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대령했습니다.”
달그락. 목을 축이기 딱 좋은 온도로 맞춘 차가 카르단 앞에 놓였다.
에슬린은 허리를 굽히고 몇 발자국 뒤에 섰다.
카르단이 별생각 없이 찻잔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윽. 맛이 왜 이래?”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던 카르단이 별안간 코를 쥐며 말했다.
“전하, 왜 그러십니까?”
“무슨 일이시죠, 형님?”
주변에 있던 시종들과 에르단이 차례로 물었다.
카르단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테이블 위에 내팽개친 찻잔을 삿대질했다.
“차 맛이! 이렇게 쓰고 떫은 차는 처음이야!”
“네? 차 맛이요?”
그의 시종들이 호들갑을 떨었다.
“…….”
침묵을 지키던 에르단은 가만히 눈동자를 굴려 카르단 뒤에 있는 하녀를 응시했다.
눈이 마주쳤다.
하녀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이것 봐라. 그 순간 에르단의 머리가 빠른 속도로 회전했다. 어둡게 가라앉아 있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반짝 빛났다.
“아, 그거.”
그는 카르단이 마시다 만 찻잔을 들어 냄새를 맡았다.
“약차입니다. 원래 입에 쓴 게 몸에 좋은 법이니까요.”
“뭐? 약차? 이건 약차 수준이 아니라!”
“형님.”
에르단이 어깨를 늘어뜨렸다.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가 몹시도 처연해 보였다.
“전 병자가 아닙니까.”
카르단의 입매가 씰룩거렸다.
“콜록, 콜록.”
그는 보란 듯이 기침까지 해 보였다.
‘뻔뻔하긴.’
쓰디쓴 차를 만들어 낸 건 자신이었지만, 에르단의 능청스러운 대처가 더 가관이었다. 에슬린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하, 참. 진짜 별스러운 입맛도 다 있군! 다른 거! 다른 걸 내와!”
“형님, 어떤 걸 원하십니까?”
에르단이 물었다.
“몰라. 쓰지 않은 걸로! 달달한 게 좋겠어!”
차는 이제 꼴도 보기 싫은지 카르단이 거칠게 손을 휘저었다. 에슬린은 당황한 하녀처럼 조금 허둥대며 말했다.
“그럼…… 갓 짜낸 과일 주스를 내오겠습니다.”
“그래! 당장 가져와!”
카르단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주방으로 떠나는 에슬린을 에르단이 의미심장하게 바라보았다.
즉석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한 시선이 공중에서 맞부딪쳤다.
에르단은 신뢰의 눈빛을 보내며 살포시 고개를 끄덕였다. 에슬린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주스를 대령했습니다.”
푸우웁.
카르단이 허공에 노란 주스를 내뿜었다. 주변에서 음악을 감상하던 귀족들이 흘깃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 이 설탕 덩어리는 뭐야?”
그는 눈썹을 치켜들고 소리쳤다. 끈적끈적한 액체가 테이블을 타고 바닥에 뚜욱, 뚜욱 떨어져 내렸다.
“단 걸 내오라고 하셔서…….”
“이런 정신 나간 하녀를 봤나!”
카르단이 벌떡 일어섰다.
“형님, 형님. 왜 그러십니까?”
에르단이 그런 카르단을 진정시켰다. 에슬린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으며 테이블의 주스를 닦았다.
“네가 이걸 마셔 봐! 혀끝이 아리다 못해 마비되는 기분이라고!”
길길이 날뛰던 카르단이 주스 잔을 내밀었다. 향긋한 오렌지 주스는 찰랑이는 게 느릴 정도로 점도가 높았다.
지독하게 쏟아부은 설탕 때문이었다.
“흠. 맛있는데요?”
에르단이 한 모금 마신 뒤 선선히 말했다. 카르단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에슬린은 에르단이 진짜 마실 줄은 몰랐기에 한 번 더 웃음을 참아야만 했다.
‘진짜 달 텐데…….’
아니나 다를까 테이블 아래에 놓아둔 그의 손끝이 꾹 말려 있었다.
