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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31화 (31/147)

31화 [S공금]

“헉. 로즈벨 하녀님이다.”

아서스 녹턴은 입을 틀어막았다. 저 멀리, 색소 옅은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지나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녀님은 자세도 참 우아하시지. 그는 멍하게 생각했다.

“아얏.”

별안간 손끝에서 따끔함이 느껴졌다. 손질하고 있던 검날에 베여 피가 맺힌 손가락이 눈에 들어왔다.

퍼억! 그때 엄청난 힘이 아서스의 뒤통수를 강타했다.

“작작 좀 해라.”

“이 미친놈이! 왜 때려!”

“네 뒤통수가 딱 때리고 싶게 생겼잖냐. 덜 떨어져 보이는 게.”

그는 쯧쯧, 혀를 차며 아서스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뒤통수를 문지르던 아서스는 제 동기를 원망스럽게 흘겨보았다.

“도대체 요새 왜 이렇게 멍을 때리냐? 손가락은 골고루 잘라 먹으면서.”

“신경 꺼. 내가 살아 있는 이유를 느끼는 중이니까. ……아! 맞다!”

아서스는 재빨리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방금까지 보이던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보이지 않았다.

로즈벨 하녀님이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가 버린 것이다!

그는 망연히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놈.”

“내가 뭘 했다고?”

“됐어! 꺼져.”

까치발을 들고 아무리 살펴도 사라진 하녀님은 다시 볼 수 없었다.

‘오늘은 다시 안 지나가시려나?’

아서스의 얼굴에 아쉬운 감정이 뚝뚝 흘러내렸다. 동기가 옆에서 쯧쯧, 혀를 찼다.

안다. 한심해 보이는 거. 문제는 저도 제가 왜 이렇게 한심하게 구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건 사고였다. 아서스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이렇게 홀딱 반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긴……. 사고라는 게 뭐 어디 예고하고 찾아오는 것이던가?

‘내일은 꼭 말 걸어야지.’

아서스는 생각했다.

그런 그의 팔꿈치를 동기가 툭툭 건드렸다.

“야. 다 됐고, 이따 저녁에 술이나 마시자. 너 쉬었다 돌아온 기념으로. 도대체가 왜 요새 나랑 안 놀아 주냐?”

“꺼져. 나 저녁에 바쁘니까.”

아서스는 단박에 거절했다. 동기의 얼굴이 썩어들어 갔다.

복수다, 이 새끼야. 감히 나의 유일한 행복을 방해하다니. 아서스는 오래도록 연무장 밖을 바라보았다.

한편 에슬린은 바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한 손에 불면증 약을 쥔 채였다.

‘카르단을 보려면 서둘러야 해.’

1황자가 황자비궁에 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방문 소식에 조금 놀랐으나, 생각해 보면 반가운 일이었다.

자신이 죽은 지금, 1황자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확인할 기회였으니까.

“제가 차를 준비할게요.”

재빨리 황자비궁에 도착한 에슬린은 약을 다른 하녀에게 건네고, 다기를 준비했다.

카르단이 도착한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부인, 잘 지내셨소?”

“예, 전하. 덕분에요.”

레실리아가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야외 정원에 차려진 티 테이블이었다. 1황자는 다리를 바꿔 꼬며 찻잔을 휘휘 저었다.

‘카르단 베르타니아.’

그는 변함없었다.

카르단의 머리카락은 진한 남색이었는데, 황제의 애첩이자 그의 친모인 보르하 부인을 닮은 것이었다.

“요즘 모후와 잘 지낸다고 하니 마음이 놓이더군.”

“네, 점점 더 나아질 거예요. 요전에도 폐하께서 부르시어 즐겁게 담소를 나누었답니다.”

“그래, 그래. 잘하고 있소.”

평범하기 그지없는 대화가 이어졌다.

잠시 차를 마시던 카르단이 문득 쭉 찢어진 눈을 들었다. 심드렁한 표정이 주변을 크게 한 번 훑었다.

