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화
철컥.
다시 자물쇠를 잠그는 소리가 났다.
에슬린은 벽에 기대앉아 가물가물 흐려지는 시야를 바로잡으려 애썼다.
왼쪽 손목이 시큰거렸다. 그러나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물약 때문인가?’
자꾸만 잠이 몰아닥쳤다.
온몸에 기운이 빠져 사실 간수장과 대화할 때부터 다리가 풀리려던 걸 억지로 참았다.
에슬린은 긴 숨을 내뱉으며 눈을 감았다.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양팔로 부여잡았다.
그렇게 잠깐 눈을 감았을 때였다.
“에슬린, 에슬린.”
누군가 부르는 소리가 났다. 에슬린은 천 근처럼 느껴지는 눈꺼풀을 겨우 움직였다. 깨질 듯 머리가 아팠다.
“……에르단?”
그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채였다. 당황한 듯 서 있던 간수장이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에르단의 빛나던 눈동자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얼굴은 또 왜 그렇게 아파 보이고?”
그가 불안한 듯 까득까득 손톱을 물었다.
“여긴 왜 왔어?”
“지금 그걸 따질 때야? 그보다 큰일이야.”
에르단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 표정에서 에슬린은 다음 말을 예상할 수 있었다.
“왜? 나한테 황자비 시해 미수 혐의라도 씌운대?”
“어떻게 알았어?”
꽈악. 에르단이 쇠창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하얗고 곧은 손가락과 녹슨 창살의 대비가 선명했다.
“에슬린, 내 말 잘 들어. 이따 밤에 사람을 보낼게.”
“그게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야. 너도 알잖아? 카르단은 디에리안을 잡고 싶어 해. 널 미끼 삼아 증거를 만들어서라도, 디에리안을 끌어낼 거야.”
증거를 만든다……라. 에슬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날 고문할 생각인 거구나.”
“그래. 억지로 네 자백을 받아 내겠지.”
그렇게 말하며 에르단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내가 최대한 막아 보긴 하겠지만…… 알다시피 솔직히 나에겐 카르단에게 맞설 힘이 없어.”
“알아.”
에슬린이 짧게 대꾸했다.
레실리아와 결혼하며 황녀의 세력이었던 귀족들까지 흡수한 카르단은, 이 황궁에서 명실상부한 제1 권력자였다.
그런 그에게 에르단이 공식적으로 반발해 맞서기란 어려운 일일 터.
‘답답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언제까지 이렇게 모르는 채로, 당하는 채로만 있어야 하는 걸까?
예전이었다면.
황녀의 힘이 있었다면.
이런 모함쯤이야 쉽게 벗어날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에슬린은 생각을 털어 냈다. 만약을 가정하며 소모적인 감정에 빠져들고 싶지 않았다.
“에슬린, 걱정하지 마. 내가 널 꼭 지킬게. 그 정도는 할 수 있어.”
그렇다면 좋겠지만.
“아까 말한 것처럼, 이따 사람을 보낼게. 상황을 지켜보다 고문 명령이 떨어지면.”
“일단 도망치라고?”
“그래.”
또?
그렇게 되묻고 싶었으나 에슬린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솔직히 그가 말한 방법 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어 보였다.
피곤한 듯 숨을 몰아쉬는 에슬린을 보며, 에르단이 작게 혀를 찼다.
“근데 너…… 디에리안이 같이 있었다며? 디엘은 왜 널 혼자 두고 간 거야?”
못마땅함이 덕지덕지 묻은 말투였다. 에슬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디엘은 아직 내 정체를 몰라. 그를 탓하지 마.”
“응?”
에르단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아주 이상한 말을 들은 것처럼 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게 무슨 소리냐니?”
에슬린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 그러고 보니.’
갑자기 머리를 스치는 생각 하나가 있었다.
‘에르단은 내 소식을 대체 어떻게 듣고 온 걸까?’
간수장은 아직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대체 누가…… 에르단에게 소식을 전한 거지?
“아니, 디에리안이 보낸 마법 전서구에 분명히 적혀 있었거든.”
“뭐?”
문득 예감이 좋지 않았다. 돌이킬 수 없는 무언가가 다가오는 느낌이었다.
“자기가 다시 돌아올 때까지.”
그는 간격을 두고 덧붙였다.
“전하를 지켜 달라고 말이야.”
뭐라고?
“에슬린?”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에슬린은 희게 질린 얼굴로 중얼거렸다. 뒤에서 칼이라도 찔린 듯한 표정이었다.
“디엘이 내 정체를 알고 있었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야, 지금?”
“그래. 아니야?”
흔들리는 짙푸른 눈동자가 에르단을 향했다. 에르단 또한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전하, 그만 가셔야 합니다.”
그때 간수장이 다가왔다. 멀리서 다른 인기척들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에르단이 빠르게 덧붙였다.
“에슬린, 일단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 내가 반드시 널 무사히 꺼내 줄 테니까.”
그는 당부하듯 말하곤 간수장과 함께 사라졌다.
