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화
응접실에 들어선 에슬린은 간만에 아주 깜짝 놀랐다.
“마법사님?”
디에리안이 곧 죽을 사람 같은 안색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티 테이블에 고개를 옆으로 처박고 있었다. 에슬린을 발견한 눈동자가 데굴, 그녀의 움직임을 좇았다.
창백한 얼굴에 원망의 빛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각하에게 내 얘길 했어?”
“네?”
질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꾸물꾸물, 디에리안이 무거운 상체를 억지로 움직였다. 흡사 무덤가에서 다시 살아나는 시체를 보는 기분이었다.
“내 목을 저택 앞에 매달아 놓는다는 걸 피해 간신히 달아났다고.”
“전 별말 안 했는데요…….”
에슬린은 입술을 가늘게 좁혔다.
테베트? 그와 디에리안 얘기를 했던가?
별달리 짚이는 게 없었다.
휴우우. 피곤한 마법사에게서 기나긴 한숨이 튀어나왔다. 간신히 몸을 세워 앉은 그가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부탁이니 그냥 언급 자체를 말아 줄래? 그 돌아 버린, 돌아 버리신 각하께서 언제 어느 포인트에 꽂힐지 몰라서 말이야.”
“아, 네…….”
에슬린은 짐작 가는 바가 없었으나, 일단 대답했다.
디에리안이 테이블에 손을 짚었다. 몸을 일으켜 차를 준비하려는 모양새였다.
“제가 할게요.”
에슬린이 잽싸게 나섰다.
디에리안의 차 맛도 차 맛이지만, 저런 상태로 차를 만들게 했다간 정말 큰일을 치를 것 같았다.
에슬린은 빠르게 차 두 잔을 우려냈다. 며칠째 이어지다 보니 어느새 이 일상도 익숙해졌다.
“좀 마시고 기운 차리세요.”
디에리안의 앞에 찻잔을 놔 주었다. 그가 어어, 하는 늘어지는 소리를 냈다.
“…….”
에슬린은 소식지를 펴 보려다 멈칫했다.
디에리안이 미간을 잔뜩 좁힌 채, 찻잔을 가만히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왜 저러지? 차 맛이 이상한가?’
에슬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왜 그러세요?”
“아니. 너무 자연스러워서 이제야 새삼 눈치챘는데.”
그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차가 달달하네. 꿀이 들어 있어.”
디에리안의 시선이 찻잔에 박혀 있었다. 파헤치듯 응시하는 눈동자는 어려운 마법 수식을 마주한 표정과 흡사했다.
에슬린은 뒷목이 싸하게 굳는 걸 느꼈다. 벼락처럼 스치는 생각에 모든 행동이 멈췄다.
‘내가…… 디에리안의 차 취향을 물어보지 않았던가?’
아찔한 감각이 내달렸다.
아, 실수했다.
그 결론만이 머릿속을 가득 메웠다.
디에리안이 워낙 예전과 똑같아서 자기도 모르게 방심한 것이었다.
‘안 돼, 정신 차려.’
에슬린은 마른침을 삼키고,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과 말투를 가장했다.
“제가 전에 프레이 백작가에서 일한 적이 있어서요.”
“그런데?”
“백작가 하녀에게 들었어요.”
다행히 목소리도, 얼굴 표정도 평소와 같았다.
“백작가에서?”
“네, 1년 전쯤에요.”
에슬린은 하녀장의 서류 더미에서 본 내용을 떠올리며 대답했다. 그가 잠시 간격을 두고 말했다.
“근데 백작가 하녀들이 내 취향을 알 리가 없는데…….”
“똑똑하고 눈치 좋은 하녀가 한 명쯤은 있었나 보죠, 뭐.”
에슬린은 최대한 대수롭지 않은 척 대꾸했다.
“흠.”
디에리안이 앞으로 기울였던 몸을 뒤로 물렸다. 시기를 짐작해 보듯 허공을 잠시 응시했다.
“뭐, 그럴 수도 있겠네. 1년 전쯤엔 꽤 백작가에 들락거리기도 했고.”
“하녀들은 어디에나 있잖아요. 의외로 이런저런 정보에 빠삭하답니다.”
“아하. 하긴.”
에슬린은 디에리안이 오늘 극도로 피곤한 상태라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쿵쾅대는 심장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디에리안은 다시 만족스럽게 차를 마셨다.
그러다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들어 고개를 기울였다.
‘디엘이 백작가에 드나들었다고?’
디에리안의 친부인 프레이 백작은 ‘귀족’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빚어낸 듯한 인물이었다.
몹시 깐깐하고 엄격한 그는 명문 프레이 백작가의 장남이 마법이라는 천박한 사술(프레이 백작의 말을 빌리자면)에 빠져 있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결국 디에리안은 학대에 가까운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연스럽게 백작가와 귀족을 증오하게 되었다.
‘스스로 백작가를 떠난 뒤론 한 번도 돌아간 적이 없었는데.’
그런 그가 백작가와 다시 연을 맺다니.
‘그동안 이런저런 일이 있었나 보네.’
에슬린은 그간 디에리안에게 일어난 일들이 궁금했다. 하지만 공작가의 하녀 주제에 함부로 물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게 그렇게 재미있어?”
문득 디에리안이 말을 걸었다.
소식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딴생각에 몰두해 있던 에슬린이 고개를 들었다.
“네?”
“소식지 말이야. 귀족들 치고 박고 싸우는 얘기나, 학자 놈들이 연구 결과 떠벌리면서 잘난 척하는 쓸데없는 내용들뿐이잖아.”
