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에슬린!”
또래보다 작은 편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그 또한 멀쩡한 성인 남성이었다.
에슬린은 그런 에르단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숨이 막혔다.
“에슬린, 에슬린. 에슬린!”
에르단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저 으스러질 듯 에슬린을 껴안고 그녀의 이름을 연발할 뿐이었다.
이대로 놓치면 영영 사라질 신기루를 만난 사람처럼.
그 간절한 몸짓에 덤덤함을 가장하던 에슬린의 코끝이 싸해졌다.
“……에르단.”
그에게선 익숙하고도 그리운 향기가 났다. 저절로 눈물이 차올랐다.
“어떻게 된 거야? 난 네가…… 네가 당연히 죽은 줄 알았어. 아니, 죽은 건 맞는 건가? 뭐야, 대체 뭐냐고…….”
에르단이 에슬린을 꽉 껴안은 채 횡설수설했다. 에슬린은 그런 그의 등을 쓸어 주었다.
“진정해.”
“네가 이렇게 돌아올 줄이야. 난 그것도 모르고…….”
기어코 울음이 터졌다. 어린아이처럼 에르단은 한참을 울었다. 성인이 되고 그가 이렇게 우는 건 처음이었다.
내가 죽었을 때도 넌 이렇게 울었을까?
에슬린은 마음이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지? 말해 봐, 에슬린. 말 좀 해 봐. 어떻게 된 거야? 근데 이거 진짜 꿈은 아니겠지? 꿈이어도 꿈 아니라고 해.”
울음이 조금 진정되자 이번엔 질문이 쏟아졌다.
에슬린은 이때를 틈타 숨을 막을 듯 조여드는 그를 간신히 떼어 냈다.
“다 설명할게. 그 전에 잠깐만 이것 좀 놔 봐.”
“싫어.”
“진짜 숨 막혀. 날 두 번 죽일 거야?”
그러자 에르단은 억지로, 정말 억지로 에슬린에게서 떨어졌다. 달빛에 비친 그의 흰 얼굴이 눈물 자국으로 온통 엉망이었다.
“왜? 네가 다시 사라질까 봐 무섭다고.”
에르단이 반쯤 울먹이며 투정 부리듯 중얼거렸다. 에슬린은 막혔던 숨을 짧게 토해 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차근차근 말해 줄게. 근데, 그 전에 먼저 할 말 있어.”
“뭔데?”
에슬린은 입술을 꾹 깨물고 에르단을 바라보았다.
반드시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이 말을 하기 위해 정체를 밝힌 것이기도 했다.
그녀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투명한 눈동자에 순간 번쩍이는 무언가가 스쳤다.
“에르단 베르타니아.”
퍽!
깔끔한 타격음이 났다.
“아악!”
에르단이 정강이를 잡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감히 스스로 죽을 생각을 해?”
분노 어린 목소리가 그의 정수리로 쏟아져 내렸다.
에르단은 상황 파악을 하기 위해 한참을 눈만 깜빡였다. 뭐지, 이거…… 설마?
“……너 지금 나 때린 거야?”
그가 멍하게 중얼거렸다.
“죽었다 살아나더니 날 때렸어!”
“그래. 너 하는 거 답답해서 패 주러 왔어!”
에슬린은 지지 않고 대꾸했다.
에르단은 감동이 다 깨진 얼굴로 에슬린을 올려 보았다.
“……어떻게 스스로 독을 먹어?”
그러나 에슬린의 독기가 풀린 건 한순간이었다. 그녀는 쓰러지듯 자리에 주저앉았다. 맑은 눈에서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에르단은 마비된 사람처럼 몸을 굳혔다.
“어떻게 죽을 생각을…….”
“에슬린.”
“내가 널 어떻게 살렸는데.”
에르단은 미간을 좁혔다.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우는 에슬린은 처음이었다.
“그 카르단에게 빌고 빌어서, 내가 널 살린 건데!”
에르단은 입술을 깨물었다.
“……알아, 에슬린.”
꽉 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가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해 카르단에게 머리를 숙인 것도 알고, 네 측근들을 지키기 위해 독배를 받은 것도 알아.”
그는 다시 에슬린의 눈동자에 시선을 고정했다. 고통스러운 듯, 눈썹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에슬린, 내가 그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어? 난 내 몸 반쪽을 잃었는데.”
“…….”
“내가 그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느냐고.”
에르단은 탁한 숨을 토해 냈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고자 주먹을 쥐었으나 소용없었다.
“네 시체를 밟고도 보란 듯이 살아남았어야 했던 걸까?”
“그래!”
에슬린은 발작하듯 소리쳤다.
“그게 내 선택이었으니까.”
그녀의 붉어진 눈가가 더욱 달아올랐다.
자신이 지킨 목숨이었다. 그걸 에르단은 함부로 버리려 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널 살리는 게 내 마지막 결정이었다고.”
“아니, 아니야. 에슬린…….”
에르단이 거세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런 건 옳은 선택이 아니야. 네 선택지엔 너 자신이 없었잖아.”
“…….”
“그 누구도…… 네가 그런 식으로 희생되는 걸 바라지 않았다고.”
에슬린은 침묵했다.
희생이라니.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물론 함께 살아남았다면 좋았겠지만, 당시엔 그럴 여력이 되지 않았다.
자신이 살고자 했다면 에르단뿐만 아니라 측근들까지 모두 위험해질 상황이었다.
따라서 에슬린은 황녀로서, 최선의 결정을 했을 뿐이었다.
