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화
깜빡, 깜빡.
에슬린은 눈을 떴다.
익숙한 듯 낯선 천장이 눈앞에 있었다.
“정신이 좀 들어?”
건조한 목소리는 익숙한 것이었다. 에슬린은 고개를 돌려 창백한 낯의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네…… 저는…….”
그녀가 잠시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눈만 끔뻑거렸다. 디에리안의 깊고 깊은 한숨 소리가 이어졌다.
“차 마시다 갑자기 기절했다고. 내 훌륭한 마법 덕에 지금은 괜찮아진 것 같지만.”
그러고 보니 아직 응접실이었다.
그녀는 방 한쪽에 놓인 기다란 의자에 누워 있었다. 다행히 정신을 잃었던 시간이 길지는 않았던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키자, 디에리안이 손을 물렸다. 아까부터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더라니 그가 마법을 불어넣고 있었던 것 같았다.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아, 죄송해요.”
“진짜 북부에 내 묘비 세우는 줄 알았잖아.”
에슬린은 머쓱하게 일어나 앉았다.
디에리안이 그제야 안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끝없는 툴툴거림과 함께였다.
“그렇게 피곤했으면 말을 하지. 보니까 몸에 피로가 엄청나게 쌓여 있던데, 대체 일을 얼마나 하길래 차를 마시다 쓰러져? 잠깐만, 이거 노동 착취 아니야? 어때? 수도에 가면 내가 리페리우스를 고발해 주지.”
“그런 거 아니에요.”
에슬린은 가볍게 그의 말을 막았다.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삐죽거리던 디에리안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았다.
“몸 상태는 좀 어떤데?”
“덕분에 이제 괜찮아요. 치유해 주셔서 감사해요.”
“당연하지. 내 마나를 엄청나게 쏟아부었으니까.”
왜 그렇게 기절까지 했나 싶을 정도로 몸이 가뿐했다. 디에리안이 마나를 쏟아부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다.
휴, 디에리안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동시였다.
똑똑. 밖에서 작은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등장한 건, 집사장이었다.
“시간이 다 되었습니다. 밤이 늦었으니, 마법사님께서도 쉬시지요.”
그녀는 공손하게 이야기했다.
오늘따라 오랫동안 자리가 파하지 않자, 시간을 알려 주기 위해 온 듯싶었다.
“그래, 알겠어.”
디에리안이 선선히 대꾸했다. 잠시 에슬린을 보던 그가 피곤한 듯 얼굴을 문질렀다.
“먼저 가 봐. 난 읽던 책을 좀 정리해야 해서.”
“네. 그럼, 푹 쉬세요.”
출입문으로 향하던 에슬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속삭이듯 이어진 말에 디에리안은 별다른 대꾸 없이 가볍게 어깨만 들썩일 뿐이었다.
에슬린은 그 모습을 보며 응접실을 나섰다.
탁.
문이 닫혔다. 사용인들도 모두 잠든 밤이었다. 고요하고 어두운 복도에 에슬린과 집사장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그럼 집사장님,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에슬린은 집사장에게 꾸벅 인사했다. 방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틀었을 때였다.
“에슬린.”
고요한 집사장의 목소리가 자신을 불러 세웠다.
“네, 집사장님.”
에슬린은 몸을 돌려, 살짝 허리를 굽힌 채 대답했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태도였다.
“오늘 수도에서 급보가 왔다.”
저절로 고개가 들렸다.
에슬린을 내려다보는 눈빛은 어둠에 잠겨 있어 감정을 잘 읽을 수 없었다.
“급보요?”
“그래. 새로운 마물 서식지를 발견했다는 소식이었지.”
집사장의 목소리는 몹시 작았다. 그러나 사위가 고요했기에 에슬린은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새로운 마물 서식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오직 하나였다.
“가주님께서는 곧 마물 전쟁에 나서실 거다.”
“…….”
“짧게 걸리실 때도 있지만, 지난번엔 8개월이나 저택을 비우셨지.”
리페리우스는 대대로 마물 퇴치를 책임져 온 기사 가문이기도 했다.
소규모 서식지 같은 곳은 가주인 테베트가 직접 참전할 필요까진 없었다.
그러나 최근의 그는 크든 작든, 모든 마물 전쟁에 빠짐없이 참전하고 있었다.
피에 미친 악마 공작.
피와 살점 위에 선 그를 보며, 누군가 그렇게 말했다는 걸 들었다.
“그렇습니까.”
에슬린이 차분하게 대꾸했다.
투명한 안경 너머, 에슬린을 보는 집사장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너 가주님과…….”
그러나 그녀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결국 다음 말을 잇지 않았다.
“아니, 아니다. 가 보거라.”
“네.”
에슬린은 다시 몸을 돌렸다. 집사장은 이번에야말로 그녀를 붙잡지 않았다.
기나긴 복도를 걸었다. 집사장의 시선이 오래 달라붙었으나 크게 신경 쓰진 않았다.
테베트가 저택을 떠난다.
그 사실 하나가 에슬린의 머릿속을 메울 뿐이었다.
* * *
마법사 디에리안 프레이는 방문을 열자마자 멈칫했다.
순식간에 기분이 나락으로 떨어졌다.
“여긴 어쩐 일입니까? 저 지금부터 잘 건데요. 피곤해서.”
달갑지 않은 손님이 그의 방 한가운데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디에리안은 심기 불편한 얼굴로 눈앞의 인물을 노려보았다.
