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화
황자비궁의 뒤뜰, 눈에 띄지 않는 풀숲 사이에 작은 벤치가 있었다.
오후 일과를 마친 에슬린은 그 벤치에 앉아 있었다.
레실리아의 심기가 좋지 않아 오후 내내 살얼음판 같은 분위기가 이어졌다.
‘언제 오려나?’
그러거나 말거나, 에슬린은 누군가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지만.
문득 바람을 타고 진한 라일락 꽃향기가 흘러왔다.
냄새는 강력한 기억의 매개체였다. 저절로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공작은 무사할까?’
공작저를 떠나온 지 벌써 3주가 넘었다.
에슬린은 황궁에서 우연히 주워들은 테베트의 소식을 곱씹어 보았다.
‘리페리우스 공작이 큰 부상을 입었대!’
그가 섬멸하고자 했던 마물의 규모가 예상치의 세 배를 웃돌았다고 했다.
절대적인 수적 열세 속에, 공작이 처음으로 패배하는 게 아니냐는 소문까지 돌았다.
“…….”
에슬린은 가만히 한쪽 가슴을 눌렀다. 왠지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 같았다.
그때, 풀숲이 흔들렸다.
에슬린은 홱 고개를 돌렸다.
“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메리사 님?”
어지러운 풀숲을 헤치고 나타난 건 시녀 메리사였다.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난 그녀가 동그랗게 눈을 떴다.
“로즈벨……이라고 했던가? 이번에 새로 들어온 하녀지?”
“네.”
“여긴 어떻게 알았어? 내 아지트인 줄 알았는데.”
메리사가 이쪽을 향해 오며 말했다. 에슬린은 전혀 몰랐다는 표정을 가장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털썩. 그녀가 에슬린의 옆에 앉았다.
“로즈벨. 그다음엔 뭐야? 전체 이름.”
“에슬린 로즈벨이에요.”
메리사는 잠시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황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흔들렸다.
“그래……. 그래서 성으로 부르는 거였구나.”
메리사가 중얼거렸다.
“뭐, 이름을 뺏긴 느낌이겠지만 너무 신경 쓰진 마. 이 황궁에선 차라리 그게 나을 수도 있으니까.”
황궁에서 ‘에슬린’을 가리키는 사람은 명확했다.
죽은 황녀.
때문에 황자비궁의 하녀장은 첫날부터 에슬린에게 ‘로즈벨’이라고 칭하도록 명했다.
“전 상관없어요.”
“근데 이런 데서 뭐 하는 거야?”
“아, 우연히 발견했는데…… 혼자 쉬기 좋은 곳인 것 같아서요. 제가 방해했다면 죄송해요.”
“아냐. 이 궁이 내 것도 아닌데 뭐.”
메리사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얼굴에 수심이 깊어 보였다.
그런 그녀를 보며 에슬린이 물었다.
“무슨 고민 있으세요?”
차분하고도 조심스러운 말투였다.
메리사는 물끄러미 하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막 레실리아를 따라 입궁한 그녀는 황궁 안에 속을 터놓고 얘기할 사람이 없었다.
물론 황궁에선 함부로 자기 얘기를 늘어놓으면 안 된다고들 하지만…….
하녀라면 괜찮지 않을까?
메리사가 입술을 쭈욱 내밀었다.
“방금 전에 못 봤니? 황자비 전하께서 내게 화를 내신 것 말이야.”
“아. 그 일 때문이시군요.”
“그래. 내가 고른 드레스 때문에 화가 나셨잖아. 다음 티파티가 곧 돌아오는데……. 난 아직도 그때 입으실 드레스에 대해 감도 못 잡았고.”
한번 말하자 봇물 터지듯 서러움이 몰려들었다.
“황궁 시녀로 지내는 게 이렇게 어려운 줄 몰랐어. 마냥 재미있을 줄만 알았는데.”
목소리가 낮게 잦아들었다. 그녀의 양어깨가 기운을 잃고 축 떨어졌다.
“고민이 크시겠어요.”
“매일 머리가 쭉쭉 빠지는 느낌이야.”
“주변에서 도움을 주는 사람은 없으신가요?”
“그렇지 뭐. 매일 가문에 편지를 쓸 수도 없고…….”
“그렇군요.”
에슬린은 위로하듯 덧붙였다.
“너무 힘드시면 가문으로 돌아가셔도 되지 않을까요?”
“응? 싫은데?”
메리사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대답했다. 뭔 그딴 소릴 다 하냐는 듯한 표정이었다.
“돌아가긴 무슨. 절대 안 가!”
에슬린은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방금까지 다 죽어 가던 메리사의 눈동자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끝까지 해 볼 거야. 도망가는 건 싫어. 꼴사납잖아.”
아무래도 그녀는 하녀들 앞에서 혼이 나는 것보다, 중간에 포기하는 걸 더 부끄러워하는 부류인 것 같았다.
“그러시군요.”
“그래. 일단 버틸 거야. 뭐가 됐든 엉덩이 딱 붙이고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우리 엄마가 말했거든. 내가 그 말 한번 믿어 보려고.”
“아하.”
“그러니까 너도 뭐, 힘든 일 있거든 쉽게 포기하지 마! 알겠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다짐 같은 말 이었다.
“네, 알겠어요.”
에슬린은 웃으며 대답했다.
메리사는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자신이 얼마나 시녀 일을 잘 해내고 싶은지에 대해 연설했다. 그러다 다시 모든 자신감을 잃고 쪼그라들었다.
에슬린은 가만히 그 모든 시녀 일의 기쁨과 슬픔에 대해 들어 주었다.
“……이상하네. 너한텐 왜 자꾸 이것저것 말하게 되지?”
문득 메리사가 의아해했다.
“그런가요?”