가장 합리적으로, 최대한 많은 걸 지킬 수 있는 선택을.
아마 다시 돌아가도 같은 선택을 하리라.
“그건 당연한 내 선택이었어.”
“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는구나.”
에르단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적을 깬 건 길게 고개를 털어 낸 에르단이었다.
“됐어. 그만하자. 너랑 싸우고 싶은 거 아니야.”
“…….”
“잘잘못을 따지는 게 뭐가 중요해? 이젠 다 중요하지 않아. 네가 돌아왔다는 게 제일 중요하지.”
그는 품 안에서 보드라운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물 자국을 닦아 주었다.
구름이 움직였다. 반쯤 가려져 있던 달빛이 그제야 온전히 세상에 드러났다.
그는 할 말이 많았지만 모두 미뤄 두었다.
그냥 지금은 이 한마디만 하고 싶었다.
“잘 돌아왔어, 에슬린.”
창백한 달빛에 에슬린의 얼굴이 선명하게 비쳤다. 에르단은 그 모습을 꼼꼼히 눈에 담았다.
이제 더 이상 쌍둥이라고 할 수 없게 된 얼굴을…….
조금 착잡했다. 그러나 그는 욕심내지 않기로 했다.
죽은 줄 알았던 가족이 돌아왔다.
그거면 됐다.
* * *
테베트 리페리우스는 마지막 갈림길에 서 있었다.
오른쪽은 수도로 향하는 길.
왼쪽은 남부로 향하는 길.
수도로 가겠다고 통보는 해 두었으나, 막상 마지막 갈림길이 나오니 망설이게 되었다.
이제 선택하면 돌이킬 수 없었다. 남부로 가는 길은 이게 마지막이었다.
“…….”
그는 눈을 감고 고개를 들었다. 긴 숨을 내뱉었다. 달빛이 얼굴 위로 쏟아져 내렸으나, 모든 감각이 사라진 듯 아무 감흥도 없었다.
어떻게 이곳까지 왔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잠은 언제 잔 건지, 음식은 언제 먹었는지조차 희미했다.
‘황궁에 추천장을 써 달라고 했습니다.’
‘남부행 마차 티켓을 구해다 주었어요.’
각기 다른 목소리가 머릿속을 떠다녔다.
집사장과, 이름 모를 하인 놈의 목소리.
말고삐를 거세게 쥐었다. 으득. 이를 악물었다. 상처가 쑤셨다. 빌어먹을. 테베트는 낮게 내뱉었다. 이 상처만 아니었어도 진작 따라잡았을 테다.
‘만일 이미 대륙을 떠났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기분이었다. 지친 눈동자가 초점을 잃고 허공을 헤매었다.
문득 어디선가 앳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집사, 나도 배를 타고 대륙 밖으로 나가 보고 싶어.’
‘소가주님, 그건 불가능합니다.’
‘왜?’
‘소가주님께선 리페리우스니까요.’
‘그게 그러니까 왜?’
‘소가주님.’
‘응?’
‘지금부터 드리는 말씀은 리페리우스의 치명적인 약점이니, 절대 들키시면 안 됩니다.’
‘……뭔데 그래?’
‘리페리우스의 피에는 오랜 저주가 흐르죠.’
‘저주?’
‘슐든 대륙을 떠나지 못하는 저주요.’
그 말에 자신은 울었던가, 화를 냈던가?
이젠 잘 기억나지 않았다.
아무튼 그 이후부터였던 것 같다.
그는 포기를 배웠다.
바다를 건너는 것, 새로운 것을 꿈꾸는 것, 리페리우스를 벗어나는 것…….
테베트는 뼛속까지 리페리우스로 자랐다.
리페리우스는 중립의 상징. 어디에도 기울지 않는 천칭.
천칭이 기울지 않기 위해선, 양 받침대는 비어 있어야만 했다. 그것이 불문율이었다. 머나먼 옛 선조가 스스로 찬 족쇄였다.
‘아무것도 선택하지 말거라. 그게 리페리우스다. 이 슐든 대륙에 발붙이고 살고 싶다면, 그 어떤 것에도 휩쓸리지 마.’
준엄한 부친의 목소리가 언제나 주박처럼 그를 옥죄었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테베트는 자신의 빈손을 내려다보는 게 싫었다. 무언가를 움켜쥐고 싶었다. 꽉 끌어안고 싶었다. 족쇄를 풀고 날아가고 싶었다.
정말 언제부터였지……?
그래, 절대 포기하고 싶지 않은 사람을 발견하고부터였지.
“…….”
테베트는 감았던 눈을 떴다. 더 망설일 시간은 없었다.
오른쪽은 수도로 향하는 길.
왼쪽은 남부로 향하는 길.
그는 천천히 말머리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리페리우스는 대륙을 건널 수 없다. 그러니 이건 어쩌면, 그의 희망 사항일지도 모른다.
에슬린이 수도로 향했기를. 황궁에 있기를.
물론 그의 판단을 흐리기 위해 수도로 향한 척, 남부로 갔을 수도 있다. 그러나 테베트는 그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제발…….’
이 끝에 그대가 있기를.
테베트는 고삐를 휘둘렀다. 말이 크게 울곤 땅을 박찼다. 폭풍 같은 바람이 몸을 때렸다.
검은 길은 마치 짐승의 아귀처럼 입을 벌려 테베트를 삼켰다. 두려웠으나, 멈추지는 않았다.
제발 나를 버리지 않았기를…….
귀환하는 자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