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뭐? 진녹색 실크를 좋아하시는 게 아니라고?”
메리사가 외쳤다. 전혀 예상치 못한 답을 들은 표정이었다.
“네. 바로 수급 가능한 드레스 중 가장 장식이 적은 드레스를 골랐을 뿐이에요.”
에슬린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그게 무슨 뜻이야?”
“2황자님께서 병환으로 누워 계시잖아요. 게다가 리페리우스 공작 각하의 전황이 순조롭지 않기도 하고요.”
‘리페리우스’를 발음하는 입 안이 모래를 굴리듯 까끌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상황에 맞게 검소한 차림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
“거기다 이번 티파티는 동부 냉해 피해로 인한 자선기금을 모으기 위한 파티였죠. 지나치게 화려한 드레스로 위엄을 드러낼 자리가 아니었다는 말이에요. 소식지 기자들도 제법 올 예정이었는데, 보석이 주렁주렁 달린 드레스를 입고 갔다면…… 황궁 밖에 뭐라고 소문이 났겠어요?”
메리사는 잠시 말을 잃은 채 에슬린을 보았다. 투명한 눈동자가 눈꺼풀 아래 몇 번 숨어들었다 나타났다.
“……그러네. 나도 생각한다고는 했는데, 사실 화려하게 돋보이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어. 이제 막 결혼하신 분이니까 사교계 입지를 다지는 게 더 중요할 거라고 여겼지.”
메리사가 중얼거렸다. 에슬린의 말을 곱씹듯, 한참을 침묵하던 그녀가 팔짱을 끼고 다시 입을 열었다.
“로즈벨, 네가 왜 고작 하급 하녀야?”
“운 좋게 추측이 맞았을 뿐이에요. 제 말을 들어 주신 메리사 님의 판단력이 더 좋았던 거죠.”
“그래도…….”
메리사는 말끝을 흐리며 에슬린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차분하고 말간 얼굴이 알 수 없는 분위기를 풍기는 듯했다. 아무래도 범상치 않은 인물인 것 같은데.
설마 이건…… 하늘이 준 기회일까? 버티는 자에게 드디어 복이 오는, 뭐 그런?
메리사의 눈이 반짝 빛났다.
“저기 말이야.”
메리사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앞으로 종종 조언해 줄래? 응? 절대 귀찮게는 하지 않을게. 당연히 나도 스스로 공부할 거고.”
그 말에 에슬린의 얼굴에 곤란함이 떠올랐다. 메리사가 기민하게 그 기색을 알아채곤 덧붙였다.
“대신 네 부탁은 뭐든 들어줄게!”
에슬린은 고민에 빠진 듯 잠시 침묵했다.
“원하는 게 뭐야? 보석? 드레스?”
“그런 걸 하녀가 가져서 뭐 해요?”
“그럼?”
“아직은 없어요.”
“아직은?”
“네. 나중에 생기면 말씀드릴게요.”
메리사는 김이 빠졌다는 듯 몸을 늘어뜨렸다. 에슬린은 짧게 웃었다.
“참 나. 너 시간 지나면 내가 까먹을지도 모른다?”
메리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그러나 곧 표정을 바꾸곤 밝게 덧붙였다.
“알겠어. 언제든 말만 해. 네 부탁은 반드시 들어줄 테니까.”
* * *
‘이제 레실리아를 움직여 볼까?’
에슬린은 연무장 근처를 걸으며 생각했다. 한 손엔 레실리아의 불면증 약을 들고 있었다.
‘첫 발판은 깔았어.’
아직 큰일을 도모하기엔 불안정한 발판이지만, 충분히 단단하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레실리아 곁에 입김 센 시녀들이 많지 않아 다행이었다. 게다가 메리사는 움직이기 쉬운 타입이었다.
‘일단 레실리아와 카르단의 사이부터 건드려야겠어.’
레실리아의 친정인 모리어스 후작가는 귀족계에서 큰 세력으로 통했다. 그러니 둘 사이가 갈라지면 1황자의 입지는 크게 타격을 입을 것이다.
‘그나저나 모리어스 후작이 다음으로 선택한 게 카르단이라니.’
웃음이 흘렀다.
3황녀였던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겠다고 선언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뭐, 다음 권력을 찾아간 것뿐이겠지.’
배신감이 일었지만,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다.
이긴 자가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이기는 게 베르타니아 황궁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레실리아가 무슨 잘못이 있겠냐마는.