“하녀들이 늘었군.”

에슬린은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저 눈은 언제나 자신 앞에서 당황으로 물들거나, 억울해하거나, 비열하게 번득이거나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 평범하고 잔잔한 낯이라니.

왠지 온몸에 가시라도 돋은 기분이었다.

“손이 부족해서요. 곧 시녀들도 입궁할 거예요.”

“그렇군.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하시오.”

“네, 감사해요.”

레실리아가 웃으며 눈짓하자, 곧 다과가 든 트롤리가 도착했다. 하녀들이 높다랗게 쌓인 케이크며 쿠키 같은 것들을 접시에 옮겨 담았다.

“아, 곧 귀환 연회가 있을 예정이니 미리 준비하는 게 좋겠어.”

쿠키를 보며 입맛을 다시던 카르단이 말했다. 레실리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귀환 연회라니요?”

“리페리우스 공작이 개선을 한다고 하더군.”

툭.

쿠키를 옮겨 담던 에슬린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로즈벨.”

함께 쿠키를 담던 하녀 하나가 타박하듯 속삭였다. 에슬린은 재빨리 떨어진 쿠키를 정리했다.

“어머. 어려운 상황에서도 유례없는 대승이라더니. 연회가 열리는군요. 언제죠?”

“뭐, 공작이 도착할 때쯤이겠지. 이미 귀환 중이라고 하니 1, 2주 후면 수도에 닿겠지.”

에슬린은 멍하게 카르단의 말에 집중했다.

“그 공작이 연회에 순순히 참석한다고 한 게 이상하지만.”

카르단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황제 폐하께서 명령하시는데 어떻게 거절하겠어요?”

“아니, 공작은…….”

그러나 그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물끄러미 레실리아를 보던 카르단이 피식 짧은 웃음을 흘렸다.

“됐소. 부인에게 할 이야긴 아니지.”

“리페리우스 공작께서 왜요?”

“됐다니까. 어차피 말해도 부인께선 이해하지 못할 거요.”

그 순간 봄꽃처럼 하늘거리던 레실리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

“쿠키나 빨리 내와라.”

카르단이 명령했다.

툭, 툭. 누군가 에슬린을 팔꿈치로 쳤다. 카르단의 접시를 들고 있던 건 에슬린이었다.

그녀는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겨, 쿠키 접시를 그의 앞에 놓았다.

카르단은 당연히 하녀 따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는 테이블 위에 놓인 꽃병을 보고 있었다.

“꽃 색 하고는.”

그가 말했다. 표정을 가다듬은 레실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라일락이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내가 아주 싫어하는 꽃이야. 저 보라색만 보면 치가 떨리거든.”

몹시도 질색하는 말투였다. 레실리아는 살짝 시선을 보냈고, 하녀 하나가 재빨리 꽃병을 치웠다.

에슬린은 말없이 뒤로 물러섰다. 카르단은 곧 꽃에 흥미를 잃고 다과에 집중했다.

‘예민하게 굴기는.’

꽃 하나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웃긴 일이었다.

전생에서는 저 입에 들어가는 음식에 독을 타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이렇게 카르단의 다과 시중이나 들게 될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뭐, 독을 타는 것만이 복수는 아니지.’

그렇지만 아랫배가 뒤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 *

카르단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상인들이 들이닥쳤다. 메리사가 다음 파티를 위해 수도의 의복점 상인들을 모두 불러 모은 탓이었다.

“……!”

수많은 마차 틈에서 익숙한 얼굴 하나를 발견했다.

콧잔등에 긴 상처가 있는 남자.

그는 마부처럼 꾸민 모습이었다.

“크흠!”

의미심장한 시선 교환이 이루어졌다.

에슬린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황자비궁의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터벅, 터벅. 곧 뒤를 따르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네요.”

적당한 곳에서 멈춘 에슬린이 빙글 돌았다.

“그러네. 잘 지내고 있나 봐?”

코를 한 번 씰룩거린 정보상이 가볍게 대꾸했다.

