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하녀?”
카르단이 눈썹을 찌푸렸다.
디에리안이 뭔가를 감추고 서 있는 게 그제야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디에리안의 어깨를 홱 잡아끌었다.
“하!”
카르단이 발작적으로 웃었다. 에슬린을 기억하는 눈치였다.
“너, 에르단궁의 하녀인 줄 알았는데…… 황자비궁의 하녀였군?”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황자비궁의 하녀가, 황녀의 측근이었던 마법사와 대체 무슨 관계인 거지? 에르단과는 또 무슨 관계고?”
빈정거리는 목소리였다.
카르단이 무슨 망상 회로를 돌리고 있을지 충분히 짐작되었다.
‘내가 첩자라고 생각하고 있겠지.’
멀리 경악으로 물든 레실리아의 얼굴이 보였다. 에슬린은 쿵쾅대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대꾸했다.
“그런 게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면?”
에슬린은 디에리안을 흘끔거렸다.
‘디엘이 곤란해져선 안 돼.’
카르단은 제 측근들을 괴롭히지 못해 안달 난 이였다. 그런 그에게 좋은 빌미를 제공한 셈이니, 지금은 어떻게든 불똥이 튀지 않도록 막아야 했다.
에슬린이 입을 열려던 참이었다.
“아니, 됐어. 말하지 마.”
갑자기 카르단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기분이 나빠졌어.”
그는 에슬린의 머리카락을 내려다보며 비식 웃었다.
“그냥 둘 다 처넣도록 해.”
더 볼 것도 없다는 말이었다. 에슬린은 당황해 눈만 깜빡였다.
“하녀와 마법사를 잡아라!”
시종이 명령했다. 그러자 밖에서 대기하던 황궁 기사들이 줄줄이 들어왔다. 그 틈에 아서스가 있었다.
“……!”
청록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아서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얼굴로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한 기사가 다가와 에슬린의 팔을 거칠게 붙들었다.
“아.”
그러자 반사적으로 아서스가 움직였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그가 에슬린을 빼앗듯 붙든 것이다.
“뭐야, 아서스?”
“하하, 선배. 제가, 제가 하겠습니다.”
아서스가 다른 기사를 향해 속삭였다. 에슬린의 팔을 쥔 손이 떨리고 있었다.
그때 카르단의 마법사가 움직였다.
“마법은 안 돼, 디에리안.”
“너 나 알아? 감히 누구한테 말을 걸어?”
디에리안은 순식간에 마법을 일으켜 카르단의 마법사를 구석 어딘가로 처박았다. 그러곤 다른 마법을 일으켰다.
“황녀의 마법사를 잡아!”
누군가 소리쳤다. 디에리안의 발밑에 푸른 마법진이 떠올라 있었다.
“이봐, 당신.”
디에리안이 에슬린을 불렀다.
마력 바람이 이는 탓에 기사들이 쉽게 그에게 접근하지 못했다. 에슬린은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난장판 속에서도 어쩐지 그의 목소리만큼은 선명하게 들렸다.
“미안해.”
까칠한 마법사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말뜻을 되새기기도 전이었다. 그는 푸른 마력과 함께 모습을 감췄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발 늦게 반응한 건 카르단이었다.
“젠장! 마법사를 잡아 와!”
“네!”
“하녀! 하녀부터 도망가지 않도록 잡아 처넣고!”
“네, 네네!”
“하녀까지 놓치면 다 죽여 버리겠다!”
카르단은 길길이 날뛰었다.
“일단…… 일단 죄송합니다, 하녀님.”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속삭였다. 그는 붙잡은 손에 힘을 주지 않으려 애를 쓰는 눈치였다.
에슬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도망칠 방법이 없었다.
끌려가는 내내, 에슬린은 정신을 다른 곳에 팔고 있었다.
‘몸수색을 당할 거야.’
옷 안쪽에 잘 숨겨 두긴 했지만, 디에리안이 준 유리병은 충분히 수상한 물건이었다. 들키면 뺏기는 게 당연했다.
‘안 돼.’
에슬린은 잠시 고민했다.
곧 1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앞둔 참이었다.