그러나 그는 카르단을 골려 먹는 데서 오는 강렬한 자극에 지배당한 상태였다.
“형님, 너무 건강만 챙기시는 것도 안 좋습니다. 종종 이렇게 혀에 단것도 먹어 줘야 스트레스가 없죠.”
“에르단!”
“네. 부르셨어요?”
천연덕스러운 표정에 카르단이 뒷목을 잡았다.
“너, 에르단 이놈!”
“형님, 형님. 진정하세요. 이유가 어찌 됐든 형님을 화나게 만들었으니 하녀에게 벌을 주겠습니다.”
그가 끓어오르기 전, 에르단이 급격히 꼬리를 말고 엎드렸다. 그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에슬린을 향해 소리쳤다.
“너!”
에슬린은 부러 어깨를 흠칫 떨었다.
“흠씬 혼나는 건 일단 나중에 하고! 내가 형님께 대신 사죄드려야 하니, 와인 창고에 가서 벨레인산 와인을 가져와.”
‘벨레인산 와인’이라는 말에 카르단이 눈을 커다랗게 치켜떴다. 그건 카르단이 없어서 못 먹는 최고급 중의 최고급 와인이었다.
“벨레인산 와인 말씀이십니까?”
에슬린이 ‘벨레인산’이라는 말을 강조하며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그래! 형님, 이렇게 하면 화가 좀 풀리시겠습니까?”
“흠, 흠흠. 뭐…… 나쁘진 않겠지.”
카르단이 씰룩이는 입가를 가리며 대답했다. 단순한 이였다.
에슬린은 근처에 있던 2황자궁 하녀 한 명과 함께 지하 와인 창고로 갔다.
피아노 연주는 한참 절정을 지나고 있었다.
“와인을 가져왔습니다.”
와인 보틀을 본 카르단이 기대에 젖은 눈으로 입술을 꿈틀거렸다.
탁. 그 앞에 얇은 와인 잔이 놓였다. 그러자 그의 설렘은 끝을 모르고 치솟는 듯했다.
“그래. 형님께 맛보여 드려야 하니, 어서 열거라.”
“네.”
에르단의 진지한 명령이 떨어지고 에슬린은 조심스럽게 코르크를 열었다. 행여나 귀한 와인에 문제가 생길까, 몹시 신중한 손놀림이었다.
그 감질나는 행동에 카르단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였다.
뚝. 피아노 소리가 멈추었다.
짝짝짝.
그리고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개를 돌리니 세비스 영식이 연주를 마치고 갈채를 받고 있었다.
에르단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이런, 연주가 끝났군요.”
“그런데?”
카르단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에르단이 가벼운 몸놀림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파티는 여기까지입니다.”
“뭐, 뭐라고?”
에슬린은 찔끔 뽑히다 만 와인 코르크를 바라보았다. 사실 중간부터 거의 힘을 주지 않고 있었다.
“대체 무슨 소리야? 와인은?”
“형님, 그러니까 무슨 소리냐 하면…….”
에르단이 정중하게 어딘가를 가리켰다.
카르단이 들어온 정원 출입구였다.
“안녕히 가시란 말이었습니다.”
악당 같은 악동의 얼굴에 그제야 반짝 생기가 돌았다.
카르단은 결국 불같이 화를 내며 사라졌다.
에르단은 아주 홀가분한 표정으로 에슬린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태연한 표정으로 뒷정리를 하는 중이었다.
“간도 크네. 하녀 주제에.”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아하. 이제 뻔뻔하기까지.”
“오늘 제 실수를 잘 덮어 주셔서 감사드려요.”
에슬린은 슥, 물컵과 함께 아까부터 쥐고 있던 쪽지를 건넸다.
빨래처럼 늘어져 있던 에르단이 순식간에 몸을 바로 세웠다.
“더 시키실 게 없으시면, 물러가 봐도 될까요?”
담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르단은 날카로운 표정으로 에슬린을 보았다.
“……그래.”
그의 손안으로 쪽지가 사라졌다. 그 모습을 확인하자마자 에슬린은 빠르게 황자궁을 벗어났다.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 * *
달이 뜬 밤이었다.
