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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26화 (26/147)

26화

황궁 하녀가 되겠다는 말에 집사장은 잠시 멈칫하였으나,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집무 책상 위에 어지러이 놓여 있던 서류 더미를 뒤적거렸다. 그러더니 곧 빈 종이 하나와 펜을 찾아 집었다.

“알겠다. 하지만 쉽진 않을 거야. 궁내부에 연줄이 없다면 더더욱.”

“네. 알고 있습니다.”

펜을 쥔 집사장의 손이 종이 위를 몇 번 오갔다. 에슬린은 참을성 있게 그 동작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언제 떠나겠느냐?”

펜을 쥔 채로 집사장이 물었다.

“오늘이요.”

단호한 답에 표정을 굳힌 건 집사장이었다.

그녀의 시선이 자연스레 어둑한 창 너머로 움직였다. 빗줄기는 조금 가늘어졌으나 여전히 세차게 이어지는 중이었다.

“비가 온다. 비라도 그치거든……”

“바로 떠나고 싶어요.”

“이 밤에 마차를 구하기가 어려울 것이다.”

“말 한 필이면 됩니다.”

목소리는 평연했다. 집사장은 설핏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기울였다.

“승마를 할 줄 아느냐?”

“네.”

“네가 대체 어디서 승마를…… 아니다, 알겠다.”

캐물으려던 집사장은 입을 다물었다.

범상치 않은 아이였다. 승마를 할 줄 안다 해도 더 놀랄 것도 없었다.

거기다…….

“그동안 리페리우스를 위해 헌신해 주어 고맙다.”

이젠 떠날 이였다.

탁.

집사장이 양피지 위에 유려한 필체로 쓴 추천장과 신분증명서를 내밀었다. 봉투에 넣고, 리페리우스 집사장의 인장을 찍었다.

에슬린이 조심스레 그 편지를 품 안에 넣었다.

“잠시 기다려라.”

그렇게 말한 뒤 집사장은 몸을 일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는 다시 돌아왔다. 비옷을 입은 채였다.

“문은 동쪽 샛문을 열어 두었으니 거기로 나가거라. 말 또한 그 앞에 매여 있을 것이다. 다른 짐은…….”

“괜찮습니다.”

에슬린은 아까부터 갖고 있던 짐가방을 슬쩍 보았다. 집사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으로 에슬린에게 우비를 건넸다. 약간의 돈과 함께였다.

“그럼 가거라. 그리고…….”

집사장의 주름진 눈가에 많은 감정이 일렁였다. 그러나 목소리만큼은 단호하게 흘려보냈다.

“돌아오지 말거라.”

리페리우스의 집사장, 라노 레밀턴의 마지막 말이었다.

말 한 필이 북부 메르바 시내를 가로질렀다.

고요한 밤이었으니, 인적 또한 없었다.

거센 빗줄기가 어깨를 때렸다. 에슬린은 말고삐를 단단하게 말아 쥐었다.

마차를 타고 가면 2~3주가량 걸리는 길이었다. 명마까진 아니어도 준마 정도는 되었으니, 이 말로 달리면 2주 안에는 도착할 수 있을 터.

‘말을 달리는 건 오랜만이네.’

들썩이는 안장 위에서 에슬린은 생각했다. 경주를 즐길 정도로 승마에 소질이 있던 그녀였다. 종종 주변 영지 시찰 또한 말을 달려서 가곤 했다.

물론 지금처럼 혼자는 아니었지만.

‘에르단…….’

에슬린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약속은 2황자인 에르단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이었다.

‘만약 그 약속을 어기고 1황자가 에르단을 해친 거라면.’

싸늘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에슬린은 말에 박차를 가했다. 물방울이 튀어 올라 발등을 적셨다.

‘이번 여름엔 포도를 실컷 맛보여 주겠습니다. 물론 겨울에도……. 내년에도 말입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파랗게 물결치던 어린 포도나무가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그녀의 발을 잡아끌듯 지난 기억이 진흙처럼 엉겨들었다.

에슬린은 고개를 털었다. 입술을 깨물었다.

아득하게 멀어진 공작저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이럇!”