여기가 마지막 기회였다. 때마침 아서스의 손은 느슨하게 풀린 상태였다.
“어, 어?”
아서스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에슬린이 계단으로 몸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발을 헛디딘 척, 그녀는 일부러 넘어져 계단을 굴렀다.
“하녀님!”
“야! 저 하녀 잡아!”
뒤에서 아서스와 기사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데굴데굴 구른 에슬린은 층계참에서 멈추었다. 기사들의 시선을 등진 채, 재빨리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빠른 손놀림으로 품 안의 물약을 꺼내 마셨다.
부서질 것 같은 몸의 통증과는 별개로, 들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괜찮으십니까?”
“아서스! 도망치지 않게 잘 잡으라고!”
사색이 되어 뛰어 내려온 아서스가 에슬린을 살폈다.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빨리 안 내려오냐?”
아래에서 대기하고 있던 기사가 시퍼런 기색으로 소리쳤다. 아서스가 울상을 지으며 다시 에슬린을 붙들었다.
“진짜 죄송합니다. 차라리 쓰러진 척을 하시면 제가 업고서…….”
“전 괜찮아요.”
에슬린은 욱신거리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세웠다. 계단 층고가 높지 않아 크게 다치진 않았다.
다만 바닥을 잘못 짚었는지 왼쪽 손목이 시큰거릴 뿐이었다.
다시 연행이 시작되었다.
‘이제 어쩐다?’
촌각을 다투는 상황에, 대충 넘긴 물약의 맛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저 유리병을 건네던 디에리안의 얼굴만이 떠올랐다.
자신을 두고 혼자 도망간 건 잘한 선택이었다.
디에리안은 어찌 되었든 귀족이니, 이 자리만 잘 피하면 큰 화는 면할 것이다.
‘감옥이라니.’
에슬린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황궁의 감옥에 갇히게 되는 건 상상도 못 하던 일이었다.
예상대로 1층에서 몸수색을 받았다. 그리고 밧줄에 묶여 황궁의 가장 어두운 곳으로 끌려갔다.
* * *
“하녀님, 제가. 제가 꼭 구하러 오겠습니다.”
아서스는 이제 거의 반쯤 울고 있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손길을 억지로 거두며 에슬린을 간수에게 넘겼다. 에슬린은 별 기대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은 습했고, 더러웠다.
으아악!
어디선가 끔찍한 비명이 들렸다. 홀로 옥사에 갇히게 된 에슬린은 귀를 막았다.
“나와! 지금부터 심문할 거니까.”
간수 하나가 다가와 소리쳤다. 에슬린은 몸을 움찔 떨었다.
‘벌써?’
아직 혐의조차 확실치 않은 상황이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간수는 묵직한 꾸러미를 헤집으며 맞는 열쇠를 찾기 시작했다.
“나오긴 뭘 나와?”
그때 간수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인물이 있었다.
“뭐, 뭡니까, 간수장님?”
“저리 꺼져. 서쪽 감옥 죄수 놈들이 또 밥에 모래가 섞였네 어쩌네 난리더라.”
남자는 덩치가 몹시 크고, 턱수염이 수북하게 난 이였다. 울퉁불퉁한 팔의 근육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였다.
간수장보다는 산적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외모였다.
열쇠 꾸러미를 뒤지던 간수가 신경질적으로 뒤통수를 긁었다.
“아, 그놈들은 진짜. 죄수들인지, 식충이들인지.”
“거기나 지켜. 여기 심문은 내가 할 테니.”
“예? 간수장님께서요?”
“안 되냐? 모처럼 아리따운 아가씨와 단둘이 있을 기회인데.”
흐흐흐. 산적 같은 남자가 수염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에슬린은 눈썹을 구겼다.
“나 참. 간수장님도 참.”
열쇠 꾸러미를 건네며 간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간수장이라는 사람은 으하하 소리 내어 한 번 더 웃었다.
“작작 하십쇼. 저래 봬도 1황자 전하께 붙잡혀 온 간 큰 하녀니까요.”
“알았다, 알았어.”
질린다는 얼굴로 간수가 사라졌다.
