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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23화 (23/147)

23화

‘말도 안 돼. 대체 언제 성배를 발견한 거지?’

에슬린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디에리안의 목소리는 빠르게 이어졌다.

“그래서?”

그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전쟁터를 구르고 굴러 성배를 찾아, 결국 1황자에게 바칠 겁니까?”

“…….”

“저 하녀와 함께 이 대륙을 떠나기 위해서요?”

에슬린은 이제 한계였다. 과부하 걸린 뇌가 정보를 받아들이기를 거부하고 있었다.

뭐가, 어쩌고 어째?

성배가 나타난 것도 모자라 그걸 1황자에게 바친다고?

그러고 나서 이 하녀와 함께 슐든 대륙을 떠날 거라고?

‘이게 다 대체 무슨 말이야?’

에슬린은 혼란스러웠다.

“허튼소리. 망상도 정도껏 해.”

테베트가 말했다. 지나치게 낮고 음산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디에리안은 테베트의 그 말이야말로 허튼소리라고 생각했다. 헛된 꿈을 꾸는 건 테베트였다.

리페리우스 주제에 평범한 사랑을 꿈꾸다니.

웃음이 나왔다. 억누른 조소였다.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이를 악무는 바람에 짓씹은 발음이 튀어나왔다.

“전하께 독배를 건넨 겁니까?”

감정 변화 없던 마법사의 목소리가 그때만큼은 엉망으로 흔들렸다.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인간 같으니라고.”

분노에 찬 말투였다.

듣고 있던 에슬린은 입술을 잘게 떨었다.

“결국 당신은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만 움직입니다. 누가 황제가 되든, 심지어 리페리우스 가문조차 당신에게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겠죠.”

“…….”

“아, 소름 끼쳐라.”

디에리안은 다시 본래의 비아냥대는 어조를 되찾았다.

“저였다면 당신의 그런 집착에 소름 끼쳐서 진작 달아났을 겁니다.”

“닥쳐.”

에슬린은 어깨를 움츠렸다. 테베트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낮았던 탓이었다.

“그거…… 진짜 사랑 맞습니까?”

“닥치라고 했어.”

“진짜 사랑이라기엔 너무 이기적이고 음습한 데가 있어서 말입니다.”

콰앙!

무언가가 부서지는 듯한 커다란 굉음이 어두운 복도를 울렸다. 깜짝 놀란 에슬린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쿵쿵쿵쿵. 심장 뛰는 소리가 온몸을 메웠다.

곧이어 문틈으로 마법의 흔적 같은 푸른 빛이 가늘게 새어 나왔다. 디에리안이 무슨 형태로든 마법을 쓴 것 같았다.

“그만두십시오. 제가 당신을 이길 거라곤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이 저택을 부술 정도의 마법은 할 줄 압니다.”

“오늘따라 정말 쓸데없는 말이 많군, 마법사.”

테베트가 중얼거렸다.

“입 다물고 마법에만 집중해. 그게 네 유일한 장점 아니던가? 기억 마법을 완성한다고 했기에 널 들인 거야. 그것만 아니었다면 난.”

“…….”

“반드시 널 죽였을 거다.”

팽팽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어느 순간 푸르게 새어 나오던 빛이 멈추었다. 디에리안이 마법을 거두고 말했다.

“협박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겁니다. 하지만 기한은 처음 약속한 일주일뿐이에요. 그때까지 진척이 없으면 이번 마법이 소용없다는 말이니, 연구를 좀 더 해서 오도록 하죠.”

더없이 단호한 말투였다.

디에리안은 속내를 감추기 위해 일부러 빙글빙글 웃었다. 연구가 좀 더 필요하다는 말만큼은 사실이었다.

“위대하신 공작 각하께선 스트레스나 잘 풀고 오십쇼. 신나게 마물이나 베면서.”

그는 잊지 않고 빈정거렸다.

“아, 행여라도 덜컥 죽지 않게 조심하시고.”

