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자, 그럼 마지막 티타임을 가져 볼까?”
타는 에슬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디에리안이 가볍게 말했다.
에슬린은 말없이 차를 우렸다. 어느새 에슬린과 디에리안 모두에게 익숙한 광경이었다.
그에게 차를 건네고 에슬린 또한 자신 몫의 찻잔을 들었다. 습관처럼 챙겨 온 소식지를 펼쳤다. 읽히지 않는 글자를 억지로 읽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어, 그거.”
한쪽 눈썹을 구긴 디에리안이 소식지 뒷면을 보고 말했다.
“네?”
“아니, 그 소식지 맨 뒤편에 있는 기사 말이야.”
“맨 뒤 기사요?”
디에리안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을 돌려보았다. 그곳에는.
〔환상의 선율, 로하르트 젤킨스. 그는 어디에?〕
그런 기사가 있었다.
에슬린이 눈을 크게 치떴다.
‘로하르트 젤킨스?’
로하르트 젤킨스는 베르타니아 제국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사교계에서 전설처럼 통하는 이였다.
에슬린 또한 로하르트의 연주를 들어 본 적이 있었다.
귀를 타고 흐르는 피아노 선율은 마치 천국에라도 온 듯 황홀했다.
‘오늘은 어떤 연주를 원해, 에슬린?’
그렇게 묻던 목소리가 함께 떠올랐다.
“대체 어디서 뭘 하길래 행방불명인 건지, 저 멍청이.”
턱을 괴고 있던 디에리안에게서 작은 혼잣말이 튀어나왔다. 에슬린은 반사적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행방불명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어?”
디에리안이 손에서 턱을 살짝 떼어 냈다. 적갈색 눈동자에 난처함이 살짝 스쳤다.
“혼잣말이야. 잊어.”
에슬린은 소식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마법사님, 알려 주세요. 제가 그…… 로하르트 님의 팬이어서요.”
“…….”
디에리안은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눈만 깜빡였다.
“마법사님.”
에슬린이 재차 그의 이름을 불렀다. 간절한 눈빛과 함께였다.
잠깐의 침묵 후, 디에리안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 눈동자로 말하니 안 들어줄 수가 없네.”
그가 턱을 괴었던 손으로 찻잔을 덧그렸다.
“로하르트는 나랑 같은 주인을 모셨어. 그때도 말했지만 난, 우리는 그분을 잃었고…… 우리가 맞서 싸우던, 그분의 적이라고 해야 하나?”
에슬린은 입 안 살을 꾹 깨물었다.
‘내 적이라면, 1황자밖에 없는데.’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 적에게 괴롭힘을 좀 당해서 말이야.”
디에리안이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말을 들은 에슬린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로하르트는 팔이 부러졌어. 사고인 척했지만, 그건 누가 봐도 고의였지. 아무튼 그래서 좀 다쳤어. 다행히 다 나았다고는 들었는데.”
“…….”
“그 이후로 영 소식이 없네.”
그는 한 번 더 소식지를 흘깃거리며 말을 마쳤다. 에슬린은 뒷목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죽고 1황자가 내 측근이었던 자들을 괴롭히고 있구나.’
아무리 그들의 안위를 보장받았다고는 하지만…….
어쨌든 에슬린 자신은 이제 세상에 없는 이였다.
1황자는 권세의 끝을 달리고 있었고. 그런 그에게 부당한 괴롭힘을 당한다 해도, 끈 떨어진 신세인 그들은 쉽게 저항할 수 없었을 것이다.
에슬린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정체를 드러내? 디엘과 같이 돌아가?’
삽시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듯, 기분이 가라앉았다.
‘황녀도 아니고 하녀로 돌아가, 측근들의 짐이 될 생각을 했다니.’
자신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이 우스울 지경이었다.
에슬린은 눈앞의 디에리안을 바라보았다. 정체를 밝히면 분명 디에리안은 기뻐할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힘이 없어진 자신을 지켜 주겠다고 하겠지.
‘그들을 지켜야 하는 건 내 역할인데.’
자괴감이 들었다. 몹시 씁쓸했다.
“표정이 어둡네. 아, 전혀 걱정하지 마! 분명 어디서 놈팡이처럼 잘 지내고 있을 테니까.”
디에리안이 에슬린의 안색을 살피며 다소 급한 기색으로 덧붙였다.
“그리고 그놈이 그렇게 막 기죽고, 어디 가서 당하기만 하고 그런 스타일 아니야. 전 동료로서 내가 장담해.”
어쩔 줄 모르는 적갈색 눈동자를 보며 에슬린은 눈을 내렸다. 심장이 찔려 더는 디에리안을 마주 볼 수가 없었다.
“……차를 더 만들어 드릴게요.”
결국 에슬린은 한숨처럼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마차가 멀어졌다.
누군가를 찾듯 한참을 서성이던 마법사가 결국 마차를 타고 떠났다.
왔던 그 날과 마찬가지로 집사장의 배웅을 받으며, 홀로.
“여기서 혼자 뭐해요?”
부드러운 음성에 에슬린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인기척이었다. 굳이 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마법사님 가시는 걸 보고 있었어요.”
“무능하기 짝이 없는 놈입니다. 당신 배웅을 받는 분에 넘치는 행운을 얻을 자격도 없어요.”
