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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25화 (25/147)

25화

테베트가 떠난 지 사흘이 흘렀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이상할 정도로 매섭게 내리는 봄비였다.

“저택 출입을 이렇게까지 통제한 적은 처음 아니야?”

“처음이래. 문지기가 그랬어.”

“가주님께선 왜 그런 명령을 내리고 가신 걸까? 특히 뭘 들여오는 건 돼도, 나가는 건 안 된다니…… 굳이?”

“글쎄. 가주님 생각을 어떻게 알겠어?”

“그건 그렇지만.”

설거지를 하며 하녀들이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바쁘지 않은 오후였다.

이 설거지만 마치면 저녁 시간까지 별달리 할 일도 없을 터였다. 에슬린은 하녀들 옆에서 마른 헝겊으로 그릇을 닦았다.

“근데 웬 봄비가 이렇게 무섭게 온담? 봄인데 공기가 싸늘해. 아, 에슬린. 도와줄게.”

“응? 아냐. 다 끝났어.”

설거지를 마친 하녀가 에슬린의 일거리를 집어 들었다. 에슬린은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으나 하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빨리 마치고 같이 차나 마시러 가자.”

애교 있게 덧붙인 말에 에슬린은 미소를 머금은 채 알겠다고 대답했다.

어느 정도 일을 마무리한 뒤, 에슬린은 주방 하녀들과 휴게 공간으로 향했다. 할 일을 마친 사용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에슬린은 그 틈에서 따뜻한 로즈메리 차를 받아 마셨다.

“에슬린, 오늘 자 소식지 들어왔어. 요즘 저택 출입이 자유롭지 않아서 자꾸 늦어지네.”

우비를 입은 하인 하나가 다가와 말했다. 북쪽 별채의 소식지 보급을 담당하는 하인이었다.

에슬린이 소식지를 즐겨 본다는 걸 알고, 그는 종종 이렇게 알려 주곤 했다.

“고마워, 마르크.”

“어휴, 뭔 비가 이렇게 오냐? 은근히 춥네.”

“이거 마셔.”

우비의 빗물을 털던 하인은 에슬린이 내민 차를 덥석 받아 들었다.

저택 문이 닫힌 이후로 소식지 도착이 점점 더 늦어지고 있었다. 소식지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들 또한 그랬다.

사용인들 모두 갑작스레 저택의 문이 닫힌 이유를 알지 못했다.

“…….”

에슬린을 제외하고 말이다.

‘아직은 출입 경비가 삼엄한가 보네.’

에슬린은 덤덤하게 차를 마시며 생각했다. 저택을 나가기 위해 며칠째 기회를 엿보는 중이었다.

철옹성처럼 닫힌 문이었으나 반드시 느슨해지는 때가 오리라.

테베트의 귀환이 늦어질수록 아마 경계는 더 해이해질 터였다.

‘소식지나 가져다 읽어야겠다.’

복잡한 생각을 털어 낼 겸, 에슬린은 몸을 일으켰다.

하늘이 온통 흐렸다.

낮인지 밤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었다. 에슬린은 비가 휘몰아치는 회랑을 걸어 북쪽 별채로 향했다.

익숙한 로비가 나타나고, 저 멀리 한쪽 벽면에 빼곡하게 들어선 소식지 선반이 눈에 들어왔다.

테베트가 에슬린을 위해 만들어 놓은 공간이었다.

‘좋아하는 소식지가 있으면 말해요. 그 출판사를 사 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던 남자의 다정한 얼굴이 떠올랐다. 에슬린은 생각을 지우기 위해 고개를 흔들었다.

그때였다.

‘……?’

에슬린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소식지 선반으로 다가서는 그녀의 시야에 지나치게 큰 활자들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에슬린은 미간을 좁혔다. 저절로 발걸음이 빨라졌다.

“…….”

공작저로 들어오는 소식지는 종류가 몹시 다양했다. 문화 예술, 정치, 국제 정세, 하다못해 말도 안 되는 삼류 가십거리를 담은 소식지까지.

그런데 오늘은 모든 소식지가 오직 한 가지 소식만을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에슬린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었다. 아무렇게나 잡히는 종이 뭉치를 집어 들었다.

〔2황자, 위독.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그 커다란 글씨가 에슬린의 눈에 창처럼 내리꽂혔다.

〔황성 후계자 구도, 승기는 1황자께.〕

〔2황자, 독살 가능성?〕

“에르단!”

온갖 소식지들을 헤치며 비명처럼 에슬린이 외쳤다. 글자 사이를 내달리는 눈동자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우르르, 쾅!

하늘이 무너지는 소리가 났다. 어두운 로비에 번쩍이는 빛이 쇄도했다.

“에슬린?”

우연히 에슬린을 발견한 세피아가 소식지 선반 앞에 주저앉은 그녀를 향해 다가왔다.

에슬린의 작은 몸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창백한 낯 위로 번개가 한 번 더 번쩍였다. 그 빛에 드러난 짙푸른 눈동자에 깊은 두려움이 스며 있었다.

‘에슬린, 넌 내가 꼭 지켜 줄게.’

귀에 익은 목소리가 환청이 되어 들려왔다. 에슬린은 귀를 막았다.

또다시 천둥이 쳤다.

‘에르단, 네가 어떻게?’

‘으음……. 글쎄. 목숨이라도 바쳐서?’

‘네 목숨은 필요 없어. 네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니까.’

‘헤헤, 사실 나도.’

내가 왜 죽었는데?

내가 누굴 지키기 위해 그 모든 걸 버리고…….

쿠르르, 콰앙! 세상이 무너지고 있었다.