“응. 네가 이것저것 캐묻지 않으니까 그런가?”
“캐물을 게 뭐 있나요.”
에슬린은 가볍게 대꾸했다.
“왠지 기분이 홀가분해졌어.”
“다행이네요.”
메리사가 크게 기지개를 켰다. 홀가분해졌다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는지, 정말 개운해진 표정이었다.
이쯤이려나?
에슬린은 그런 메리사의 옆얼굴을 잠시 응시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메리사 님.”
“응?”
“제가 어디서 들은 게 있는데요.”
“뭘?”
“물론 확실한 건 아니지만…….”
“대체 뭔데? 뜸 들이지 말고 얘기해 봐. 지금까지 나만 너무 떠들었잖아.”
주황빛 머리카락이 성마르게 재촉했다. 사실 에슬린의 본론은 지금부터였다.
“다음 티파티의 드레스 말이에요.”
* * *
황자비가 티파티에서 돌아왔다.
긴 레이스 장갑을 내려놓자마자, 그녀는 다급하게 시녀를 찾았다.
“메리사! 메리사를 데려와!”
메리사는 긴장한 표정으로 나타났다.
“네, 전하. 부르셨어요?”
“네 말이 맞았어! 네가 골라 준 드레스를 황후 폐하께서 좋아하셨다고!”
“……네?”
그녀의 입술이 자그마하게 벌어졌다. 저절로 눈동자가 옆으로 굴러갔다.
쪼르르.
에슬린 로즈벨이 고요한 얼굴로 황자비의 찻잔에 찻물을 붓고 있었다.
레실리아가 잔뜩 상기한 표정으로 말했다.
“처음 내 드레스를 보시고도 별말씀 없으셔서 안심했는데, 마지막엔 오늘 아름답다고 칭찬까지 해 주셨다니까!”
“…….”
“솔직히 네가 가져온 드레스가 너무 평범하고 우중충해서 싫었는데, 이제 보니 꽤 괜찮은 선택이었나 봐.”
잔뜩 신이 난 레실리아는 격식 차리던 말투조차 벗어던진 채였다. 장밋빛 뺨이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네 덕분이야, 메리사.”
“아니에요, 전하. 다 전하께서 뛰어나셔서 그렇죠.”
메리사는 레실리아를 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자꾸 에슬린 쪽으로 시선이 가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레실리아가 모락모락 김이 나는 찻잔을 입술로 가져갔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네?”
“황후 폐하께서 진녹색 실크를 좋아하신다는 거 말이야.”
“아, 그건…….”
순간 메리사가 대답을 망설였다.
잠시 고민의 빛이 스쳤다. 그러나 그 시간은 길지 않았다.
“응? 누가 조언이라도 해 준 거야? 이야기해 봐. 함께 상을 내릴 테니까.”
레실리아가 재촉하듯 덧붙였다. 메리사는 그저 웃었다. 환하게.
“조언이라뇨, 전하.”
“어머. 그럼 너 혼자 준비한 거라는 거야?”
“네. 미리 이것저것 공부 좀 했거든요.”
메리사는 심장이 따끔거리는 걸 느꼈다.
“그랬구나. 그전에는 그럼……”
“아직 미숙했던 거라고 조금만 이해해 주셔요.”
애교 있게 덧붙이자, 레실리아는 청명하게 웃은 뒤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래, 좋아. 다들 시행착오는 하니까.”
레실리아가 메리사의 손을 살짝 잡았다.
“앞으로도 잘 부탁할게.”
“네, 전하.”
둘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그 후로 짧은 담소가 이어졌다. 대부분 티파티에서 있었던 일들이 주된 대화 소재였다.
“그럼 이제 좀 쉬어야겠어.”
“네, 목욕물을 준비하라고 할게요.”
“그러렴.”
달칵.
레실리아의 응접실 문이 닫혔다.
메리사는 홱 뒤를 돌았다. 빈 찻주전자를 든 에슬린이 보였다.
“로즈벨, 나 좀 봐.”
성큼성큼 발을 옮겨 에슬린을 만났던 뒤뜰로 향했다.
“……날 원망해?”
다짜고짜 메리사가 물었다. 에슬린은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가요?”
“내가 황자비 전하께 네 공이라고 말씀드리지 않아서.”
에슬린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아뇨, 상관없어요. 게다가 말씀드렸잖아요. 저에게 들으신 건 비밀로 해 달라고요.”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메리사는 안절부절못하며 제 입술을 씹고 있었다.
그 속내를 짐작한 에슬린이 살풋 웃었다.
“전 진짜 상관없다니까요.”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야. 내 마음은 편하지만…….”
“정말이에요.”
에슬린은 일부러 힘주어 말했다.
진심이었다.
그녀는 메리사가 황자비의 신임을 얻길 바랐을 뿐이었다.
“……왠지 시험 커닝한 애가 된 것 같은 기분이야.”
메리사는 긴장이 풀린 건지, 안심이 된 건지 힘없이 벤치에 주저앉았다. 반만 묶어 올린 주황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렸다.
그녀는 여전히 조금 뚱한 얼굴로 에슬린을 올려다보았다.
“좋아, 이왕 커닝하는 김에 제대로 해 보자.”
에슬린은 눈썹을 들어 올렸다.
“말해 줘. 대체 비결이 뭐였어?”
“비결이요?”
“어떻게 황후 폐하의 취향을 알았냐는 말이야. 나도 폐하의 취향은 열심히 조사했다고. 하지만 진녹색 실크를 좋아하신다는 건 금시초문이었어.”
바로 대답하는 대신 에슬린은 메리사의 옆에 앉았다. 뚫을 듯한 시선이 옆얼굴에 와 닿았다.
에슬린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폐하께선 진녹색 실크를 딱히 좋아하시는 게 아니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