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어서 와라.”
“네, 선생님.”
해가 저물듯, 아서스의 눈동자에 총기가 저물어 있었다.
내부는 음습하고 어두운 연구실이었다.
한쪽에 놓인 벽난로에선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액체가 끓고 있었고, 책상은 온갖 실험 도구들로 정신이 없었다.
구석에 쌓인 책들, 정체를 알 수 없는 자국들, 벌레나 쥐의 사체들.
그러나 내부엔 그 어떤 것보다 눈을 사로잡는 게 있었다.
한쪽 벽면을 가득 메운, 한 여자의 초상화.
풍성한 연보랏빛 머리카락. 짙푸른 눈동자. 조금 냉랭해 보이는 표정. 그러나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운…….
에슬린 베르타니아의 초상화였다.
문득 아서스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어?”
“왜 그러지?”
“선생님, 이런 초상화가 있었던가요?”
아서스가 연보라색 머리카락을 보고 웃으며 물었다. 초상화 따위 평소엔 신경조차 쓰지 않던 그였다.
타툴란이라 불린 남자가 그런 아서스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손안에 쥐고 있던 마법진 종이를 탁 내려놓았다.
“흠. 아서스. 나의 인형. 요즘 밖에서 무슨 일이 있나 보구나?”
쇳소리 섞인 목소리였다. 타툴란이 바싹 마른 나뭇가지 같은 손가락을 들어 아서스의 턱 끝을 쓸었다.
아서스는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웃을 뿐이었다.
“네 기운이 좀 이상한데. 내게 보여 주겠느냐?”
“네, 선생님. 물론입니다.”
아서스가 입력된 것을 읊는 사람처럼 말했다.
툭. 타툴란이 아서스의 어깨를 건드렸다. 마나를 거두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아서스의 커다란 몸이 순식간에 풀썩 쓰러져 내렸다.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찌직, 찌지직.
어디선가 나타난 쥐가 아서스의 몸 근처로 모여들었다.
“에잇, 시체 냄새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맡는다니까.”
타툴란은 손을 휘휘 내뻗으며 쥐를 몰아냈다.
그는 갑자기 걸린 열병을 제때 치료하지 못하고 죽은 불쌍한 기사였다.
아니…… 사실은 타툴란이 제대로 치료할 생각이 없었던 거지만.
그는 비릿하게 웃으며 마나를 사용해 아서스 녹턴의 기억을 읽었다.
“대체 요새 뭘 하고 다니길래 평소와 다른 기색인지 한번 보자꾸나.”
인형은 타툴란의 눈이었다.
낮에는 본래의 자아를 되찾고 생활하다, 해가 지면 타툴란의 곁으로 돌아온다.
그럼 타툴란은 인형의 기억을 살폈다. 안전한 곳에 숨어 세상을, 특히 황궁을 구경하는 데 이보다 더 편리한 수단은 없었다.
‘디에리안 프레이가 대마법사로 황궁에 있을 땐 어려웠지.’
그는 빠득 이를 갈았다. 지금 신전의 대마법사가 별 볼 일 없는 자라 다행이었다.
재수 없는 녹색 머리를 떠올리자 반사적으로 생각나는 사람이 있었다. 길게 찢어진 노란 눈이 벽을 향해 슥 굴렀다.
에슬린 베르타니아.
타툴란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당신이 이대로 죽었을 리 없어.
도도하고 오만하던 얼굴이 어제처럼 선명한데.
“음?”
타툴란이 턱을 기울였다. 아서스의 기억을 빠르게 살피던 중 이상한 점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하녀는…… 누구지?”
흑마법사의 눈이 가늘게 좁아 들었다.
* * *
2황자궁이 열렸다.
화려한 오후, 실로 오랜만에 황자궁으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에슬린 또한 그 틈에 있었다. 물론 레실리아와 메리사의 수행 하녀로서였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황자비 전하?”
