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화
‘디에리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레실리아의 차를 만들며 에슬린은 생각했다.
은둔 중인 디에리안의 소식을 접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에르단에게 알아보라고 말했으나 큰 진전은 없었다.
‘오늘 밤에 다시 물어봐야겠어.’
둘은 재회한 이후 황녀궁에서 거의 매일 밤 만나고 있었다.
에르단은 에슬린을 제 궁으로 데려오기 위해 내일쯤 궁내부를 움직이겠다고 말했다.
에르단의 궁으로 옮기면 좀 더 본격적으로 디에리안을 찾아볼 생각이었다.
“차를 대령했습니다.”
에슬린은 레실리아 앞에 차를 내려놓았다.
레실리아는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리고 이마를 짚은 채였다. 창백한 안색이 딱 보기에도 좋지 않아 보였다.
“전하, 괜찮으십니까?”
메리사가 물었다.
유달리 레실리아의 불면증이 극에 달한 날이었다. 약으로는 해결이 되지 않아, 결국 아침부터 신전에서 사람을 호출해야만 했다.
“전하, 신전 마법사가 도착했다고 합니다.”
“들어오라고 해라.”
에슬린은 몸을 물리며 출입문 근처에 섰다. 하품이 나오려던 걸 억지로 참았다. 밤마다 에르단을 만나느라 그녀 또한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다.
“네, 전하. 그런데…….”
메리사가 말꼬리를 흐렸다.
“왜 그러지?”
“마법사가 오긴 왔는데요.”
“왜? 어느 마법사가 왔길래? 벨먼? 리에나?”
“둘 다 아닙니다.”
“그럼……”
그때 응접실 문이 벌컥 열렸다.
“대체 왜 바쁜 사람을 오라 가라 하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네. 하여튼 황족들이란.”
작은 투덜거림이 새어 나왔다. 문가 근처에 서 있던 에슬린만이 그 목소리를 똑똑히 들을 수 있었다.
뭐지…… 내가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보는 건가? 에슬린은 멍하게 시선을 들었다.
“황자비 전하를 뵙습니다.”
에슬린을 스쳐 지나간 마법사가 레실리아 앞에 건성으로 인사했다. 그 정체를 확인한 짙푸른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도대체 뭘 하다 온 건지, 대충 묶은 그의 진녹색 머리카락이 엉망이었다.
낡은 로브의 소매 끝은 까맣게 타들어 있었고, 허옇게 뜬 한쪽 볼엔 연한 검댕이 묻어 있었다.
‘디엘!’
에슬린은 속으로 외쳤다.
킁, 마법사가 무심하게 코를 한 번 울렸다.
“어디가 불편하신지요? 신전 마법사들은 다 소풍 나가고, 남은 마법사는 마나 폭발에 휘말려 앓아눕는 바람에 말입니다. 근처에 우연히 있던 운 나쁜 제가 대신 온 거니, 큰 기대는 마시고…….”
그가 투덜거렸다. 억지로 끌려온 사람처럼 온통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프레이 백작 영식?”
“그런 이름은 버린 지 오래입니다만.”
디에리안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가 머리를 벅벅 긁으며 신경질적으로 시선을 옮겼다. 실내를 크게 훑던 눈동자가 문득 한 곳에서 멈추었다.
문 앞에 서 있는 에슬린과 눈이 딱 마주쳤다.
“……?”
의문. 의심. 깨달음. 놀람. 경악.
실시간으로 변하는 그의 표정이 다채로웠다.
이윽고 귀신이라도 만난 사람처럼 디에리안이 입을 벌리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에슬린은 비스듬히 시선을 내렸다.
“그럼 그냥 마법사라고 부르면 되나?”
“네…… 뭐, 그러시죠…….”
디에리안이 홀린 듯 중얼거렸다.
그 순간이었다.
그가 더는 참지 못하겠다는 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잠시만요. 진짜 잠시만.”
마법사의 손끝이 살짝 퉁겨지고, 기묘한 감각이 실내를 메웠다.
“……!”
레실리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비단 레실리아뿐만이 아니었다. 이 응접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동상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실내의 풍경이 갑자기 무언가로 덧씌운 듯 왜곡되어 보였다. 눈앞에 얇은 크리스털 막이 있는 것 같았다.
“하아.”
디에리안이 숨을 토해 냈다. 갑작스러운 마법에 놀랄 틈도 주지 않고, 그가 단숨에 에슬린 앞에 와 섰다.
“이봐, 당신 여기서 대체 뭐 하는 거야?”
“마법사님.”
“각하는? 각하가 이 사실을 알아?”
그가 빠르게 몰아붙였다. 에슬린은 눈썹을 찡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몰라? 모르는구나? 모르네…… 아니, 몰랐던 거네. 아, 세상에. 그래서 귀환 파티를 수락한 거였어. 그것도 그 전쟁터에서 미친 속도로 돌아오면서까지.”
“마법사님, 여기서 함부로 마법을 쓰시면 안 돼요.”
“뭐? 내 말이 맞는다고?”
“아뇨, 마법 말이에요. 여기서 쓰시면 안 된다고요.”
“……아, 마법.”
디에리안은 그제야 제정신이 돌아온 듯했다. 그는 푸우우, 긴 호흡을 내뱉었다.
“괜찮아. 웬만한 신전 마법사들은 지금 다 외부에 뭔 마법진 구경 간다고 나갔으니까. 내 마법을 눈치챌 마법사가 쉽게 있을 리도 없고. ……그래서, 아무튼.”
디에리안이 삐딱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진짜 여기서 뭐 하는 건데?”
적갈색 눈동자가 에슬린을 취조하듯 샅샅이 훑었다. 이렇게까지 어쩔 줄 모르는 디에리안의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머금었다.
