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다급한 발걸음이 멈춘 건, 2층 드레스 룸 앞에서였다. 문이라도 부수고 들어갈 기세였던 시녀가 그 앞에 우뚝 멈추어 섰다.
깊게 팬 미간에서 그녀의 망설임이 드러났다.
“하아. 또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하시면 어쩌지?”
불안함이 묻어나는 혼잣말이었다.
그러나 더 지체할 수는 없었다. 시녀 메리사는 크게 심호흡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너.”
에슬린을 가리켰다.
“얼른 가지고 따라와.”
묵직한 문이 열렸다. 귀족 여인 특유의 진한 향이 훅 풍겨 왔다.
에슬린은 상자를 든 채 방 안으로 들어섰다.
‘1황자비, 레실리아 베르타니아.’
방 안, 테이블 한가운데에 화려한 치장을 한 여인이 앉아 있었다.
호화롭기 그지없는 내부였다. 온갖 사치품과 장신구들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그러고 보면 공작가는 참 검소한 편이었어.’
에슬린은 문득 생각했다.
“전하, 이번 파티 때 입으실 드레스가 막 도착했다고 합니다.”
메리사가 꽃처럼 화사한 목소리로 말했다.
휘휘 찻잔을 젓던 소리가 뚝 끊겼다. 등을 돌린 채 있던 여인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늦었구나.”
조금 탓하는 목소리였다.
에슬린은 상자를 가지고 들어가며 그녀의 얼굴을 흘끔 보았다.
1황자의 부인이자, 제국 유일의 황자비.
‘하필이면 1황자비의 궁에 들어오게 되다니.’
에슬린은 한숨을 삼키며 상자를 내려놓았다.
그랬다. 일단 황궁에 들어온 것까진 좋았다.
문제는 지금 당장 외부에서 하녀를 들일 만큼 일손이 부족한 곳이, 1황자비궁밖에 없다는 점에 있었다.
얼마 전 입궁한 황자비를 위해 새로운 사용인이 대거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에르단의 궁에 들어갈 수 있었으면 좋았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좋은 기회는 연달아 오지는 않는 법이다.
일단 황궁에 들어오는 게 더 중요했으니 에슬린은 당분간 몸을 사리기로 했다.
‘그래도 추천장 덕분에 말단 견습 하녀 신세는 면해서 다행이야.’
견습 하녀였다면 황족의 궁에 배속되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아마 궁내 관리 시설에서 허드렛일부터 시작했겠지.
정보상은 에르단의 궁으로 옮기는 방법을 알아보겠다고 했다. 그러나 에슬린은 조급하게 움직이지 말라고 전했다.
황궁에선 조급하게 구는 사람부터 꼬리를 잘리게 되는 법이니까.
그리고 일단…….
‘에르단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했으니 됐어.’
상자 뚜껑을 쥔 에슬린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아직 정확한 소식은 듣지 못했지만, 에르단이 살아 있다는 건 알았다.
지금으로선 그거면 충분했다.
“하녀 아이들이 늑장을 부리는 바람에요. 너그럽게 이해하셔요.”
메리사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에슬린은 재빨리 상자를 열고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그래, 드레스만 괜찮다면야.”
1황자비, 레실리아가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구불구불한 연갈색 머리카락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흐늘거렸다.
“전국 의복점을 모두 뒤져 특별히 주문한 드레스들이에요. 한번 골라 보시겠어요?”
“어디 보자꾸나.”
레실리아가 우아하게 몸을 일으켰다. 일곱 개가 넘는 드레스 상자를 보는 눈빛이 날카로웠다.
최근 1황자비의 가장 큰 고민거리는 바로 이 파티용 드레스였다.
“…….”
에슬린은 별생각 없이 얌전히 누워 있는 일곱 벌의 드레스를 보았다.
‘음.’
그녀는 다시 시선을 바닥으로 고정했다.
“전하, 어떠십니까?”
“……뭐, 나쁘진 않은 것 같긴 하다만.”
레실리아가 가녀린 손가락을 들어 턱을 받쳤다. 고민이 되는 눈치였다.
메리사가 빈틈을 놓치지 않고 덧붙였다.