“세비스 자작 영식, 오랜만이군.”
귀족들 간에 간단한 인사가 이루어졌다.
“그대가 온 걸 보면 오늘 이 파티에서 연주가 있는 모양이야.”
“맞습니다, 제가 피아노를 들려드릴 예정입니다.”
세비스 영식은 에르단의 몇 안 되는 친구이자, 최근 사교계에서 주목받는 피아니스트였다.
레실리아가 방긋 웃었다.
“기대하겠네. 그런데 에르단 전하께서는?”
“글쎄요. 곧 나타나실 시간이 됐는데…… 아. 저기 오시는군요.”
세비스 영식의 손끝을 따라 에슬린은 몸을 틀었다. 모든 사람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여들었다.
저 멀리 크림색 예복을 갖춰 입은 남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이 파티의 주최자이자 2황자인 에르단 베르타니아였다.
가장 먼저 보인 건, 익숙한 연보라색 머리카락이었다.
그 아래에 스치듯 보이는 어둡고 푸른 눈동자와 창백한 낯빛. 조금 우울한 듯 아래를 향한 시선이 왠지 모를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연약한 인상의 남자였다.
‘에르단…….’
에슬린은 치맛자락을 꽉 쥐었다.
‘왜 이렇게 수척해졌어.’
에슬린의 기억 속 에르단보다 두 배는, 아니 열 배는 메마른 느낌이었다.
날카롭게 도드라진 턱선, 거뭇거뭇한 눈 밑, 버석한 입술 같은 것들이 온통 마음에 걸렸다.
레실리아를 발견한 에르단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형수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네, 이렇게 건강을 되찾으신 걸 보니 다행이군요.”
그 말에 에르단은 희미하게 웃었다.
“네…… 전 형수님께서 진짜 오실 줄은 몰랐고요.”
그 순간 레실리아의 얼굴이 미묘하게 굳었다.
“……당연히 와야지요. 초대장을 보내셨으니까요.”
“아하. 초대장.”
에르단은 슬쩍 고개를 기울이며 이마를 긁었다.
“뭐, 안 보낼 수는 없었으니까요.”
어쩔 수 없이 보낸 건데 진짜 오다니. 대충 그런 뉘앙스였다.
레실리아의 눈동자가 순식간에 당황으로 물들었다.
“뭐, 뭐라고요?”
“농담입니다.”
에르단은 청명하게 웃었으나 어색해진 공기는 풀릴 줄 몰랐다.
“자…… 앉으시지요. 연주를 시작하겠습니다.”
중재에 나선 건 근처에 엉거주춤 서 있던 세비스 영식이였다.
그는 에르단을 이끌며 메리사에게 눈짓했다. 기민한 메리사는 레실리아를 반대 방향으로 이끌었다.
‘저 바보.’
에슬린은 잠시 고민하다 몰래 에르단의 뒤를 쫓았다. 근처에 놓여 있던 접시를 대충 손에 들었다.
주변을 정리하는 척, 에르단과 세비스 영식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전하, 대체 왜 그러십니까?”
“내가 이 파티 싫다고 했잖아. 저 여자는 더 싫고.”
에르단이 짓궂게 웃었다. 영식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래도 황자비 전하께 대놓고 무안을 주시면 안 되죠.”
“알 게 뭐람.”
그는 근처에 놓인 티 테이블에 불량하게 앉아 빈 와인 잔을 빙빙 돌렸다. 몹시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제발 아무 데나 시비 걸지 마세요.”
“알아서 할 테니까 가서 연주나 해. 내가 너 잔소리나 하라고 부른 줄 알아?”
에르단이 턱 끝으로 앞에 놓인 흰 피아노를 가리켰다.
“그럼 제가 연주를 끝낼 때까지 여기 얌전히 계세요. 네?”
“알아서 한다는 말의 의미를 모르나 봐?”