“그냥…… 전 그런 게 재미있더라고요.”
“특이하네.”
에슬린은 애매하게 웃었다. 세상에서 제일 특이하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그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오묘했다.
디에리안이 잠시 에슬린을 물끄러미 보았다. 그러더니 퉁명스러운 말투로 툭 물었다.
“수도 소식에 대해서 궁금한 거 있어?”
“수도 소식이요?”
“그런 소식지 좋아하는 걸 보니 흥미로워할 것 같아서 말이지.”
디에리안은 자신의 찻잔을 한 번 흘깃거렸다.
“취향에 맞는 차 대접해 준 보답이나 할 겸, 아는 선에서 말해 줄게.”
별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깔끔한 목소리였다. 에슬린은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수도의 소식…….
그녀의 시선이 자신이 들고 있던 종이 다발로 향했다.
소식지에 나와 있지 않은 소식.
그러나 정말 궁금했던 것…….
“1황자 전하께선 황태자가 되시는 건가요?”
차분한 목소리가 실내를 메웠다. 디에리안이 잠시 고장 난 인형처럼 몸을 굳혔다.
“갑자기?”
그가 다소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건 물으면 안 되나요?”
“아니, 너무 갑작스러워서.”
디에리안은 으음, 하며 신음했다.
동시에 자신의 녹색 머리카락을 헝클어뜨렸다. 묶은 머리카락이 엉망이 되었으나,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약속했으니 대답하지. 일단, 아직 아니야.”
“…….”
“황녀께선 돌아가셨지만, 아직 2황자 전하가 남아 계시니까. 하지만.”
디에리안은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을 멈췄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2황자 전하가 황태자가 되실 확률은 극히 낮아. 일단 본인 자체가 별로 욕심이 없으시거든.”
에슬린은 2황자의 얼굴을 가만히 떠올려 보았다.
연약한 얼굴선과 그보다 더 연약한 눈동자. 자신과 똑같은 연한 보랏빛 머리카락.
“그러니 이대로면 1황자 전하께서 황태자가 되시겠지. 솔직히 시간문제라고 봐.”
“그렇군요.”
에슬린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디에리안이 차를 들어 후룩 마셨다. 곰곰이 이야기를 곱씹던 에슬린이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리페리우스가 1황자 전하의 편에 섰으니 더 확실하겠네요.”
“…….”
달그락.
디에리안이 다소 거칠게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 소리에 놀란 에슬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그러세요?”
“정말 그렇게 생각해? 리페리우스가 1황자 편에 섰다고?”
그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이었다.
“아닌가요?”
에슬린이 한쪽 눈썹을 설핏 구기며 물었다.
“글쎄. 내가 저 악마의 속내를 어떻게 알겠어? 하지만…….”
디에리안은 잠시 말을 멈추고 눈알을 위로 한 번 또르르 굴렸다. 곧 퉁명스러운 대꾸가 이어졌다.
“뭘 생각하든지 간에, 그쪽이 생각하는 그런 건 아닐걸.”
무슨 뜻일까?
에슬린의 짙푸른 눈동자가 어지럽게 바닥을 헤맸다.
‘역시 공작은 1황자 사람이 아닌 걸까?’
그녀는 가만히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나에게 독배를 가져온 남자는 분명 공작이었는데.’
에슬린은 황녀로서 1황자에게 졌다.
패배한 자에게 내려지는 독배.
그 독이 든 잔을 가져온 건, 분명 테베트 리페리우스 공작이었다.
‘……만약 그게 그의 의지가 아니라면.’
하지만 리페리우스 공작이 굳이 왜?
‘아니, 잠깐만.’
순간 뇌리를 스치는 서늘한 감각이 있었다.
‘그때 누가 더 있었던 것 같은데.’
에슬린은 눈가를 가늘게 좁혔다.
죽던 날의 기억. 그날의 기억은 안개가 낀 것처럼 혼탁했다.
‘에슬린 베르타니아 황녀, 그대가 마실 독배를 가져왔다.’
테베트의 싸늘한 그 목소리는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리고 뭐라고 더 덧붙였는데…… 뭐라고 말했지?’
에슬린은 어느새 입술을 가늘게 떨고 있었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 전신을 내달렸다.
별안간 벼락에 맞은 듯, 정수리부터 내리꽂는 강렬한 충격이 있었다.
‘기억이…….’
둥, 둥.
어디선가 커다란 북소리가 들려왔다.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팠다.
“……이봐.”
‘기억이 없어.’
비단 죽던 날의 기억만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의 기억엔 이상한 공백이 있었다.
대체 언제 리페리우스 공작과 남부의 다이아몬드에 대해 이야기한 거지?
리페리우스 공작령에 포도 재배 기술을 전달한 건 또 언제고?
왜 그때 디엘과 젝스 경을 데리고 황궁 밖으로 나갔더라? 어딜 가기 위해서?
“괜찮아?”
‘왜?’
에슬린은 기억에 구멍이 있다는 것조차 인지하지 못했다.
마치 처음부터 기억할 필요가 없는 것처럼…….
‘왜 기억이 안 나지?’
머리가 쪼개졌다.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두통은 설명할 수 없으리라.
그때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세상 것이 아닌 듯한 환청이 들려왔다.
‘만약 네가 우연히라도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누군가가 절규하는 소리가 이어졌다.
‘그땐── 또 다른 대가를…….’
그땐? 다른 대가?
“안 돼!”
디에리안의 외침이 멀어졌다.
에슬린은 눈을 감았다. 깊은 어둠이 죽음처럼 밀려들어 왔다.
피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