에슬린은 몰래 처소를 빠져나왔다.
알려지지 않은 뒷문을 통해 황녀궁 뒤뜰로 향했다. 안쪽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으나, 쇠사슬로 굳게 잠겨 있어 어려웠다.
그녀는 나무 뒤에 모습을 감추고 에르단을 기다렸다. 곧 저벅저벅, 길게 자란 잔디를 밟는 소리가 났다.
“나와. 있는 거 알아.”
“…….”
에슬린은 모습을 드러냈다. 에르단의 푸른 눈동자가 달빛을 머금어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그는 에슬린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여러 번 훑었다.
“너 대체 정체가 뭐야?”
심기가 잔뜩 뒤틀린 목소리였다.
“누군데 감히 이런 쪽지를.”
툭. 에슬린의 발치에 잔뜩 구겨진 종잇조각이 떨어졌다.
그 안엔 에슬린 베르타니아에 대해 알려 줄 테니, 오늘 밤 홀로 황녀궁으로 오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쪽지 하나에 진짜 저렇게 오다니. 저건 저것 나름대로 심란하네.’
에슬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안 오면 안 오는 대로 큰일이었겠지만, 저렇게 대책 없이 구는 것도 문제였다.
“에르단.”
에슬린은 에르단을 부르며 한 발자국 걸음을 옮겼다. 에르단의 미간이 순식간에 구겨졌다.
“나야, 에슬린.”
에르단은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이런 미친.”
얼음처럼 굳어 있던 그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당장 목이라도 조를 것 같은 위협적인 기세였다.
그러나 그럼에도 에르단은 에슬린을 쉬이 어쩌지 못했다.
설령 이 하녀가 에슬린과 일말의 관계라도 있다면…….
그런 기대인지 불안인지 모를 것 때문에.
“아직도 모르겠어?”
에슬린은 가만히 덧붙였다.
“각자의 머리카락을 묶은 쪽지를 보내는 건, 어렸을 때 자주 했던 일이었잖아.”
흘끔, 바닥에 떨어진 쪽지에 시선을 던졌다. 엉망이 된 쪽지 근처로 연보랏빛 실 같은 게 떨어져 있었다.
에슬린은 문득 떠오른 옛 기억에 짧게 웃었다.
“하루종일 붙어 있었는데…… 무슨 비밀 쪽지까지 보낼 필요가 있었는지.”
에르단의 숨이 거칠어졌다. 에슬린은 그런 그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그는 패닉에 빠진 듯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너, 대체, 누구야?”
“에슬린이라고.”
군더더기 없는 대꾸였다. 에르단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며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머, 머리카락이나 눈동자는 비슷하지만.”
그는 혼란스러운 상황을 이해해 보려 애썼다. 눈앞의 하녀를 보는 눈동자가 파도 위 조각배처럼 흔들렸다.
에슬린은 불쌍한 에르단을 도와주기로 했다.
“빙의했어. 이 하녀의 몸에. 머리카락이나 눈동자 색 때문에 혼이 이끌린 것 같아.”
“이거 꿈…….”
“꿈 아니야. 디엘의 환각도 당연히 아니고.”
되물을 말까지 예상해 덧붙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르단은 동상처럼 굳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에슬린이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억나? 우리 둘이 네 궁에 카르단의 인형을 묻은 일?”
“……그, 그건.”
당연히 기억났다. 어린 시절의 일이었다. 오직 둘만이 알고 있는.
“그리고 또 뭐 있더라? 도서관 가장 깊숙한 책장 하나를 빈 책으로 모두 바꿔 두고, 스승님의 벽장을 뒤져 술을 훔쳐 마신 적도 있고.”
에슬린은 손가락을 접으며 말했다.
“…….”
“몰래 변장하고 황궁을 빠져나가려다 우물에 빠져 젝스 경에게 구조되었고 또 미로 정원마다 흔적을 남겨 모후께 혼이 나고…… 아! 우리 둘이 지하 통로를 만들겠답시고 땅을 파던 장소를 하나씩 말해 볼까?”
에르단이 달려든 건 순식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