간수장은 망설임 없이 열쇠를 찾아 자물쇠를 돌렸다. 철컥. 커다랗게 울리는 쇳소리에 에슬린이 몸을 움츠렸다.
여차하면…….
에슬린이 간수장의 허리에 매달린 검으로 시선을 옮겼을 때였다.
“에슬린 하녀님 맞으십니까?”
“……!”
간수장이 낯빛을 바꾸며 말했다.
능글거리며 웃던 변태는 어디 가고, 충성스러운 용병의 눈을 한 사내가 앞에 있었다.
남자는 커다란 덩치를 최대한 구기며 에슬린에게 속삭였다.
“저는 에르단 전하의 사람입니다.”
그 말에 에슬린의 눈이 커졌다.
“2황자님의 사람이라고요?”
“예.”
그가 흘끔 밖을 살피며 빠르게 말했다. 문득 며칠 전 에르단을 만나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에르단, 궁에 사람을 좀 심어 놓는 게 좋겠어.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서 말이야.’
황녀일 때와 다르다. 에슬린에게는 여차할 때 스스로 몸을 지킬 힘이 없었다.
사실 너무 과한 걱정인 건가 싶긴 했는데.
‘그렇다고 간수장을 매수하다니.’
간이 큰 게 에슬린인지 에르단인지 알 수 없었다.
“황자님이 내리신 지시는 뭐죠?”
“연보랏빛 머리에 짙은 파란색 눈동자를 한 하녀가 곤경에 처해 있거든, 반드시 도우라고요.”
에슬린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곤 작게 속삭였다.
“황자님과 연락을 취할 수 있나요?”
“물론입니다. 전언이라도 있으신가요?”
“네. 일단 제 상황을 알려 주시고, 부디 경거망동하지 마시라고 전해 주세요.”
에슬린의 말에 간수장은 의외라는 듯 눈을 빛냈다. 당장 구하러 와 달라고 말할 줄 알았다.
그러나 더 묻지는 않았다. 굳이 덧붙이진 않았지만, 에르단의 명령은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도우라.’였기에.
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다른 건요?”
“일단은 그것뿐이에요. 아, 혹시 저에 대해 내려온 지시는 있나요?”
“아직은 없습니다. 심문을 하라곤 했지만, 지금으로선 형식적인 거고요.”
어두운 감옥 안 불빛이라곤 벽에 붙은 램프 하나였다.
그 흐릿한 불빛 속에서 에슬린의 눈동자가 명료하게 반짝였다.
“좋아요. 그럼 지시가 내려오면 알려 줘요. 특히…….”
그녀는 목소리를 더 낮추었다.
“고문이나 즉살 명령이 떨어졌을 땐 바로요.”
“그런!”
간수장이 깜짝 놀라 소리친 뒤, 냉큼 주변을 살폈다. 다행히 들리진 않은 것 같았다.
그가 다시 몸을 낮춰 속삭였다.
“혐의가 특정되지도 않았는데 고문이나 처형을 하는 건 금지입니다.”
“하녀에게도 그럴까요?”
“그건…….”
“하급 하녀에게 혐의 하나 만들어 뒤집어씌우는 건 쉽겠죠. 어디 보자, 그럴싸한 죄목은…….”
에슬린이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황자비 시해 미수 정도겠네요.”
“……!”
간수장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눈앞의 얼굴은 차분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그제야 간수장의 머릿속에 의문이 끼어들었다.
이 하녀는 누구지?
“상대가 무모한 수를 둘수록 이쪽에 기회가 올 거예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내 말만 잘 전달해 줘요.”
나직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였다. 간수장은 홀린 듯 중얼거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어서 가 봐요. 의심받기 전에.”
에슬린이 가볍게 덧붙였다. 그러곤 지친 듯 감옥 벽에 기대앉았다.
“덮을 거라도 가져다드릴까요?”
간수장이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에슬린이 어이없다는 듯 코로 웃었다.
“저 죄수인데요?”
“아니, 식은땀을 흘리셔서…….”
“아.”
에슬린은 옅게 웃었다. 애써 웃는 입술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괜찮아요. 조금 피곤할 뿐이라…….”
속삭임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간수장은 뒷목을 긁적이며 감옥을 빠져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