“뵙고 싶었어요. 이렇게 빨리 뵐 줄은 몰랐지만.”
“날? 왜?”
그의 눈썹이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다.
“왜…… 왜 그렇게 봐?”
뚫을 듯한 에슬린의 시선에 디에리안이 몸을 움츠렸다.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요.”
“부탁 같은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빨리 돌아가. 아니…… 그냥 여기 있어야 하는 건가? 뭐지? 어떻게 해야 해? 뭐야…… 나 지금 좀 그건가? 패닉? 나 괜찮아 보여?”
“전혀요.”
디에리안이 초조한 듯 손끝을 물었다. 중얼중얼, 그가 쉬지 않고 웅얼거렸으나 대부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이었다.
“마법사님.”
“왜 자꾸 그렇게 부르냐고.”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다니까요.”
“뭔데? 싫어. 그 악마랑 싸우라고 하지 마. 딱 봐도 내가 상대가 안 될 것처럼 보이잖아. 난 아직 죽기 싫단 말……”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에슬린이 폭주하는 그의 망상을 막았다. 디에리안은 입을 다물고 에슬린의 눈동자를 응시했다.
“그럼 대체 뭔데?”
“……기억 마법을.”
에슬린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때 못 걸었던 기억 마법을 걸어 주세요.”
“…….”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디에리안이 두어 걸음 뒤로 물러섰다. 까맣게 그을린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갑자기…… 왜?”
“기억을 되찾고 싶어요.”
에슬린은 단호하게 말했다.
지금껏 자신의 기억이 완전하다고 믿었으나, 이젠 아니었다.
빙의를 하며 기억이 흐트러졌다.
그것도 잊어서는 안 되는, 중요한 기억을 잊은 것 같았다.
“어떻게 해서든.”
“…….”
“기억을 찾고 싶어졌어요.”
디에리안에게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에슬린은 조심스럽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안 되나요?”
“타이밍 참…….”
그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안 그래도 그것 때문에 오늘 황궁에 온 참이었거든. 신전의 마법 화로가 필요해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던 그가 불쑥 품 안에 손을 넣었다. 그러곤 무언가를 꺼내 손에 쥐었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작은 유리병이었다.
“근데 이게 오늘 막 완성한, 아니 개선한 시제품이라 말이지.”
“상관없어요.”
“뭘 믿고?”
“디에리안 님의 마법이잖아요.”
그 말에 디에리안이 물끄러미 에슬린을 보았다. 묘한 표정이었다.
“정말 어떻게 돼도 난 몰라. 아무것도 기억 안 날 수 있다고.”
“알겠어요.”
그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약을 건넸다. 툭. 에슬린의 손 위로 유리병이 떨어졌다.
조금 따뜻한 기운이 느껴지는 게, 방금 완성했다는 건 거짓이 아닌 것 같았다.
“정확한 효능 효과는 나도 몰라. 진짜 시제품이거든.”
디에리안이 재차 덧붙였다.
“바로 기억이 돌아올지, 아니면 시간이 걸리는 건지도 알 수 없고. 기억이 다 돌아올지, 일부만 돌아올지 몰라. ……그래도 괜찮다면 자기 전에 마셔.”
“감사해요, 마법사님.”
“뭔가 기억나거든 날 찾고. 알겠지?”
“네.”
에슬린은 물약에 시선을 집중하며 대충 대답했다.
“꼭이야.”
디에리안이 한 번 더 강조했다.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신 없어 했지만, 대마법사 디에리안 프레이가 만든 물약이었다.
보나 마나 효과가 있을 것이었다. 설령 큰 효과가 없더라도 작은 실마리면 충분했다.
‘에르단의 궁으로 옮기게 되면 마셔야겠어.’
어떤 식으로 기억이 돌아올지 모르니, 최대한 안전한 곳에서 마시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결심했을 때였다.
콰앙!
“뭐야?”
엄청난 굉음과 함께 응접실 문짝이 날아갔다. 공간이 변화함에 따라 디에리안의 정지 마법 또한 깨졌다.
디에리안은 순간의 판단으로 몸을 움직여 에슬린의 앞을 막아섰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들이지?”
에슬린은 숨을 멈췄다.
노기 어린 목소리는 1황자 카르단의 것이었다.
뚜벅뚜벅. 그가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뒤를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사내가 뒤따랐다.
“화, 황자 전하?”
“이게 무슨?”
마법이 풀린 레실리아와 주변 사용인들이 웅성거렸다. 그러나 카르단의 시선은 오직 디에리안에게 고정된 채였다.
카르단은 에르단의 가든파티에서 보던 우스운 모습이 아니었다. 비열하고도 오만한 미소를 덧씌운 의기양양한 얼굴이었다.
“……뭐야, 언제 카르단에게 마법사가 붙었지?”
디에리안이 에슬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중얼거렸다. 의식하고 흘린 말은 아닌 것 같았다.
‘마법사?’
에슬린이 가늘게 뜬 눈으로 그를 보았다.
저자는…….
그때 마법사의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다. 에슬린은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저 뱀 같은 웃음을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이 마법사가 눈치채지 않았다면, 큰일 날 뻔하지 않았는가.”
카르단이 한 발자국 나서며 말했다.
“1황자 전하. 여긴 어쩐 일로?”
디에리안이 입술을 비틀며 말했다.
“그걸 나에게 묻나? 간덩이가 부었군, 프레이 백작 영식.”
그는 턱을 쓰다듬으며 덧붙였다.
“아니, 그냥 마법사 나부랭인가?”
즐거운 먹잇감을 찾은 듯, 카르단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때 뒤에서 마법사가 속삭였다.
“전하, 뒤에 웬 하녀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