이후 테베트가 뭐라고 대꾸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슬린이 걸음을 옮겼기 때문이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움직이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난장판이 된 머릿속 때문에 다른 건 신경 쓰이지 않았다. 어떻게 본채를 벗어났는지조차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에슬린? 어디 다녀와?”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세피아가 물었다. 에슬린은 말없이 침대에 올라갔다.

이불을 걷어쥐는 손이 떨렸다. 거친 이불에 그대로 몸을 묻었다. 눈을 꾹 감으니 조금 전의 대화가 생생히 떠올랐다.

‘성배가 모습을 드러냈어.’

에슬린은 베르타니아 제국의 문장을 떠올렸다.

두 개의 검.

그 교차한 검이 지키고 있는 고블릿 잔.

황제를 상징하는 성배.

이불을 움켜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은 죽었다. 또 다른 후계자인 2황자는 아무런 힘이 없다.

그 상황에서 1황자가 성배까지 손에 넣는다면…….

‘다음 황제는 1황자가 될 거야.’

그것도 성배를 등에 업어 아주 강력한.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다.

교활한 1황자의 얼굴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황금빛 성배를 쥐고 저열하게 웃는 그 표정까지.

게다가 그런 1황자에게 성배를 바치는 건…….

‘공작이 성배를 찾고 있었다니.’

아찔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이불을 덮고 있음에도 냉기가 느껴졌다.

‘모든 의문이 풀렸어.’

중립이었던 리페리우스가 1황자를 선택한 이유.

‘1황자를 따르는 대가로 자유를 허락받을 생각이었던 거야. 이 하녀와 맺어지기 위해서…….’

하녀에 대한 테베트의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가 다른 사람과 결혼하는 건 상상조차 되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공작의 신분으로, 그것도 리페리우스의 신분으로 하녀와 정식으로 맺어지는 것은 어려웠을 터.

‘공작위를 버리고, 이 대륙을 떠나 새로운 터전을 만들 생각이었겠지.’

그리고 그 안전한 정착을 1황자가 약속한 것일 테다.

‘그걸 위해 성배를 찾고, 나를…….’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전하께 독배를 건넨 겁니까?’

디에리안의 떨리는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렸다.

‘이 하녀를 위해 나를 죽게 한 거야.’

에슬린은 입술을 꾹 말아 물었다.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들었다.

‘난 대체 뭘 착각했던 걸까?’

인정한다.

누군가에게 한결같은 사랑을 받는 기분은,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 ‘나쁘지 않은 기분’에 대한 핑계를 찾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황궁엔 가지 않으시는 건가요?’

‘황실에서 편지가 자주 오는 것 같아서요. 특히 1황자님께.’

‘리페리우스가 1황자 전하의 편에 섰으니 더 확실하겠네요.’

도대체 자신은 뭘 확인하고 싶었기에 그런 질문들을 던진 걸까?

‘1황자라. 그 덜떨어진 놈 만날 시간에, 마물 하나 더 베는 게 낫습니다.’

그리고 그 답을 들었을 때.

에슬린은 속절없이 안도하고 말았다.

아, 공작은 1황자 편이 아니었구나…….

그렇다면 사실 독배를 건넨 것도 그의 의지가 아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종의 사고 같은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그를 지나치게 경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조금은, 의지해도 괜찮지 않을까.

“하하…….”

비웃음이 터져 나왔다.

스스로에 대한 경멸이 솟구쳤다.

불안정함은 사람을 나약하게 만든다. 그걸 알고 있었음에도 에슬린은 흔들리고야 말았다.

‘공작의 사랑을 받는 건 내가 아닌데.’

이 하녀일 뿐인데.

그 껍데기를 뒤집어썼다고 마치.

‘이 하녀가 되기라도 한 것처럼 굴다니.’

그녀는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바보 같아.’

모든 게 바보 같았다.

결국 자신은 이 하녀와 테베트 사이에 끼어든 이방인일 뿐이다.

이불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기름이 부족한 램프의 불이 사르르 꺼져 들었다.

