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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27화 (27/147)

27화

“이봐, 아가씨.”

남자는 콧잔등에 긴 상처가 있었다.

“딱 봐도 변장하고 나온 귀족 영애 같은데. 대체 이 수도 외곽까지,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얕보는 듯한 말투였다. 그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눈앞의 여자를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훑었다.

낡은 로브 한 장 뒤집어쓴 채 이곳까지 찾아온 여자는, 딱 봐도 귀족의 눈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후줄근하게 차려입었어도, 이 뒷골목 짬밥이 몇 년인데. 척 보면 착이지.’

남자는 여유롭게 턱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시종 하나 없이 여기까지 혼자 온 영애는 또 처음이군.’

귀족 영애들이 자신을 종종 찾곤 했지만, 이렇게 맨몸으로 찾아온 간 큰 영애는 없었다.

그러나 뭐……. 솔직히 큰 호기심은 없었다.

영애들의 의뢰는 거의 다 뻔했으니까.

‘조금 수척하지만 외모가 아름다운 걸 보니, 치정 같은 것에 얽혔으려나?’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여기가 달그림자 길드가 맞나요?”

그림처럼 반듯하게 앉아 있던 여자가 물었다. 의외로 강단 있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그래. 베르타니아 제국 최대의 정보 길드지.”

남자는 자랑하듯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알고 온 거야?”

“어떻게 알고 왔는지가 중요한가요?”

여자의 입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내가 원하는 걸 그쪽이 팔고 있기에, 그걸 사러 온 것뿐인데요.”

여자의 표정은 한밤중의 호수 같았다. 고요하고 어두워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잠시 멍해 있던 남자에게서 한발 늦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하하! 묻지 말라는 거군.”

남자는 등받이에 깊게 묻었던 몸을 일으켰다.

“그래서 무슨 정보를 사고 싶은 건데?”

그는 눈앞의 여인에게 조금 흥미가 동했다.

“…….”

그러나 여자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허름한 주점처럼 꾸민 외관, 그 안의 작은 밀실.

여자의 짙푸른 눈동자가 내부를 꼼꼼히 훑고 있었다.

시선의 의미를 읽은 남자가 덧붙였다.

“보안이라면 걱정 말라고. 나도 이 밥 먹고 산 지 벌써 10년이야. 이 방에서 오가는 얘기는 절대 발설하지 않는 게 철칙이지.”

여자가 남자를 바라보았다.

꾹 다물었던 작은 입술이 그제야 열렸다.

“좋아요. 그럼 바로 이야기하죠.”

“음, 시원해서 좋군.”

“전…….”

남자가 테이블 위로 손을 깍지 껴 올렸다.

“황궁의 정보를 사고 싶어요. 특히, 2황자인 에르단 베르타니아와 관련한 정보요.”

“당신…….”

툭. 깍지 낀 손이 절로 풀어졌다.

남자는 한껏 커진 눈으로 눈앞의 여자를 응시했다.

“후우. 이거 참 또 곤란한 손님이 왔구먼.”

“어려운가요?”

미동 없이 앉아 있던 여자가 물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요즘 황궁 관련 소식은 어려워. 우리도 정보를 캐기가 힘들거든. 몇몇 소식지들이 폐간된 것만 봐도 알 거야.”

“…….”

여자의 눈동자가 어두운 빛으로 가라앉았다.

“게다가 지금은 우리 길드장께서도 안 계셔. 나 혼자 결정할 수 없다는 말이지.”

남자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사실 길드장이 있어도 요즘 시국에 2황자 소식을 캐는 건 자살 행위라고.’

그러나 그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여자의 얼굴에 드리운 그림자가 지나치게 짙었던 탓이었다.

“정 그 정보가 필요하거든, 다음에 다시 와. 뭐……. 대충 겨울바람이 불 때쯤이면 되겠네.”

남자는 되는대로 지껄였다. 에둘러 말했으나, 명백한 거절이었다.