‘카르단이 에르단만 건드리지 않았다면 나도 이러진 않았을……’
“피하십시오!”
푹!
“헉.”
생각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얼굴 바로 앞으로 쏜살같은 바람이 슉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에슬린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쏜살 ‘같은’ 게 아니었다. 진짜 쏜 살이 나무에 콱 박혀 있었다.
목뒤로 소름이 올라왔다. 화살 끝이 부르르 진동하는 게 눈에 보였다.
“세상에, 세상에! 죄송합니다!”
저 멀리서 남자 하나가 달려왔다.
“…….”
에슬린은 잠시 할 말을 잃고 나무에 박힌 화살과 남자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남자는 기사단원의 복장을 하고 있었다.
타오를 듯한 짧은 붉은 머리. 조금 어려 보이는 외모.
그가 뒤통수를 긁으며 에슬린에게 허리를 굽실거렸다.
“괜찮, 괜찮으십니까?”
헉헉. 남자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허둥지둥했다.
에슬린은 넋이 빠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괜찮은 것 같아요. 관자놀이를 꿰뚫릴 뻔한 것치곤.”
또 죽을 뻔했네.
제일 먼저 든 감상이었다.
“으아아아. 죄송합니다, 진짜 죄송해요. 제 손이 문젭니다. 갑자기 손이 미끄러져서. 어디 좀 보여 주십시오. 진짜 괜찮으신……”
그가 허리를 치켜들자 눈이 마주쳤다.
“……지.”
남자가 이상하게 말을 끝맺었다.
청록색 눈동자가 에슬린의 얼굴을 보고 크게 흔들렸다. 몸은 딱딱하게 굳은 채였다.
마치 별안간 화살이라도 맞은 사람 같았다. 정작 맞을 뻔한 건 에슬린인데도.
“괜찮아요, 기사님.”
에슬린은 짧게 숨을 내쉬며 말했다. 꽂힌 화살을 뽑아 주려 했으나, 얼마나 세게 박혔는지 잘되지 않았다.
등 뒤에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아, 제, 제가 뽑겠습니다.”
남자가 어색한 몸짓으로 화살대에 손을 뻗었다. 그 바람에 에슬린은 졸지에 나무와 남자 사이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당황하여 고개를 살짝 돌리니, 남자와 가까운 곳에서 한 번 더 눈이 마주쳤다.
“…….”
기사의 얼굴이 홍당무처럼 달아오른 건 순식간이었다.
“저.”
“네, 네?”
“화살촉 잡고 계시는데요.”
“……네?”
“손에서 피가 나요.”
기사는 깜짝 놀라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화살촉 윗부분을 꽉 잡고 있었다. 뒤늦게 따끔거림이 올라왔다.
“으악.”
“이거라도 바르세요.”
에슬린이 품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작은 통에 든 연고였다. 때마침 그녀는 의원에 다녀오는 길이었다.
“이, 이걸 저에게 왜……?”
“다치셨잖아요.”
동그란 눈에 짙푸른 눈동자가 보석처럼 맑았다. 기사는 간신히 연고를 받아 들었다. 손끝이 덜덜 떨렸다.
“잘 치료하셔야겠어요. 그럼, 전 이만.”
“저, 저기!”
“네?”
“이, 이름을. 아니, 아니지. 성함을…….”
“…….”
“……존함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고장 난 사람 같았다. 그 모습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에슬린은 짧게 대꾸했다.
“전 하녀예요, 기사님. 말씀을 낮추세요.”
“아…….”
남자는 그제야 에슬린의 복장을 보았다. 그러나 그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고 반듯하게 섰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었다.
“저는! 아서스 녹턴이라고 합니다. 황궁 기사를 하고 있습니다.”
갑자기 웬 자기소개?
에슬린의 머릿속에 의문이 솟았으나 상대가 먼저 이름을 밝힌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저는 황자비궁의 하녀인 로즈벨이라고 합니다.”
“……로즈벨 하녀님.”
아서스가 성스러운 것을 발음하듯 이름을 입 안에서 굴렸다.
“따로 시키실 게 없으시면 전 이만 물러가 볼게요, 기사님.”
에슬린은 짧게 목례하고 다시 등을 돌렸다. 아서스가 더 말을 붙여 보고자 입을 벌렸으나 에슬린이 더 빨랐다.
그 하늘거리는 뒷모습을 기사는 멍하게 바라보았다.