테베트가 빈정거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벽에 붙은 램프 불빛 아래, 그의 강인한 턱선과 날렵한 콧대 같은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잠시.”
테베트가 갑자기 몸을 움직여 에슬린 앞으로 이동했다. 그러자 이번엔 그의 얼굴 정면이 똑바로 보였다.
“안색이 안 좋군요. 어디 아픕니까?”
그는 허리를 살짝 굽힌 채였다. 에슬린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눈동자에 염려가 담겨 있었다.
에슬린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괜찮아요.”
그 옅은 미소 하나에 테베트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받아요.”
그가 한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에슬린에게 건넸다. 순간 아찔한 향기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흰색 포장지로 감싼 라일락 꽃다발이었다.
“이건…….”
“당신 머리카락 색과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매끄러운 입술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역시 잘 어울리는군요.”
그렇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지나치게 달았다.
눈앞이 보랏빛으로 물드는 기분이었다. 흐드러지게 핀 라일락 꽃밭을 통째로 품에 안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마실 때마다 강렬한 꽃향기가 온몸을 파고들었다.
“에시.”
잠시 에슬린을 응시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네, 가주님.”
에슬린은 가만히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림처럼 웃고 있던 낯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들어서 알겠지만, 새로운 마물 서식지가 발견되었습니다.”
“…….”
“때문에 전 공작저를 잠시 떠나야 해요.”
에슬린은 라일락 꽃잎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군요.”
“빠르게 돌아오겠습니다.”
테베트는 중요한 판결을 앞둔 사람처럼 초조해 보였다.
“두 달, 아니 한 달을 넘기지 않도록 최대한 빨리 돌아올 테니, 부디.”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표정을 가다듬었다.
“공작저에서 날 기다려요.”
늘 그렇듯 부드럽게 웃는 낯이었다. 그러나 붉은 눈동자에는 숨길 수 없는 긴장감이 맴돌고 있었다.
“여름이 오기 전, 한 번 더 마법사를 부를 겁니다. 그러면 이번에야말로 기억을 찾을 수 있을 거예요.”
“…….”
“그러니 날 기다리겠다고 약속해 줘요.”
간절한 애원이었다. 벽에 걸린 희미한 램프 불빛 아래, 테베트의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당신이 기억을 찾고, 제가 돌아오게 되면 그땐…….”
테베트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는 더 덧붙이지 않았다.
에슬린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정신이 다 혼미해질 정도의 라일락 향기가 났다.
그녀는 테베트를 보았다. 미소 지었다.
“가주님.”
옅게 웃으며 그를 부르자, 테베트는 본능적으로 에슬린을 향해 한 발자국 다가섰다.
맹목적이고도 한결같은 애정이 담긴 시선.
“하녀인 제가 어딜 가겠어요? 공작저에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 다녀오세요.”
그 시선에 에슬린은 그렇게 답했다.
“기다리겠습니다.”
차분한 목소리는 테베트가 기다리던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어딘지 모르게 불안한 시선을 지우지 못했다. 그렇다고 더 매달리는 것도 하지 못했다.
꽃향기가 났다. 그건 라일락이었다.
에슬린은 오래도록 이 라일락 향기를 잊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 * *
테베트 리페리우스 공작이 마물 전쟁에 나섰다.
지난 전쟁에서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이었다. 황제는 직접 무기와 편지를 보내며 그런 그를 격려했다. 사람들은 당연한 듯 공작의 승리를 예견했다.
수도가, 온 제국이 새로운 전쟁에 관한 이야기로 들썩였다.
정작 북부 리페리우스 공작저는 아무 일 없는 듯 차분했다. 평소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생활들이 이어졌다.
새롭게 생긴 중요한 변화 한 가지를 제외하고 말이다.
“저택의 출입이 모두 봉쇄되었다. 다들 동요하지 말고, 가주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얌전히들 자리를 지키거라.”
집사장은 사용인을 모아 놓고 그렇게 말했다.
그랬다. 공작저를 떠나던 주인이 지금껏 유례없던 봉쇄령을 내리고 떠난 것이다.
그 누구도. 심지어 황제라 할지라도 마음대로 리페리우스 공작저에 드나들 수 없게 되었다.
굳게 닫힌 문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열리지 않으리라.
“생각보다 나쁘진 않은데?”
“그러게. 일도 별로 없고.”
의외로 저택의 사용인들은 큰 불만을 갖지 않았다. 공작저의 모든 일이 미뤄져, 몹시 한산해졌기 때문이었다.
바깥에 나가지만 못할 뿐, 휴가나 다름없는 느긋한 시간이 이어졌다.
단 한 사람만 빼고.
“…….”
에슬린은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꽉 여민 가방은 언제 들고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준비된 모양새였다.
‘무사히 티켓도 손에 넣었어.’
손에 쥔 종이를 바라보았다.
남부행 공용 마차 티켓.
기한은 한 달 이내 탑승.
입이 무거운 하인 한 명을 통해 저택 문이 닫히기 전 가까스로 구한 것이었다.
‘남부로 가 바다를 건널 거야.’
에슬린은 티켓을 움켜쥐었다.
모든 준비는 마쳤다.
이제 굳게 닫힌 저 문을 열고 나가기만 하면 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