“새로운 정보인가요?”

“그래.”

남자는 바로 본론을 꺼냈다. 부하를 시키지 않고 그가 직접 온 게 조금 의아했으나, 에슬린은 부러 묻진 않았다.

“2황자께서 아주 빠르게 건강을 회복하고 계신다고 하더군.”

에슬린의 입술이 조그맣게 벌어졌다.

“그게 정말인가요?”

“그래.”

후우. 저절로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막힌 숨이 트인 것처럼 폐가 부풀어 올랐다.

‘다행이야…….’

에슬린은 깊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럼 2황자궁은 언제쯤 열린다던가요?”

“글쎄. 하지만 아마 곧이지 않을까 싶어.”

정보상이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독을 중화하는 데 애를 먹긴 했는데, 다 중화하고 나니 회복이 빠르시다더라고.”

“그렇군요.”

“여전히 2황자궁의 하녀가 되고 싶은가?”

“…….”

그 질문엔 쉽게 대답할 수 없었다.

2황자궁의 하녀가 되는 게 에슬린의 본래 목표였다. 그땐 에르단의 상태를 확인할 수 없어서 그랬지만, 이젠 에르단이 무사하다는 걸 알았다.

그렇다면 앞으로 남은 건 카르단에게 할 복수뿐.

‘황자비궁에 남는 게 더 나을 수도 있어.’

에슬린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그때 갑자기 정보상이 손짓했다.

“잠깐 이리 가까이 와 봐.”

에슬린은 그에게 다가가 살짝 몸을 숙였다. 인적이 드문 곳이었음에도 그는 불안한 듯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조심스럽게 무언가를 건넸다.

작게 접은 종잇조각이었다.

“그때 보낸 쪽지에 대한 답이야.”

에슬린이 살짝 눈을 키우자, 정보상은 불만스럽게 툴툴거렸다.

“아무리 백금초가 대가였다지만 이런 위험한 일은 좀 그만 시키지?”

“네, 그 대가로는 이게 마지막이에요.”

쪽지를 받으며 에슬린이 대답했다.

일전에 하인을 통해 의뢰했던 것이었다. 이렇게 빠르게 원하는 정보를 손에 넣게 될 줄은 몰랐다.

‘카르단의 정부 목록.’

그의 지저분한 사생활은 에슬린이 벼르고 있던 것 중 하나였다. 물론 그걸 터뜨리기 전에 죽어 버려 써먹을 기회가 없었지만.

‘결혼까지 해 놓고 계속해서 떡밥을 뿌려 대니 안 주울 수가 없잖아.’

에슬린은 냉소적으로 생각했다. 결혼 전 버릇을 아직 다 못 버린 건지, 그는 결혼 후에도 여전했다. 이 쪽지가 그 증거였다.

그 안엔 상대의 이름과 신분, 대략적인 일자, 장소들이 적혀 있었다. 에슬린은 쪽지의 내용을 읽고 그 정보를 빠르게 외웠다.

“허…….”

마지막엔 쪽지를 우물우물 씹어 없애는 그녀를 보며, 정보상이 허탈한 소리를 냈다.

“별…… 하녀를 다 보겠네.”

그가 진심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슬린은 이 쪽지의 정보를 언제, 어떻게 폭로해야 할지 고민했다.

“저에게 주실 정보는 이것뿐인가요?”

“아니, 아니야. 하나 더 있어.”

더?

에슬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정보상은 한 번 더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범인을 알아냈어. 2황자를 독살하려 한.”

“…….”

아, 그 얘길 하려나 보구나.

그러나 어차피 대충 예상하고 있던 바였다. 1황자 카르단의 이름이 나오겠지.

그렇다면 그에 동조한 귀족들이 있을 터다. 그들을 조사해 하나하나……

“스스로 독을 먹은 거라더군.”

에슬린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늘 총명하게 빛나던 눈동자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정보상은 어색하게 뒷덜미를 긁으며 덧붙였다.

“자살하려 하신 거라고. 2황자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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