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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32화 (32/147)

32화

에슬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정보상은 그런 그녀의 눈치를 살피다 사라졌다.

그 후 대체 무슨 정신으로 황자비궁에 돌아와 시간을 보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틀이 흘러 있었다.

“2황자궁이 드디어 열린대.”

문득 들린 하녀들의 속삭임에 에슬린은 테이블을 닦던 손을 멈추었다. 그제야 부유하던 제정신이 돌아왔다.

“그게 사실이야?”

“응. 활짝 열리다 못해 2황자궁의 티 파티 초대장까지 돌고 있다던데?”

에슬린은 양손을 세게 말아 쥐었다.

이를 계기로 잠잠했던 황궁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병석에서 일어난 2황자가 자신의 무사함을 알리기 위해 티 파티를 열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에르단을 만나야 해.’

에슬린은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메리사 님 못 봤어?”

“아까 서재에 계시던데.”

아침부터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메리사를 찾아 온 궁을 헤맸다.

메리사는 서재에서 독서를 하는 중이었다. 그곳에 쳐들어간 에슬린은 다짜고짜 말했다.

“절 수행 하녀로 데려가 주실 수 있나요, 메리사 님?”

“갑자기 무슨 말이야?”

책에서 시선을 뗀 메리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일 2황자궁에 가시잖아요.”

“응. 티 파티가 있거든.”

에슬린은 그녀를 향해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수행 하녀를 아직 고르지 않으셨다면 제가 따라가면 안 될까요?”

“뭐, 어려울 건 없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에슬린 때문에 메리사는 조금 놀란 듯 보였다.

그러나 잠시 고민하던 메리사는 선선히 대답했다. 어울리지 않게 조급한 모습이 의아했지만 어려운 부탁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알겠어.”

에슬린이 그제야 안도한 듯 미소 지었다.

“감사해요, 메리사 님.”

“뭘. 이따 심심하면 내가 고른 귀환 연회 드레스나 좀 봐 주든가.”

“네, 그럴게요.”

에슬린은 그녀에게 간식을 가져다주겠다며 방을 나섰다.

‘에르단…….’

트레이를 쥔 에슬린의 손이 희게 질렸다. 정보상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빙글빙글 맴돌았다.

‘자살하려 하신 거라고. 2황자께서.’

카르단이 아니었다.

에르단이었다.

그가 스스로 제 목숨을 끊으려 한 것이다.

도대체 왜?

문득 벽에 걸린 거울이 눈에 들어왔다.

이젠 익숙해져 버린 하녀의 얼굴.

더 이상 에르단과 쌍둥이가 아니게 된, 자신의 얼굴.

‘왜냐니. 그 이유를 정말 몰라서 물어?’

에슬린은 자조했다. 에르단의 목소리처럼 들리기도 했다.

“…….”

목이 메어 왔다. 코끝이 아팠다. 뜨거운 것이 자꾸만 눈을 파고들었다.

에슬린은 유령이었다.

죽었으나 죽지 못하고 서성이는 유령.

더 이상 이 황궁에 에슬린을 위한 자리는 없었다. 공작저에서도 그랬다. 당연한 일이었다.

유령은 떠나야 하는 존재이기에.

‘하지만 에르단 넌 아니잖아.’

살아 있음에도 유령처럼 부유하고 있는 인물. 1년이 넘도록 에슬린의 죽음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반신(半身).

자신은 과거를 버리고 나아가기로 했다. 그렇다면 에르단 또한 그래야만 할 것이다.

에슬린은 에르단이 제 죽음에 더 이상 사로잡혀 있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에르단이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게 하려면, 방법은 오직 하나였다.

에슬린 베르타니아가 살아 있다는 걸 알리는 것뿐.

* * *

“로즈벨 하녀님!”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에슬린이 걸음을 멈추었다.

해가 저물어 가는 늦은 오후, 불면증 약을 받아 연무장 근처를 지나는 도중이었다.

또네. 짧은 한숨이 흘렀다.

“네, 기사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아서스는 대뜸 물었다. 저 멀리서부터 에슬린을 발견하고 달려와 조금 거칠어진 호흡이었다.

“네. 그런데 무슨 용무로 부르셨나요?”

“아, 용무…….”

그는 생각지도 못한 질문을 받은 사람처럼 굴었다. 아서스의 녹안이 이리저리 흔들리다 에슬린의 손에 닿았다.

“그거! 들어 드리겠습니다. 무거워 보여서.”

고작 불면증 약 한 봉지였다.

“괜찮습니다, 기사님. 바쁘실 텐데 돌아가시는 게……”

“저 끝까지만이라도 기회를 주십시오! 제가 그러니까, 저곳에 볼일이 있어서. 겸사겸사.”

물에 빠진 사람처럼 다급한 말투였다. 이쯤 되니 에슬린은 이 황궁 기사가 도대체 왜 이러는 건지 궁금했다.

벌써 며칠째였다.

연무장 앞을 지날 때마다 도대체 어떻게 알고 나타나는 건지, 그는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안절부절못하며 에슬린의 뒤를 졸졸 쫓아다녔다.

“……안 되겠습니까?”

짙은 눈썹이 팔자로 축 늘어졌다. 에슬린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네요.”

“감사합니다! 하녀님.”

씩 웃는 그에게서 작은 덧니가 보였다.

둘은 함께 길을 걸었다. 에슬린은 빠르게, 아서스는 아주 느리게. 그러나 에슬린의 짐이 아서스에게 인질처럼 잡혀 있는 바람에, 결국 보폭을 맞추는 건 에슬린이었다.

