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재회한 쌍둥이는 남은 회포를 황녀궁의 응접실에서 풀었다.
정문은 모두 쇠사슬로 꽁꽁 잠겨 있었지만, 숨겨진 샛문을 통해 본관에 들어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어차피 그 샛문들 모두 에슬린이 만들어 둔 것이었다.
“이러고 있으니 어릴 때 같아.”
“그러게.”
둘은 응접실에 작은 불빛을 켜 놓고 마주 앉았다.
에슬린은 에르단에게 그동안의 일을 설명했다. 리페리우스 공작가의 하녀로 눈을 떠, 에르단의 소식을 듣고 황궁에 들어온 것까지.
모든 이야기를 들은 에르단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가 하녀 일을 했다고?”
“못 할 건 뭐야?”
“손도 다 상하고.”
그가 덥석 에슬린의 손을 쥐고 이리저리 살폈다. 건조하고 거친 살결이 아주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피부가 왜 이 모양이야? 짜증 나.”
그가 중얼거렸다.
에슬린은 소리 없이 웃었다.
공작저에서 수석 하녀가 되기 위해 일했던 때에 비하면 지금 손은 양반이었다. 그러나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에르단을 더 걱정시키고 싶진 않았다.
“에르단.”
에슬린은 가만히 그를 불렀다. 자신과 똑 닮은 눈동자가 시선을 맞춰 왔다.
“나는 죽지 않았어. 살아 있고, 앞으로도 잘 살 거야.”
잘 산다는 기준이 뭔진 모르겠지만, 에슬린은 일단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너도 더 이상 나에게 얽매이지 말고 살아.”
부드럽지만 단호한 어조였다.
멀거니 에슬린을 바라보던 에르단이 설핏 눈썹을 구겼다. 그가 그녀의 옷자락을 쥐었다.
“왜 그래? 떠날 사람처럼.”
“말했잖아. 원래는 대륙을 떠날 생각이었다고.”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하지 마. 이제 겨우 만났는데 어딜 가겠다는 거야?”
에르단이 입술을 씰룩였다.
“리페리우스 공작이 곧 개선한다고 들었어. 난 공작을 만나고 싶지 않아.”
침묵이 흘렀다.
이 하녀가 리페리우스 공작과 비밀 연인 관계였다는 말을 했을 때, 에르단은 못 들을 걸 들은 사람처럼 길길이 날뛰었다.
‘네가 지금 악마가 사랑을 한다고 말한 거야? 사랑도 감정이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감정도, 심장도 하물며 싸가지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 인간!’
흥분한 그를 진정시키느라 진이 다 빠질 정도였다.
“아무튼 난 떠나야 해. 되도록 빨리.”
다짐 같은 말이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에르단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너 머리가 굳었나 봐, 에슬린.”
“……시비 거는 거야?”
“시비 아닌데?”
에슬린은 한쪽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단순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말이야. 너 지금 애매하게 나갔다가, 궁 밖에서 공작이랑 마주칠 수 있다는 건 생각 안 해 봤어? 그가 지금 어디까지 온 줄은 알고?”
그 말에 에슬린의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차라리 내 궁으로 와.”
“…….”
“아무리 리페리우스라도 이 황궁까지 멋대로 뒤지지는 못할 테니까.”
에르단이 단단한 목소리로 말했다. 웃음기나 장난기를 모두 뺀 그의 눈이 날카로웠다.
“내 궁에 숨어 있다가 그래도 여전히 대륙을 떠나고 싶거든, 그땐 내가 널 안전하게 빼내 줄게.”
에슬린은 쌍둥이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었다.
그에게서 도망치는 것만 생각했지, 숨을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게다가 남부까지는 멀고도 멀지.’
아무리 제가 말을 빨리 달린다 한들, 숙련된 기사의 그것과는 다를 것이었다.
“……근데 에슬린.”
문득 에르단의 부름이 들려왔다.
“응?”
“너 괜찮아?”
“뭐가? 하녀로 사는 거?”
“어…… 물론 그것도 걱정이지만.”
답지 않게 에르단이 말을 머뭇거렸다.
“그럼 뭐?”
“리페리우스 공작이랑 그 하녀가 연인 관계인 거 말이야.”
에슬린은 코로 웃었다. 뭘 묻나 했더니.
“당연히 안 괜찮지.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벗어나려고……”
“그게 아니라.”
에르단이 말허리를 잘랐다. 그가 기울어져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짙푸른 눈동자가 에슬린의 표정을 세심하게 살피고 있었다.
“너 그 공작 꽤 맘에 들어 했잖아.”
에슬린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내가? 리페리우스 공작을?”
“아니야? 예전에 네가 하녀로 변장하고 만났다고도 했던 것 같은데.”
“…….”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이었다.
이게 다 무슨 소리지?
얼음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온몸이 차갑게 굳기 시작했다.
* * *
에슬린 베르타니아는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었다.
흘끔, 그녀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이 새벽부터.’
팔걸이에 턱을 괴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았다. 조금이라도 흐트러진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황녀 전하를 뵙습니다.”
“리페리우스 공작, 어서 와요.”
맹수의 눈을 한 남자.
테베트 리페리우스 공작 앞에선 말이다.
그는 꼭두새벽부터 몹시 완벽한 모습이었다.
깔끔하게 빗어 넘긴 앞머리 탓에 훤히 드러난 얼굴에서 빛이 났다.
매끈한 이마와 짙고 곧은 눈썹이 그의 강인한 인상을 더욱 부각했다. 살짝 올라간 눈매, 날카로운 턱선, 우뚝한 콧날.
‘왼쪽 눈 밑에 점이 있었군.’