“야! 아서스! 화살 만들러 갔냐? 며칠 쉬더니 빠져 가지고!”
“…….”
저 멀리서 거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서스의 동료였다. 그는 넋이 나간 아서스의 어깨를 툭 쳤다.
“뭐야? 왜 이렇게 얼이 빠졌어? 아직 열이 덜 내렸냐?”
그는 왼쪽 심장에 손을 얹고 있었다.
쿵. 쿵. 뭐지, 이 기분?
정말 아직 열병이 덜 나은 건가?
“야…….”
“어, 왜?”
“나 그거 같아.”
“뭐?”
홱. 갑자기 몸을 돌린 아서스가 친구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눈이 지나치게 반짝거렸다.
뭐야, 이놈 또 왜 이래? 남자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화살에 꿰뚫린 건 저 나무인데, 왜 내 심장이 이렇게 저릿한 거지?
아서스는 가슴을 부여잡으며 생각했다.
* * *
수없이 널려 있는 마물 사체. 그 아래를 끊임없이 흐르는 새빨간 피와 살점. 검은 연기. 부서진 대지와 메마른 수목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
그곳은 지옥이었다.
파사삭!
긴 검이 꽂혀 들었다. 검은 기운을 뿜어내던 핵이 뚝 쪼개졌다.
사위가 온통 고요했다.
살아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
오직 그만을 제외하고 말이다.
남자는 무감한 눈으로 검은 핵을 바라보았다. 그건 마물을 끊임없이 뿜어내는 통로였다.
그 핵이 부서졌다는 건.
전쟁이 끝났다는 말이다.
‘드디어…….’
돌아갈 수 있다.
테베트는 어금니를 으득 물었다. 흐려지려던 정신을 억지로 다잡았다.
그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걷는 자리마다 잔혹하게 죽은 마물의 시체가 있었다. 피에 젖은 망토가 천근만근으로 무거웠다.
“각하!”
멀리서 부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간부터 테베트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더니, 이제서야 도착한 모양이었다.
“이, 이게 무슨…….”
참혹한 광경에 부하 중 일부는 말을 잃었다.
“각하, 좀 쉬십시오. 이러다 정말 쓰러지십니다.”
테베트의 측근 기사 중 한 명인 제롬이 말했다. 그는 형형한 기운을 내뿜는 테베트의 눈을 보며 숨을 삼켰다.
“아직 부상도 다 낫지 않으셨는데…….”
그가 흘끗, 테베트의 상체를 훑었다.
단단하게 벌어진 흉곽은 얼핏 멀쩡해 보였다. 그러나 제롬은 알고 있었다. 저 갑옷 아래에서 짓이겨져 있는 상처를.
마물의 규모가 예상치의 세 배 이상이었다. 심지어 테베트가 서두르는 탓에 데려온 기사들이 다 도착하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테베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엄청난 기세로 마물들을 벨 뿐.
심지어 자신이 부상을 입는다 할지라도 말이다.
‘이상하리만치 빨리 끝내고 싶어 하셨어.’
제롬은 폐허가 된 주변을 돌아보았다.
‘뭐, 덕분에 두 달이 넘게 걸릴 전쟁을 한 달 만에 끝냈지만…….’
사실 마물이 된 건 공작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대체 잠도 안 주무시고 며칠째 이게 뭡니까? 마물만 베시고…….”
“소식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렸다. 지나치게 서늘한 분위기에 제롬이 꿀꺽 침을 삼켰다.
붉은 눈동자가 제롬을 향해 슥 굴렀다.
“공작령에서 소식은 아직인가?”
“아, 소식은……”
“각하, 각하!”
제롬은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부하 한 명이 다급하게 뛰어왔기 때문이었다.
테베트가 홱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롬이 먼저 달려가 부하가 가져온 것을 건네받았다.
“각하, 공작령에 보낸 급사가 편지를 먼저 보내왔나 봅니다.”
“당장 가져와.”
테베트가 다급하게 손을 뻗었다. 편지가 금세 피로 물들었다. 그러나 상관하지 않았다.
내용은 아주 짧았다.
《동쪽 샛문 열린 흔적 있음》
급하게 휘갈겨 쓴 글씨였다.
테베트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피 맛이 났다.
《조사 중인 인물의 행방》
제발, 제발.
그러나 바람은 무색한 것이었다.
《불명》
단어가 화살이 될 수도 있다는 걸, 테베트는 그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