자꾸만 익숙지 않은 감정이 솟구쳤다. 뭐라고 이름 붙여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감정이었다.

* * *

“너 요새 밤마다 어딜 가는 거야?”

크게 기지개를 켠 세피아가 물었다.

일과를 모두 마친 저녁 시간.

에슬린은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다시 나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냥 산책.”

“산책? 뭐…… 봄이라 날씨가 좋긴 하지.”

세피아는 침대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나저나 가주님께서 또다시 전쟁에 나서시려나 봐.”

치마 주름을 펴던 에슬린이 동작을 순간 멈추었다.

“들었어.”

“저택이 또 썰렁해지겠네. 일거리는 줄어서 좋지만.”

“언제쯤 출타하시는지 알아?”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세피아는 기억을 더듬는 듯 미간을 살짝 좁혔다.

“글쎄에. 근데 레나 말론 기사단에서 보급품 사들이는 속도가 엄청 빠르대. 그러니 아마 조만간이지 않을까?”

“그렇구나.”

“근데 왜?”

램프 불에 반짝이는 세피아의 눈동자가 선명했다. 에슬린은 그 눈동자를 보며 싱긋 웃었다.

“그냥. 궁금해서.”

“아, 하긴. 넌 가주님 식사 담당도 겸하고 있으니까 일이 확 줄긴 하겠다.”

“그렇지, 뭐.”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에슬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먼저 자. 세피아, 너 엄청 피곤해 보여.”

“으응. 오늘은 일찍 자야지.”

기다렸다는 듯 세피아에게서 긴 하품이 흘러나왔다.

“일찍 와, 에슬린. 램프 불은 켜 둘게.”

“그래.”

에슬린은 그대로 방을 빠져나와, 본채의 응접실로 향했다.

“…….”

응접실 안으로 들어선 그녀의 얼굴에 의아함이 맴돌았다.

늘 앉던 티 테이블 위에 못 보던 가방 하나가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 왔어?”

디에리안이 눈만 슥 들어 에슬린에게 인사했다. 테이블 쪽으로 걸어가며 에슬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마법사님, 이건 뭔가요?”

“아, 짐 좀 싸 봤어. 오늘이 마지막 날이잖아.”

에슬린의 발걸음이 정지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약속했던 일주일이 다 가 버렸음을 깨달았다.

‘디엘과 헤어져야 한다니.’

며칠째 그녀의 기분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에슬린은 한 번 더 기분이 나락으로 빠져드는 것을 느끼며 자리에 앉았다.

디에리안은 낡은 천 가방에 온갖 책들을 쑤셔 넣느라 바빠 보였다. 다른 가방이 없는 걸 보면, 저 책들이 그가 가져온 유일한 짐인 듯했다.

“뭐야, 그 서운한 표정은?”

야무지게 가방을 여미던 디에리안이 에슬린을 슬쩍 보며 물었다.

“일주일이 이렇게 빨리 지날 줄 몰랐거든요.”

“오, 나랑 헤어지는 게 꽤 아쉽다는 것처럼 들리는데?”

“아쉬워요.”

에슬린은 망설임 없이 말했다.

예상치 못한 대꾸에 디에리안이 잠시 눈만 깜빡였다.

“뭐, 이 북부는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가 뾰족한 턱을 모로 기울였다. 이내 에슬린을 보며 씩 웃는다. 모처럼 비틀리지 않은 순수한 웃음이었다.

“덕분에 즐거웠어. 그쪽은 썩 괜찮은 티 메이트였던 것 같아.”

“마법사님…….”

에슬린은 할 말이 많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터질 듯한 그의 짐가방이 왠지 모르게 야속했다.

‘나도 함께 가고 싶어. 디엘과.’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 자신을 아는 사람과 조금이라도 함께 있고 싶었다.

이 하녀가 아닌, 진짜 에슬린 자신을.

물론 지금의 디에리안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에슬린을 공작가 하녀라고 생각하고 있겠지만.

‘차라리 정체를 밝히고 싶어…….’

그런 충동이 에슬린의 온몸을 사로잡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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