속도를 높였다. 땅을 뒤흔드는 시끄러운 말발굽 소리로 자꾸만 끼어드는 목소리를 지워 버렸다.

저 멀리 굽이치는 까만 길이 보였다.

어둠이 내려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그곳은, 과연 지옥 길일까 또 다른 무엇일까?

긴 귀향의 시작이었다.

* * *

“리페리우스 공작, 그럼 다음에 뵙도록 하죠.”

단조로운 목소리였다. 그 끝이 살짝 떨리는.

테베트 리페리우스는 속으로 살짝 비웃었다.

‘아직 어린 티가 묻어나는 목소리군.’

그러나 표정에 드러내지는 않았다.

‘하긴.’

이제 막 후계자 전쟁에 뛰어든, 갓 성인식을 마친 황녀였다.

귀하게 자란 황궁의 보석에게 능숙한 대응을 바라는 것은 욕심일 것이다.

“예. 갑자기 찾아온 제 잘못입니다. 나중에 정식으로 인사드리겠습니다.”

그는 정중하지만 딱딱한 어조로 말하며 몸을 돌렸다.

응접실을 빠져나가는 발걸음엔 망설임이 없었다.

화려한 부채로 입가를 가린 황녀는 눈동자만 또르르 굴리며 테베트의 움직임을 좇았다.

‘소문만 화려했던 건가?’

처음 만나는 자리였으나, 일부러 아무런 약속 없이 불시에 찾아가 본 것이었다.

예상한 대로, 황녀에게선 조용한 축객령만 떨어졌다.

짧은 인사 나눔이었지만 테베트는 알 수 있었다.

‘크게 될 인물은 아니군.’

그걸 안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수확이었다.

그는 넓고 화려한 황궁 복도를 걸었다.

한쪽 머리를 넘겨 매끄러운 이마와 짙은 눈썹이 드러나 있었다.

정갈한 제복까지 빈틈없이 갖춰 입은 테베트 리페리우스는, 그야말로 모든 이들의 시선을 끄는 남자였다.

범접할 수 없는 기백과 특유의 분위기가 뒤섞이며 그의 주변 공기 밀도만 유독 짙게 느껴졌다.

“리페리우스 공작님이시잖아.”

“세상에, 북부에서 좀처럼 나오지 않으시는 분이 황궁엔 웬일로……?”

지나는 자리마다 귀족은 물론 사용인들의 시선이 자연스레 따라붙었다.

그러나 정작 그 누구도 테베트에게 직접 말을 걸 생각은 하지 못했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만이 점점 크기를 더해갈 뿐이었다.

쯧, 테베트는 거칠게 혀를 찼다. 등허리에 더덕더덕 엉겨 붙는 시선이 짜증스러워 그는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아무래도 궁 밖까지는 인적이 드문 샛길로 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날씨 하나는 좋군.’

맑은 날이었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하늘이 보이자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테베트는 황녀궁 뒤쪽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천천히 걸었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

막힘없던 그의 발걸음이 멈춘 건 한순간이었다.

작은 오솔길 사이로 웬 신발 앞코가 툭 튀어나와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베트는 미간을 구기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헉.”

그러자 풀숲 사이에 쭈그려 앉은 여자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여자는 놀란 듯 숨을 집어삼켰다.

그와 동시에 짙푸른 눈동자가 크게 일렁이고, 커다란 눈망울에서 굵은 눈물방울 하나가 뚝 떨어졌다.

“…….”

테베트는 천천히 여자를 살폈다.

눈에 익은 복장.

아직 앳되어 보이는 얼굴.

황궁의 말단 하녀인 듯했다.

“방해했다면 미안하군. 자리를 비켜 줄 테니 마저 울도록 해.”

누구에게 혼나기라도 한 모양이지.

테베트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가려던 걸음을 마저 옮겼다.

아니, 옮기려 했다.

“저.”

작게 흘러나온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이미 스쳐 지나갔으리라.

“실례인 줄 알지만, 혹시…… 손수건 있으신가요?”

“……뭐?”

“손수건이요. 못 들으셨어요?”

어이가 없어 테베트는 여자를 물끄러미 보았다.

자세히 보니 코와 눈이 몹시 빨갰다.