문득 그런 실없는 것을 깨달았다.
“생각은 해 보셨습니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에슬린의 정신을 깨웠다. 그녀는 턱을 살짝 기울였다.
“단도직입적이군요. 이 새벽에 쳐들어와서 묻는 게 그거라니.”
“쳐들어왔다니요.”
테베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미리 연락을 넣고, 허락을 받은 뒤 방문한 겁니다만. 전하께서 강조하신 대로.”
“황궁 문턱을 넘으면서 하는 연락은 연락이 아니죠. 그냥 통보지.”
에슬린은 지지 않고 말했다. 테베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일 뿐이었다.
“그래서 답을 주지 않으실 겁니까?”
“단도직입적으로 물었으니, 저도 망설일 이유는 없겠네요.”
에슬린은 그제야 팔걸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괴었다. 자연스레 그를 비스듬히 내려다보는 자세가 됐다.
“거절하겠어요.”
차가운 대꾸였다.
붉은 기 도는 검은 눈동자가 순간 꿈틀거렸다. 테베트의 한쪽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당신 전쟁에 내 마법사를 빌려 달라니. 진심으로 한 얘긴가요?”
그녀는 코웃음 치듯 말했다.
“자, 답을 들었으면 이만 돌아가세요.”
지루하다는 듯, 에슬린이 나른하게 덧붙였다.
“왜입니까?”
석상처럼 서 있던 남자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슬린을 응시하는 얼굴이 묘하게 비틀려 있었다.
그가 한 발자국 다가섰다. 철컥. 옆구리에 찬 검이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정말 그 빌어먹을 포도 연구 때문입니까, 아니면…….”
테베트는 턱 끝을 매만졌다. 손으로 입가를 살짝 가린 탓에 그의 목소리가 더욱 음산하게 울렸다.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겁니까?”
철컥. 다시 한번 더 테베트가 움직였다. 느리지만 정확한 걸음. 마치 사냥을 하기 위해 몸을 낮추고 접근하는 짐승의 걸음 같았다.
“리페리우스 공작, 멈춰요.”
에슬린이 낮게 명령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짐승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물론 일렁이는 눈동자는 여전히 칼처럼 에슬린에게 박혀 있었다.
그때의 테베트는 꽤 솔직한 편이었다. 요동치는 감정을 잘 감출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응?’
에슬린은 눈을 찌푸렸다. 위화감이 들었다.
‘그때의 테베트? 그건 무슨 의미지?’
인지하는 순간, 그의 얼굴이 변했다. 순식간에 좀 더 자랐고, 더 강인해졌다.
단단해지고 무뎌진 얼굴이었다. 무엇보다 이젠 흔들리는 감정을 감출 줄 알았다. 혹은 그 이상의 것을.
“날 기다리겠다고 약속해 주십시오.”
부드러운 웃음을 가면처럼 쓴 남자가 그렇게 말했다.
쩌저적. 쩌적.
유리가 깨지듯 온 세상이 갈라졌다.
인지하는 순간, 모든 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에슬린은 번쩍 눈을 떴다.
“……!”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거친 호흡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그녀는 몸을 일으켜 주변을 둘러보았다. 시야는 천천히 돌아왔다.
어둠. 모두가 잠든 밤. 황자비궁. 사용인 처소.
낯익은 공간이 그제야 눈에 들어왔다.
“하아…….”
에슬린은 희게 질린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누구라도 붙잡고 묻고 싶었다.
이 꿈.
‘아니.’
이 기억에 대해서.
“…….”
문득 옆에 개어 둔 자신의 하녀복에 시선이 닿았다. 에슬린은 그 옷을 가져와 손에 쥐었다.
‘대체 생쥐가 돼서 뭘 하시려고요?’
‘당연히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이야길 엿들어야지. 아님 하녀로 변장이라도 해 볼까? 어때?’
그 옛날 디에리안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그땐 디에리안이 하도 질색하는 바람에 진실을 털어놓지 못했다.
실은 오래전에 하녀로 변장해 돌아다닌 적이 있다는 것을…….
자신의 시녀가 극구 말렸으나, 하녀 옷을 입고 궁을 몰래 빠져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변장은 그때 한 번뿐이고,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어.’
그럼 에르단의 그 말은 무엇일까?
‘예전에 네가 하녀로 변장하고 공작을 만났다고도 했던 것 같은데. 내 기억이 잘못된 건가?’
정말 에르단의 착각일까?
‘아니…….’
자신이 잊은 거다.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리페리우스 공작을 만난 것을…….
‘대체 난 뭘 잊고 있는 거지?’
에슬린은 가슴을 꾹 눌렀다. 답답했다. 베일을 쓰고 희뿌연 안개 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지금까지 테베트 리페리우스와는 별다른 접점이 없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어떤 형태로든 테베트와 에슬린은 접점이 있었고, 만남도 종종 이어 온 것 같았다.
그럼, 대체 그와는 무슨 관계였던 걸까?
‘사이가 좋은 것 같진 않았어.’
꿈속의 기억이 떠올랐다. 테베트는 어딘지 모르게 화가 나 있었고, 에슬린 또한 그런 그가 못마땅했다.
‘그래서 독배를 건넨 걸까? 사이가 틀어져서?’
할 수 있는 거라곤 추측이 전부였다. 손에 쥔 정보가 너무 빈약했다.
‘기억을 찾아야 해.’
베일을 찢고 안개를 몰아내야 한다. 그래야 이 모호함이 풀릴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기억을 이대로 기다려야만 하는 거야?’
그 물음에 대한 답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디에리안…….”
에슬린이 중얼거렸다.
지금 필요한 건 조금 까칠하고 이상한, 그녀의 마법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