엔 해적들이 나타나고, 열병이 유행하는데 지난해 농작물 수확량이 적어 식량난이 겹칠 것 같아요.”
에슬린은 생각나는 대로 중얼거렸다. 테베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볼튼 자작이 꽤나 골머리를 썩이고 있겠군요.”
“자업자득 아니겠어요? 그 훌륭한 영지 엔더스를 그렇게 폐쇄적으로밖에 운영하지 못하는…….”
싸늘한 어조로 빈정대려던 에슬린이 뚝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덧붙였다.
“……자작의 능력이 의심된다고, 소식지 논평에 실려 있더라고요.”
“그렇군요.”
에슬린의 등을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렸다. 흘끔 바라본 테베트는 그녀의 말을 그다지 신경 쓰는 눈치가 아니었다.
에슬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말조심하자, 말조심…….’
남부엔 가 본 적도 없는 하녀가 할 법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다 됐습니다, 가주님.”
그녀는 평정을 가장하며 빠르게 남은 가시를 모두 뽑았다. 테베트의 손을 손수건으로 동여매고, 내려놓으려 할 때였다.
물러서는 에슬린의 손을 커다란 손이 덥석 감아쥐었다.
“그것뿐입니까?”
“무슨?”
“남부에 관심 가지는 이유 말입니다.”
붉은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에슬린이 차분하게 되물었다. 둘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맴돌았다.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던 테베트가 시선을 거두고 피식 웃었다.
“다른 이유가 없다면 됐습니다.”
에슬린은 한 번 더 손을 빼내기 위해 힘을 주었다. 그러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럼 남부 소식지로 하죠.”
오히려 손가락을 하나하나 얽으며 그는 속삭였다.
“뭘요?”
“당신에게 사 줄 출판사 말입니다.”
“가주님.”
에슬린이 어이없다는 표정을 짓자, 테베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농담입니다.”
아닌 것 같은데…….
그러나 더 따지는 것도 웃기는 일이었다.
그때 따스한 바람이 불어와 테베트의 검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흔들어 놓았다.
편안하게 눈을 내리며 웃는 그의 얼굴은 얼핏 소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문득 그와 이렇게 대화하는 게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 때문인 걸까?
늘 날카롭던 신경이 왠지 누그러든 기분이었다.
“아, 보여 줄 게 있습니다. 이리 와 봐요.”
“네?”
갑자기 몸을 일으킨 테베트가 에슬린의 손을 잡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가주님, 갑자기 어딜 가시는 거예요?”
부드럽게 당기는 손길엔 거부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그가 향한 곳은 분수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버려진 정원의 뒤편.
에슬린조차 발걸음 하지 않았던 곳.
그녀는 이 정원에 그렇게 넓은 공간이 있는 줄 몰랐다.
그랬기에 그곳을 메운 작은 나무들의 존재 또한 모르고 있었다.
“……이건.”
에슬린이 홀린 듯 넓은 땅을 바라보았다.
누가 언제 이렇게 정성 들여 경작해 놓은 건지, 비옥한 붉은 토양이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를 메운 어린나무들……. 아직은 작지만, 저 나무들은 분명.
“포도나무…….”
“맞아요.”
테베트가 다정하게 속삭였다.
“그때 포도를 좋아하는 것 같길래 심었습니다.”
“…….”
“뒤쪽에 있는 것들은 작은 묘목들이라, 내년이나 내후년이 가장 많이 열릴 거라더군요.”
그는 넘실거리는 포도나무의 물결을 보며 말했다. 에슬린은 고개를 돌려 테베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앞쪽에 있는 것들은 아마 올해 열릴 겁니다. 뭐, 양이 많진 않겠지만…… 당신이 충분히 먹을 만큼은 되겠죠.”
테베트가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가 석양을 머금어 붉은 보석처럼 빛났다.
“이번 여름엔 포도를 실컷 맛보여 주겠습니다.”
상냥한 목소리가 에슬린의 귓가에 맺혔다.
여름…….
그녀는 멍하게 그 단어를 되새겼다.
“물론 겨울에도, 내년에도 말입니다.”
테베트의 얼굴에서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느껴졌다. 그의 강인한 목울대가 몇 번이나 움직였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으나, 억지로 삼켜 내는 사람 같았다.
“그러니…….”
‘떠나지 말아요.’
왜였을까? 그 순간 에슬린은 그런 말을 들은 것 같은 착각에 휩싸였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녀는 말없이 눈앞의 물결을 응시했다.
‘남부로 가 배를 탈 생각이라는 걸, 눈치챈 건 아니겠지?’
남부의 아름다운 푸른 바다가 떠올랐다. 그 바다 건너에 있는 대륙은 황녀였던 시절에도 가 보지 못했던 곳이었다.
‘아닐 거야.’
에슬린은 길게 고개를 저어 생각을 털어 냈다.
둘 사이에 영원 같은 침묵이 흘렀다. 어린 포도나무들만 사락사락 몸을 움직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