‘내가 누군지 모르는 건가?’

그게 아니라면, 감히 그 어느 누가 리페리우스의 주인에게 함부로 말을 걸 생각을 했겠는가?

그것도 저런 격 없는 말투로.

아무래도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말단 중의 말단인 것 같았다.

“너에게 내줄 손수건은 없다.”

테베트는 싸늘하게 말했다.

사실 손수건은 늘 지니고 다녔다. 하지만 리페리우스의 문장이 떡하니 박힌 물건을 하녀에게 넘겨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행여나 귀찮은 추문이 나기라도 하면 곤란했으므로.

“…….”

냉랭한 테베트의 말에 하녀는 입술을 작게 벌렸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표정을 확 구겼다.

……표정을 구겨?

“치사하시네요. 딱 보니 귀족가 도련님 같으신데.”

“뭐?”

“아무리 제가 말단 하녀라지만, 사람이 울고 있는데 너무 매정하신 거 아니에요?”

건방지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테베트는 실로 오랜만에, 어이없다는 기분을 느꼈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래서 그대로 내뱉었다.

하녀는 그러거나 말거나 어느새 눈물이 멎은 얼굴로 자리를 털고 일어날 뿐이었다.

‘뭐 이런 하녀가 다 있지?’

테베트는 눈앞의 여자를 비뚜름하게 바라보았다.

문득 비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분명 맑았던 것 같은데.

이상한 일이었다.

“아니 고작 손수건일 뿐인데…….”

여자는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로 투덜대고 있었다.

몸을 일으킨 여자가 갑자기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눈이 마주쳤다.

“뭘 그렇게 깐깐하게 구세요?”

순간 테베트는 여자가 생각보다 작고 가느다랗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햇빛을 받은 눈동자가 몹시 푸르고, 아주 반짝거린다고도.

정갈하게 올려 묶은 연보라색 머리카락.

몸이 가까워져 오자 확 풍기는 달큼한 냄새.

천둥처럼 내리꽂히는 그 맑은 목소리까지.

쿠르릉!

정말로 천둥이 내리쳤다. 마른하늘이었는데도.

“뭘 그렇게…….”

천둥소리 속에서 여자가 중얼거렸다.

테베트는 그 목소리를 놓치지 않기 위해 몸을 기울여야만 했다.

쏴아아-.

어디선가 빗소리가 들려왔다.

마주친 여자의 얼굴이 순간 흔들렸다.

앳된 하녀의 얼굴.

그리고 그 위에 겹쳐지는 조금 더 성숙해진 그 얼굴.

다시 앳된 하녀의 얼굴, 그리고 그 위에 겹쳐지는…….

테베트가 닿고 싶었던 바로 그…….

“뭘 그렇게 불안해하세요?”

순간 발밑이 무너지는 착각이 들었다.

“……하. 각하!”

테베트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히이잉!”

그 순간 말이 길게 울었다.

고삐를 단단히 말아 쥐자, 흔들리던 몸이 안정되었다.

“각하, 괜찮으십니까?”

테베트는 옆을 돌아보았다.

우비를 입고 장대비 속을 달리는 부하의 얼굴이 흐릿했다.

다그닥! 다그닥!

땅을 뒤흔드는 말발굽 소리가 그제야 고막을 때렸다.

“……괜찮다.”

그는 낮게 쉰 목소리로 대답했다.

며칠이나 자지 못한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러나 테베트는 이를 악물고 말에 박차를 가했다. 엄청난 속도로 달리던 말이 한 번 더 가속했다. 웅덩이에서 팍 튀어 오른 물이 발끝을 적셨다.

“곧 놈들의 서식지가 보일 겁니다. 닷새 만에 도착하다니, 밤낮없이 달린 보람이 있네요.”

“그래.”

꽈아악.

장갑을 낀 테베트의 손에 한 번 더 힘이 들어갔다.

퍼붓는 빗속에서 그의 눈동자가 핏빛으로 번들거렸다.

‘왜?’

갑자기 떠오른 과거 기억이 달갑지만은 않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건 단순히 지친 몸이 보내는 신호인 걸까, 아니면.

‘왜 이렇게 불안하지?’

어떤 일의 전조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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