“아직 몸도 안 좋으실 텐데 쓸데없이 힘 빼지 마시란 말이었어요.”
“알겠으니까 잔소리 그만하고 가, 좀. 에슬린처럼 굴지 말…….”
순간 에르단이 말을 멈추었다. 창백한 얼굴 밑에 감춰 두었던 감정이 잠시 떠올랐다.
“…….”
와인 잔을 쥔 그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세비스 영식은 에르단의 어깨를 토닥였다. 그는 더 말을 덧붙이지 않고 피아노를 향해 걸어갔다.
에슬린은 백 번 정도 닦았을 접시를 그제야 내려놓았다. 에르단의 얼굴을 보고 싶었으나, 여기서는 잘 보이지 않았다.
연주가 시작되었다.
따뜻한 봄 날씨와 딱 어울리는 선율이 정원을 메웠다.
“어쩜. 너무 좋네요.”
우아하면서 화려한 그 음색에 모두가 빠져들었다.
에슬린은 이 기회를 틈타 움직였다. 턱을 괸 채 뚱하게 앉아 있는 에르단을 향해 물었다.
“차를 한 잔 올릴까요?”
“아니, 와인을 줘.”
그는 에슬린 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와인은 무슨. 병자 주제에.’
에슬린은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 두었다.
“여기, 맛있게 드세요.”
“이게 무……”
에르단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는 잠시 얼빠진 듯 에슬린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훑었다.
기회였다.
에슬린은 찻잔과 함께 작은 쪽지를 밀어 넣으려고 했다.
“전하, 전하.”
그러나 갑자기 시종이 끼어들었다.
그 탓에 계획은 실패로 돌아가고, 쪽지는 다시 에슬린의 손안으로 사라졌다.
“무슨 일이지?”
“1황자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한 사람은 말했고, 한 사람은 생각했다.
거칠게 말을 내뱉은 에르단의 미간이 험하게 구겨졌다.
‘카르단이 왜?’
대충 짐작은 되었다. 보나 마나 에르단의 빌빌대는 몰골을 구경하러 온 거겠지…….
에르단 또한 그렇게 생각한 건지, 못마땅하게 혀를 찼다. 피아노 선율이 거침없이 내달리고 있었다.
“이런. 아우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졌군.”
곧이어 카르단이 등장했다. 에르단을 깔보듯 훑는 시선에 비아냥대는 말투는 덤이었다.
“누가 초대장도 확인하지 않고 아무나 들인 거지?”
에르단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시종은 땀만 뻘뻘 흘리며 답하지 못했다.
“흠, 아무나라니. 아우님, 말이 심하잖아?”
“아, 실례했습니다, 형님.”
에르단은 정중하게 사과했다.
“제가 이제 막 병석에서 일어났다 보니 아무렇게나 말하는 버릇이 생겨서요.”
그 말에 카르단이 피식 웃었다.
“이런. 머리라도 다친 게 아닌지 잘 검사받도록 해.”
“아무렴요.”
태연하게 대꾸했으나, 에르단의 속은 뒤집히기 일보 직전이었다. 차갑게 식은 그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아, 그냥 다 엎어 버리고 싶다. 그는 생각했다.
모후의 부탁만 아니었어도 이런 꼴 같지도 않은 티 파티 따위, 절대 열지 않았을 텐데.
그냥 죽어 버릴 걸 그랬지. 에르단은 자신의 질긴 목숨을 비웃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카르단이 근처 티 테이블에 털썩 앉았다. 그의 시종이 가까이에 있는 하녀에게 명령했다.
“차를 내와라.”
“네.”
에슬린은 공손히 대답하며 트롤리로 몸을 돌렸다. 딱딱하게 굳은 에르단의 옆얼굴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음…….’
트롤리에는 다양한 찻잎이 준비되어 있었다.
‘기분 전환이나 좀 시켜 줄까?’
찻잎을 고르는 그녀의 손길이 신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