“저는 이 가운데 드레스가 좋을 것 같아요. 이 광택 좀 보셔요. 동부 최고의 실크 장인이 짠 옷감이랍니다. 이걸로 1년에 딱 두 벌만 옷을 만든대요.”
“음. 그래?”
메리사는 가장 가운데에 놓인 분홍색 드레스를 강력히 어필하고 있었다.
확실히, 가장 화려하고 아름다운 옷이었다.
“그럼요. 게다가 이 컬러까지! 전하의 고운 피부가 더 돋보일 거예요. 리본을 장식한 핑크 다이아몬드는 또 어떻고요?”
“그래. 드레스 자체로는 완벽하구나. 하지만…….”
레실리아의 목소리가 낮게 잦아들었다.
“황후 폐하께서 어떻게 생각하실지 도통 모르겠어서.”
그녀는 황후의 반응이 몹시 걱정이 되는 눈치였다.
레실리아는 황후에게 썩 예쁨받는 며느리가 아니었다.
하녀들이 모이면 하루가 멀다 하고 그 얘길 떠들어 대니, 며칠 전 입궁한 에슬린조차 그 사실을 모를 수 없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황후 폐하께서도 다이아몬드는 즐겨 하시잖아요?”
메리사가 덧붙였다. 그 말에 레실리아의 불안했던 눈빛이 조금은 침착하게 진정했다.
“그건…… 그렇지?”
레실리아는 분홍색 드레스를 만지작거렸다. 곧 그녀의 아름다운 입가에 빙긋 미소가 떠오른다.
“예쁘긴 정말 예쁜 드레스야. 그럼, 이번 가든파티는 이 드레스를 입어 볼까?”
처음부터 그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으나, 황후의 눈치가 보여 망설인 듯했다. 시녀 메리사가 가볍게 손을 맞대며 웃었다.
“탁월한 선택이세요, 전하.”
“까다롭게 고르느라 고생이 많았겠어, 메리사.”
“다 전하를 위한 일인 걸요.”
레실리아가 상자에서 드레스를 꺼내 들었다.
분홍색 실크 드레스는 멀리서 봐도 화려했다. 늘어진 레이스 장식과 풍성하게 부풀린 소매, 몇 겹으로 겹친 스커트 자락.
무엇보다 가슴 한가운데에 있는 리본과 그 가운데에 박힌 큼직한 핑크 다이아몬드가 영롱하게 빛났다.
“어때, 너희들도 괜찮아 보이느냐?”
레실리아가 상기된 얼굴로 하녀들에게 물었다. 드레스를 몸에 가볍게 댄 채였다.
“네, 네. 아름다우십니다, 전하.”
에슬린 옆에 도열해 있던 하녀들이 잽싸게 대답했다.
“아하하. 전하, 이제 막 입궁한 하녀 애들이 뭘 알겠어요?”
메리사가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진 레실리아가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이번엔 정말 황후 폐하께 호감을 사실 수 있을 거예요.”
메리사가 드레스의 소매를 레실리아의 팔에 맞춰 보며 말했다. 레실리아는 그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글쎄…….’
에슬린은 바닥 무늬를 세며 생각했다.
‘모후께서 딱 싫어하실 것 같은데.’
그러나 뭐…….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 * *
“누가 전하의 불면증 약을 받아 와.”
그날 오후, 메리사가 하녀들에게 말했다.
응접실을 청소하던 에슬린은 들고 있던 헝겊을 내려놓았다.
“제가 다녀올게요.”
해가 서쪽 산 너머로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황궁 내 의원으로 가는 길은 익숙했다. 심지어 가장 빠른 지름길까지 손바닥 들여다보듯 훤한 것이었다.
화려한 분수대와 섬세하게 손질된 수목을 지났다. 저 앞에 미로 정원이 보이는 걸 보니 금방 도착할 터였다.
“…….”
문득 에슬린은 미로 정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커다란 아치형 문이 정원 입구에 웅장히 버티고 서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 그 앞에 다가섰다. 쭈그려 앉듯, 몸을 굽혔다.
‘아마 이쯤일 텐데.’
고풍스러운 나무로 된 입구 아래를 더듬어 보았다. 생각한 대로, 작은 낙서가 눈에 들어왔다.
〔E. & E. NNN년, N월, N일.〕
예닐곱살 되는 어린아이의 키만 한 높이였다.