어둠을 그대로 삼킨 듯,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검은 남자가 디에리안을 슥 바라보았다.
번들거리는 검붉은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순간 소름이 돋아, 디에리안은 서둘러 램프의 불을 밝혔다
“시킨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쉴 생각뿐이군.”
남자, 테베트의 목소리에는 비아냥이 가득했다.
디에리안은 순간 울컥했다.
“하. 오늘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십니까?”
지금 누구 때문에 마력을 다 썼는데?
그러나 디에리안은 뒷말을 꾹 삼키고 침대 한켠에 아무렇게나 놓인 가방을 향해 걸어갔다.
야생 동물 같은 눈동자가 그의 움직임을 느릿하게 훑었다.
“대체 무슨 일인데요?”
“왜 기억에 진전이 없지? 곧 약속한 일주일이야.”
“전에도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기억은 아주 섬세해서 신중히 건드려야 한다고요. 과정이 중요한 거 아니겠습니까, 과정이.”
투덜거리듯 디에리안이 대꾸했다. 테베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싸늘한 기운이 가득했다.
“정말 기억 마법을 완성한 게 맞긴 한가?”
디에리안은 순간 뜨끔했다. 책을 가방에 쑤셔 넣던 그가 억지로 돌아가지 않는 고개를 돌렸다.
“……아니, 뭔 말을 또 그렇게 합니까?”
작은 구시렁거림이 튀어나왔다. 테베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며 테이블 위에 턱을 괴었다.
“아무래도 네가 내 눈을 피해 시간이나 때우는 것 같아서 말이지.”
‘천잰데?’
디에리안은 귀신같은 그의 눈치에 속으로 감탄했다. 물론 얼굴에 티를 내지는 않았다.
테베트가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하게 말아 올렸다.
디에리안은 불안했다. 저 악마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면 으레 제 속을 뒤집어 놓는 말을 하곤 했기 때문에.
“그녀를 예전 주인으로 착각해, 혼자 추억 팔이나 하는 게 아닌가 싶고.”
“…….”
예상은 적중이었다.
“황녀를 들먹여 화가 나나?”
“그 이상 입을 놀리면 가만 있지 않겠습니다.”
답지 않게 디에리안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테베트는 재미있는 장난감을 발견한 사람처럼 웃었다.
“그럼 제대로 해. 날 속일 생각 하지 말고.”
디에리안은 물끄러미 테베트를 보았다. 뭔가를 가늠해 보듯 적갈색 눈동자가 가늘게 좁아 들었다.
“……아하.”
그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지금 초조하군요, 각하.”
털썩. 그대로 테베트의 맞은편에 앉았다. 테베트가 눈동자만 굴려 디에리안의 움직임을 좇았다. 냉랭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디에리안은 의자에 비스듬히 앉으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그러고 보니 아까 수도에서 급보가 온 것 같던데.”
“…….”
“곧 마물 전쟁에 나가게 된 거예요. 그래서 초조한 거였어.”
마법사의 얼굴에 비웃음이 한가득이었다. 테베트의 가라앉은 시선에도, 그는 빈정거리는 태도를 멈추지 않았다.
“자리를 비운 사이 도망갈까 봐.”
주어는 없었지만 두 사람 모두 누굴 지칭하는지 알았다.
빠드득.
테베트가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주먹에 힘을 주었다.
* * *
‘기억에 공백이 있어.’
에슬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왜 공백이 생긴 거지?’
예상되는 바는 오직 한 가지였다.
자신이 이 몸에 빙의하면서 어떤 형태로든 기억이 흐트러졌다는 것.
‘디엘이라면 뭔가 알고 있을까?’
에슬린은 방으로 향하려던 걸음을 되돌렸다.
빙의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구멍 난 기억에 관해서라면 뭐라도 힌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지금은 방에 있겠지.’
자연스럽게 그녀의 걸음이 디에리안에게 배정된 본채의 방으로 향했다.
어두운 복도의 끝.
자그마하게 새어 나오는 불빛에 에슬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예전 주인으로 착각해, 혼자 추억 팔이나 하는 게 아닌가 싶고.”
에슬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테베트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디엘의 방에 공작이 왜……?’
본능적으로 에슬린은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이 손님층엔 개미 한 마리 없이 고요했다.
그녀는 장식장 뒤로 몸을 묻었다. 방문이 열려 있어, 그들의 목소리는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수도에서 급보가 온 것 같던데.”
“…….”
“곧 마물 전쟁에 나가게 되겠군요. 그래서 초조한 거였어.”
싸늘한 디에리안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자리를 비운 사이 도망갈까 봐.”
그가 그렇게 덧붙이자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두 사람은 제 얘기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불안하면 전쟁 같은 거 가지 말고 공작저에 천년만년 붙어 있으면 되지 않습니까?”
싸늘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디에리안의 그 말에 테베트가 짧게 웃었다.
“바보 같은 소리. 황궁 놈들이 새로운 마물 서식지를 발견하길 얼마나 기다렸는데.”
“하. 그렇겠죠.”
디에리안이 냉소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성배가 거기 있을지도 모르니까.”
‘뭐라고?’
에슬린은 입을 틀어막았다.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성배라니!’
100년 전에 사라졌던 그 성배가 모습을 드러냈다고?
믿을 수 없는 말이었다.
두 눈이 한계까지 벌어지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게 놀라움 때문인지 기대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