“하녀님께서는 어디 출신이십니까?”

“저는 북부에서 왔어요.”

“오, 북부. 꽤 먼 곳에서 오셨군요. 아십니까? 거기 가는 길에 오래된 광산이 하나 있는데…….”

조잘조잘 실없는 것들을 묻고 떠드는 기사의 귓불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에슬린은 그 모습을 보며 대충 장단을 맞춰 주었다. 어디선가 따뜻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렇군요. ……아, 도착했네요. 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기사님.”

약속한 곳에 다다르자, 그녀는 손을 뻗어 약을 가져왔다.

아서스는 원망스러운 눈길로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았다. 길이 뭐 이리 짧지?

“하녀님.”

“네.”

“저, 저를…….”

“……?”

“저를 하녀님의 친구로 삼아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뜬금없는 말이 튀어나왔다. 에슬린이 미간을 좁혔다.

하녀와 친구라니. 이 기사가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네?”

“아니, 친구가 좀 그러시면! 그 부하나, 시종이나…… 뭐 그런 거라도 좋긴 한데.”

아서스는 떠오르는 대로 마구 지껄였다. 뚝딱대는 그를 보며 에슬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이런 일에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저 빨개진 귀 끝과 횡설수설하는 말투, 달아오른 얼굴을 보면 꼭 마치 자신을…….

“기사님, 제가 틀렸다면 말씀해 주세요.”

“네? 뭐가 말입니까?”

자의식 과잉처럼 보일까 염려되었지만, 아니라면 그냥 머쓱하게 웃고 넘어가면 될 것이다. 에슬린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매일 짐을 들어 주시고, 자꾸 말을 거시고, 거기다 갑자기 친구가 되자고 하시는 게…… 혹시 저에게 다른 마음이 있으신 건지 궁금……”

……해서요.

그러나 에슬린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눈앞의 얼굴이 제 머리카락 색보다 진한 붉은색으로 순식간에 불타올랐기 때문이었다.

이건 뭐. 굳이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그그그그, 그렇게 티가 많이 났습니까? 아닌데, 아닐 텐데!”

그는 팔로 입가를 가리며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그러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우뚝 멈춰 서더니 다시 에슬린에게 다가섰다. 커다란 키 때문에 금방 그림자가 졌다.

“안, 안 들킬 줄 알았는데…….”

그의 눈동자가 긴장으로 살짝 떨렸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

“……맞습니다. 저 지금 하녀님께 한눈에 반해서 이러는 겁니다.”

처음 들어 보는 낮게 속삭이는 목소리였다. 에슬린은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물렸다.

둘 사이에 짧은 침묵이 흘렀다. 먼저 침묵을 깬 건 당연히 아서스였다. 그는 미친 듯이 손사래를 치며 몸을 물렸다.

“무무무물론, 하녀님께 부담을 드리겠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닙니다. 언제든 싫으시면 말씀하십시오! 당장 떠나……는 건 좀 어려울 것 같지만 자중…… 그래, 자중은 해 보겠습니다!”

“…….”

“아…… 방금 언제든 싫다고 말씀하시라는 건 사실 빈말입니다. 그렇게 말씀 안 하셨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우울해진 낯으로 덧붙였다.

“기사님, 전 하녀예요.”

에슬린은 침착하게 말했다. 그 말에 아서스는 잠시 눈만 깜빡였다.

“뭐가 문젠데요?”

진심으로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왠지 모르게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짐 들어 주셔서 감사했어요.”

어울리지 않게 할 말을 잃은 에슬린은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다. 멀어지는 등 뒤로 아서스가 외쳤다.

“저야말로 오늘 상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녀님, 식사 많이 많이 드시고, 잠도 잘 주무시고, 조심히 가십시오!”

커다란 개가 뒤에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에슬린은 조금 빠른 걸음으로 쭉쭉 나아갔다. 아서스가 들고 있던 짐이 따끈따끈했다.

‘이상한 사람.’

그 말 외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정말 이상한 사람이었다.

그 누구도 에슬린에게 저런 식의 애정을 표현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황녀였고, 그런 그녀에게 구애한다는 건 지극히 정치적인 목적에 기반한 것이었으므로.

아, 한 사람.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한결같은 애정을 쏟던 이가 있었다.

‘물론 그 애정은 내 것이 아니었지만.’

에슬린은 자꾸 떠오르는 얼굴을 길게 털어 냈다. 생각조차 사치였다.

한편 아서스는 에슬린이 점으로 사라질 때까지 서 있다가 돌아왔다. 어느새 훈련을 마칠 시간이었다.

“술 한잔 안 할래?”

“응, 싫어.”

동기가 물어 왔으나 아서스는 거절하고 황궁을 나왔다.

한번 넘어가기 시작한 해는 빠르게 저물어 들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무렵.

그는 황궁 밖 으슥한 골목을 걸었다. 더럽고 축축해 누구도 찾을 것 같지 않은 좁은 골목이었다.

끼이익.

아서스는 골목 한쪽에 난 문을 밀었다. 반쯤 썩은 나무 문은 자칫 지나치기 쉬운 것이었으나 그에겐 익숙한 듯 보였다.

“오, 아서스!”

안에 있던 긴 로브를 입은 남자가 그를 반겼다. 아서스는 홀린 듯 그 남자의 곁으로 들어섰다.

“타툴란 선생님, 다녀왔습니다.”

아서스는 덧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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