여자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무언가를 한참 생각하는 듯 골똘한 표정이었다.

“제가 실수했네요.”

“응?”

“대가를 먼저 말씀드릴 걸 그랬어요.”

그러더니 품속에 고이 간직했던 물건을 꺼내 테이블 위에 올린다.

“……?”

남자의 눈이 물건을 살펴보듯 가늘게 좁아 들었다.

뭐야? 이 쿰쿰한 건.

그러나 곧.

“헉!”

그의 눈동자가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과연 제국 최고의 정보 길드 사람답게, 그게 뭔지 곧바로 알아본 듯했다.

“배, 백금초 찻잎이잖아.”

“맞아요.”

“하아. 이런 귀한 걸 도대체 어디서?”

포장지가 조금 구겨졌지만 알아볼 사람은 충분히 알아볼 정도였다.

남자의 콧잔등에 난 상처가 크게 씰룩였다.

이 정도 크기라면 그 가격은…….

그러나 그 가치를 채 가늠해 보기도 전, 물건은 다시 여자의 품속으로 사라졌다.

아.

남자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어렵다고 하셨으니 전 그럼 이만.”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돌아서는 등에 망설임이란 없었다.

“자, 잠깐만!”

남자가 벌떡 일어섰다.

“네.”

여자는 아주 느리게 몸을 돌렸다. 애가 타 죽을 것 같았다.

“그 의뢰, 받아들이지.”

“방금 어렵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세상에 불가능한 게 어딨어?”

그것도 일확천금 앞에서 말이야.

남자가 흐흐 웃었다.

“이 정도 대가면, 충분한가요?”

“당연히! 충분하다 못해 넘치지! 원하는 걸 말만 하라고!”

귀한 손님이 다시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자 남자는 재빨리 의자를 빼 주었다.

“그럼 한 가지만 더요.”

“그래, 뭔데?”

“황족의 궁 중에서 급하게 일손이 필요한 곳이나, 하녀를 들이려 하는 곳이 있는지 알아봐 주세요.”

하녀?

자리에 앉던 남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황궁 궁내부에 길드의 사람이 있으니 어렵진 않겠지만…….’

그는 떨떠름하게 답했다.

“궁으로 하녀를 들일 생각이야? 그건 관둬. 차라리……”

“아뇨, 하녀로 들어갈 건 저예요.”

“뭐?”

눈앞의 여자가 싱긋 웃었다. 파도를 견디는 바다 위 암석 같은 얼굴이었다.

“전 하녀거든요.”

* * *

황궁 하녀들은 언제나 세상 온갖 일에 호기심 가득한 눈을 들이밀고, 귀를 기울인다.

그들의 대화 주제는 늘 다양했다. 하찮은 가십거리부터 세상이 들썩일 만한 거대한 비밀까지.

모두 하녀들의 눈과 귀와 입을 통해 들어와 내뱉어지기도 하고, 삼켜지기도 했다.

공작저 하녀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들었어? 지난번에도 황후 폐하께서 1황자비 전하께 크게 역정을 내셨대.”

상자를 정리하던 하녀 하나가 속삭였다.

“들었지. 황궁이 한동안 그 얘기로 떠들썩했으니까.”

“도대체 왜 그러신 걸까? 1황자 전하와 결혼하신 지 얼마 안 된 며느리한테.”

“1황자 전하께서 친자식이 아니라 그 부인까지 미워하시나?”

그러자 다른 하녀가 화들짝 놀라며 몸을 낮췄다.

“쉬, 쉿! 말조심해.”

“네가 먼저 말했잖아.”

“그건 그렇지만.”

“에휴, 하여튼 그 탓에 우리 황자비궁만 찬바람 쌩쌩이잖아. 이제 막 결혼하신 분께 벌써부터 이게 무슨 고난이냐고.”

하녀는 애꿎은 상자만 툭 쳤다.