“에슬린! 대체 무슨 일이야?”

세피아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에슬린의 어깨를 다급하게 감싸 쥐었다. 문득 그녀의 시야에 에슬린이 쥐고 있는 소식지가 들어왔다.

〔2황자 에르단 베르타니아의 위기, 쌍둥이 황녀의 죽음이 원인인가?〕

그런 제목의 소식지였다.

‘에르단.’

에슬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신의 반신(半身)을 느껴 보려 했지만, 아무것도 느낄 수 없었다. 설령 그가 이대로 죽는다 해도 모를 것 같았다.

아니면 이미…….

두려움이 엄습했다.

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몸을 일으킨 건 순식간이었다.

* * *

집사장은 안경 아래 미간을 문질렀다. 방으로 돌아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리페리우스의 문이 닫힌 적은 처음이었다. 자신의 반대에도 소용없었다.

오히려 그녀를 바라보던 주인의 그 눈빛이 너무…….

“춥네.”

집사장은 몸서리를 치며 팔을 감쌌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걸음을 재촉하는 순간.

“깜짝이야!”

집사장의 어깨가 크게 튀었다.

어두운 별채의 복도, 자신의 방문 앞.

우두커니 서 있는 그림자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에슬린? 여기서 대체 뭘 하는 거냐?”

집사장은 램프의 불빛으로 눈앞의 인영을 비춰 보았다.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하녀.

에슬린 로즈벨이었다.

“집사장님, 드릴 말씀이 있어요.”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집사장은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 보던 그 하녀였으나, 어딘지 모르게 분위기가 달랐다. 서늘한 푸른 눈동자엔 감정 한 줌 담겨 있지 않았다.

집사장은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어쩔 수 없이 에슬린을 자신의 방으로 이끌었다.

“저택을 나가고 싶습니다.”

“뭐?”

문이 채 닫히기도 전, 에슬린이 말했다. 고요한 목소리는 평소처럼 나긋한 것이었다.

“추천장을…….”

숨이 모자란 듯 에슬린이 잠시 말을 멈추고 호흡했다.

“추천장을 써 주세요.”

집사장은 방 한켠에 놓인 책상에 앉았다. 에슬린에게도 자리를 권했으나, 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에슬린, 무슨 일이 있느냐?”

“…….”

나직한 물음에 약간의 침묵 후 에슬린이 말했다.

“하녀장님께는 말씀드린 적이 있어요. ……제게 동생이 하나 있는데, 지금 몹시 위독하다는 소식이 와 당장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

이번에 침묵한 건 집사장이었다. 그녀는 물끄러미 눈앞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미인도에서나 볼 법한 아름다운 외모였다. 작은 얼굴에 오밀조밀 들어찬 이목구비, 하얗고 매끄러운 피부, 풍성하고 윤이 나는 머릿결…….

그러나 무엇보다 에슬린에게는 작은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기백 같은 것이 있었다.

그게 곧게 잡힌 자세 때문인지, 아니면 깊고 우아한 짙푸른 눈동자 때문인지는 알 수 없었다.

‘뭐가 됐든 가주님의 마음을 끈 게 있었겠지.’

집사장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주님께서 찾으실 거다. 게다가 지금 저택 출입은 모두 통제되었어. ……누구 때문인지는 알겠지?”

투명한 안경 너머로 집사장이 에슬린을 보았다. 탓하듯 덧붙인 말에도 에슬린은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압니다. 하지만 전 상관없어요.”

“상관없다니, 너!”

“집사장님, 절 싫어하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느닷없는 말이었다. 그러나 집사장을 당황하게 하기엔 충분했다.

“에슬린, 나는……”

“절 어떻게 생각하시든 제겐 중요하지 않아요.”

한 치의 거짓 없는 진심이었다. 에슬린은 재빨리 다음 말을 덧붙였다.

“제게 추천장을 써 주세요. 그리고 저택을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

둘 사이에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거친 장대비가 창문을 때리는 소리만이 비현실적으로 크게 들렸다.

“……난 널 싫어한 게 아니다.”

조금 뒤, 집사장에게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리페리우스는 유서 깊은 중립의 별이지. 내 아버지와 할머님, 그리고 그 윗대까지…… 우리 가문은 대대로 리페리우스에 헌신해 왔다.”

그녀는 회한에 잠긴 표정이었다.

“난 이 가문에서 일하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해 왔어. 그래서 그 리페리우스의 이름을, 하녀 아이 하나가 먹칠하게 되는 건 아닌지 불안했다.”

원망의 말은 아니었다. 담담한 사실, 그리고 그 고백. 에슬린은 가만히 집사장의 말을 들었다.

“그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어.”

집사장은 그렇게 덧붙이고 긴 침묵을 지켰다.

얼마 후, 집사장이 몸을 바로 세웠다.

램프의 불빛이 일렁이는 여인의 눈동자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네가 뛰어난 하녀라는 건 알고 있다. 사리도 밝고, 부지런하며 똑똑하지.”

“…….”

“그러니 널 한 명의 하녀로만 여겼다면, 난 이 공작저를 위해 너를 절대 내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엄숙하고도 진중한 말투였다. 집사장이 에슬린의 얼굴을 지그시 응시했다.

다음 말이 나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어느 가문에 추천장을 써 주면 되겠느냐?”

그제야 에슬린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집사장과 눈을 맞췄다.

내내 기다리던 말을 드디어 듣게 된 푸른 눈동자에 서늘한 이채가 스쳤다.

“황궁입니다.”

고요한 목소리는 물러섬이 없었다.

“황궁의 하녀가 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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