에슬린은 말없이 그 음각을 손으로 덧그려 보았다. 세월에 마모되어 뭉툭해진 홈이 느껴졌다.
‘이 미로 정원은 쉬웠어! 안 그래, 에슬린?’
‘에르단, 빨리. 빨리.’
‘재촉하지 마. 손이 미끄럽단 말야. 근데 문에 낙서했단 거 들키면 혼날 텐데.’
‘그러니까 얼른 새기라니까.’
‘으음…….’
‘잘 새기고 있어?’
‘헐, 에슬린.’
‘왜 그래?’
‘나 손에 나무 가시 박혔어…….’
어렸을 땐 에르단과 함께 온 황궁을 휘젓고 돌아다녔다.
이걸 새기던 일곱 살쯤엔 숨겨진 미로 정원을 찾아내 하나하나 격파하는 재미에 푹 빠져 있었다.
모든 게 그대로였다.
변한 거라곤 에슬린 자신뿐.
기분이 이상했다. 제 흔적은 여기 이렇게 남아 있는데, 정작 진짜 자신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슬린은 몸을 일으켰다. 문기둥 양옆에 베르타니아의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그 문장을 손으로 한 번 훑은 뒤 다시 걸음을 옮기려던 때였다.
“큼, 큼.”
어디선가 낮은 헛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
커다란 나무 뒤편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보였다.
에슬린은 주변을 날카로운 눈으로 살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정보를 가져온 건가요?”
끄덕. 왜소한 남자가 고갯짓으로 대답했다.
남자는 남쪽 관리동의 하급 하인이었다.
달그림자 길드 소속으로, 에슬린이 의뢰한 정보들을 물어다 주는 역할을 했다.
“독이야.”
정보상이 대뜸 말했다. 주어는 없었으나,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에르단이 독에 당했다.
에슬린은 다리에 힘이 풀릴 뻔한 걸 겨우 버텼다. 대충 예상한 일이었음에도 확인 사살당한 기분이었다.
“누가 독살을 시도한 건지는 알아보는 중이야. 알다시피 2황자궁은 황후 폐하 명령으로 모두 닫혀서 소식을 얻기가 쉽지 않아.”
하인이 빠른 속도로 말했다. 에슬린은 제 신발을 정리하는 척하며 그 이야기를 들었다.
‘보나마나.’
1황자의 짓이다.
신발 끈을 붙든 손끝이 희게 질렸다.
‘카르단이 약속을 어겼어.’
눈에 번득이는 이채가 서렸다.
약속을 어긴 대가는 반드시 치르게 해 줄 생각이었다. 이대로 두고 보지는 않을 것이다.
에슬린은 하인에게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넸다.
* * *
봄 냄새가 절정에 이른 따뜻한 날이었다.
그러나 1황자비궁은 몹시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다들 나가! 나가라고!”
“저, 전하…….”
“나가란 말 안 들려?”
레실리아의 서슬 퍼런 분노에 하녀들이 몸을 움츠렸다. 근처에 선 시녀 메리사가 어쩔 줄 모르고 발만 동동 굴렀다.
“안 나가? 너까지 나를 무시해?”
“네, 네. 나가겠습니다.”
메리사는 다급하게 몸을 움직였다.
탁. 문을 닫고 나오자마자, 안쪽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하아…….”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메리사와 함께 방을 나선 에슬린은 다른 하녀들 틈에 섞여 잠자코 있었다.
“뭐야? 일들 안 하고! 뭐 구경났어?”
메리사가 문밖에 선 하녀들을 향해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메리사 님, 전하께서는 왜 이렇게 화가 나셨을까요?”
살살 눈치를 살피던 하녀 하나가 조심스레 물었다. 메리사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든파티에서 황후 폐하께 드레스 지적을 당하셨대.”
“아, 저런…….”
“또야. 또라고.”
메리사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었다.
“도대체 모르겠어. 황후 폐하께서는 그냥 황자비 전하의 트집을 잡으시는 것 같은데…….”
끝을 알 수 없는 미궁에 던져진 사람처럼, 메리사의 얼굴이 엉망으로 구겨졌다.
“하아…….”
에슬린은 말없이 그 옆얼굴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