“아무래도 궁 배정을 잘못 받은 것 같아……. 이게 뭐야? 우리만 괜히 눈치 보이고, 매일 살얼음판 걷는 기분이라니까.”

“그러니까 말이야.”

“차라리 돈 많이 주는 북부 리페리우스 공작저로 갈까?”

“진심으로 하는 얘기야?”

“……아니, 당연히 농담. 아무리 그래도 북부는 아니지.”

“요즘 도는 소문엔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다던데?”

“신종 감옥이야, 뭐야?”

하녀들은 목소리를 낮춰 킬킬 웃었다. 그러면서도 로비에 쌓인 상자를 정리하는 손은 쉬지 않았다.

상자의 옆구리에는 전국에서 모인 내로라하는 유명 의복점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방금 막 도착한 것으로, 그걸 확인하고 정리하는 게 하녀들의 임무였다.

“로즈벨, 그쪽 정리 끝났어?”

“응.”

황궁의 하급 하녀, 에슬린 로즈벨 또한 그 틈에 섞여 있었다. 그녀는 마지막 상자의 로고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와, 너…… 진짜 빠르다.”

“아까 보니까 상자 겉 로고만 보고 분류하더라고. 맞지?”

“정말? 말도 안 돼! 저 많은 의복점 로고들을 다 외우고 있다고?”

하녀들이 에슬린 주변으로 모여들었다. 에슬린은 덤덤한 표정으로 상자를 장신구 더미 위에 올려 두었다.

“의복에, 장신구에, 신발에…… 종류만 해도 수십 종이라 우린 다 열어 봐야 했는데, 대체 어떻게?”

“그야…….”

에슬린은 말꼬리를 흐렸다.

황족으로 자란 그녀에겐 모르려 해도 모를 수 없는 것들이었다.

이런 걸로 시선이 집중될 줄은 몰랐기에 대충 얼버무릴 말을 찾는데, 위쪽에서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거기, 너!”

톤이 높은 목소리 하나가 허공을 갈랐다.

에슬린은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계단 위 난간에 몸을 반쯤 내민 여자가 보였다.

“네가 며칠 전에 새로 들어온 하녀던가? 로즈……벨? 맞나?”

“맞아요.”

“드레스는? 드레스는 도착했어?”

여자가 고개를 쭉 빼며 눈으로 로비를 빠르게 훑었다.

“네, 방금.”

“서둘러! 얼른 가지고 와!”

연두색 드레스를 입고, 윤기 나는 주황색 머리카락을 곱게 내린 여자.

그녀는 이 궁의 유일한 시녀인 메리사 라이트였다.

“서두르라니까!”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이어졌다. 느긋하게 상자를 정리하던 하녀들의 손놀림이 빨라졌다.

“빨리, 빨리! 얼른 드레스랑 장신구 상자를 들고 따라오렴!”

메리사가 손짓했다. 하녀들의 일사불란한 움직임에 맞춰 에슬린 또한 상자 하나를 품에 안았다.

“얼른 올라와.”

하녀들이 줄줄이 계단을 올랐다.

부드러운 융단을 깐 계단은 아무리 바쁘게 움직여도 발걸음 소리가 거의 나지 않았다.

에슬린은 이 고요한 감촉을 꽤 좋아했다.

계단을 오르는 그녀의 옆으로, 베르타니아 제국의 문장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하녀로 황궁에 돌아오게 될 줄이야.’

에슬린은 그 문장을 외면하듯 걸었다.

‘참 모를 일이지.’

속으로 웃음이 나왔다. 자조도 한탄도 아닌 순수한 의미의 웃음이었다.

황녀로 태어난 곳에 하녀로 돌아왔다.

그녀는 황녀이면서 하녀였고, 하녀이면서 황녀였다.

황녀와 하녀.

단어의 철자마저 큰 차이 없이 비슷했다.

애초에 그 둘은 별반 다르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정말 모를 일이야.’

그런 걸 깨닫게 되다니.

정말 인생이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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