옥사에 앉은 에슬린은 그저 정신이 없을 뿐이었다
디에리안, 디에리안…….
자신의 마법사인 디에리안 프레이.
대체 언제부터?
‘내가 예전에 모시던 분하고 이름이 같아서 말이야.’
공작저에서 만난 그때부터였을까?
‘싫다는 사람에게 억지로 마법 걸 생각은 없어. 아무리 저 악마 공작이 협박해도 말이야.’
디에리안은 왜 그 머나먼 북부까지 온 걸까? 정말 테베트가 무서워서? 단지 그 이유 때문에?
그제야 인지하지 못했던 위화감들이 두꺼운 껍질을 벗고 드러났다.
‘……차가 달달하네. 꿀이 들어 있어.’
그는 그 취향을 어떻게 안 거냐고 묻지 않았다. 그저 차가 달다고 말했을 뿐, 혼자 찔려 변명하듯 말한 건 에슬린이었다.
‘게다가…….’
디에리안이 물약을 건네며 말했다.
‘이게 오늘 막 완성한, 아니 개선한 시제품이라 말이지.’
오늘 완성한 시제품.
그러니까 결국, 북부 공작저에 왔을 때 디에리안은 기억 마법을 완성하지 못한 상태였다는 말이다.
마법을 완성하지 못했음에도, 그 험한 북부까지 디에리안이 굳이 왔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렇게라도 와서 그가 만나고자 했던 사람.
“아…….”
에슬린이 머리를 쥐어 감쌌다. 뇌 속에 큰 망치가 있는 것 같았다.
또다시 북이 울렸다. 눈앞이 흐려졌다.
‘에슬린 베르타니아 황녀, 그대가 마실 독배를 가져왔다.’
수백 번, 수천 번은 곱씹었을 기억 속 공작의 싸늘한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왔다.
마디가 굵은 테베트의 손이 작은 고블릿 잔을 쥐고 있었다.
그가 에슬린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자, 물결이 찰랑이며 검은 액체 한 방울이 툭 튀어 올랐다.
에슬린은 그 모습을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자신은 명예 죽음을 허락받았다.
황제와 황후의 자비 아래, 공개 처형이 아닌 귀족 3인의 입회하에 조용히 이루어지는 고통 없는 죽음이었다.
그게 제 부모가 자신에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자비였음을 알았다.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
눈앞이 가물거렸다. 고통을 줄이기 위해 마취약을 먹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까지는 에슬린이 기억하고 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기억은 이상했다.
시야가 좀 더 넓었다.
때문에 테베트의 등 뒤에 서 있는 인물이 보였다.
‘디에리안…….’
그녀의 마법사는 몹시 슬픈 표정이었다.
에슬린의 시선에 디에리안이 표정을 꾸물꾸물 움직였다. 에슬린은 그게 그가 애써 웃으려 하는 거란 걸 깨달았다.
‘다 괜찮을 겁니다, 전하.’
낮게 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평소의 까칠한 말투가 아니었다.
에슬린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적갈색 눈동자에 거친 폭풍우가 일었다.
‘자, 황녀. 시간이다.’
앞에 선 악마 공작이 그렇게 말했다. 에슬린을 내려다보는 눈동자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반듯한 얼굴을 올려다보며 에슬린은 눈을 감았다.
둥, 둥. 멀리서 북소리가 났다. 그건 죽음의 소리였다.
‘가련한 아이야, 순리를 거스르려 하는구나.’
천둥과 같은 목소리가 떨어졌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만약 네가 우연히라도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기억을 찾게 된다면?
‘그땐 저 남자가 ──것이다.’
에슬린은 신경을 집중했다. 그러나.
둥, 둥, 둥.
‘들리지 않아.’
사위를 가득 메운 북소리 때문에 더는 알아듣기 어려웠다.
* * *
눈을 떴다.
사위가 어둡고 고요했다. 벽에 붙은 횃불은 이 공간의 유일한 빛이었다.
“…….”
에슬린은 감옥 내부를 느릿하게 훑었다.
벽 한쪽에 작게 난 창을 바라보았다. 바깥이 까만 걸 보니 어느새 깊은 밤인 것 같았다.
‘디에리안, 너는 대체.’
그날, 자신이 죽던 날.
그 장소에 디에리안이 있었다.
참을 수 없이 디에리안이 만나고 싶었다.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잊고 있던 진실에 닿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뭐였지?’
그건 난생처음 듣는 이의 것이었다. 그 또한 잊어버린 기억의 일부인 걸까?
“하녀님.”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니 붉은 머리카락의 기사가 보였다.
“기사님?”
에슬린이 잠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간수장이나 다른 간수들은 보이지 않았다.
‘에르단이 보낸다는 사람이, 아서스였나?’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에슬린은 몸을 일으켰다. 기사가 씩 웃었다.
“괜찮으십니까? 얼른 나오십시오.”
“나가다니…… 어디로요?”
“밖으로요. 제가 구해 드린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얼른요. 시간이 없습니다.”
묘하게 재촉하는 기색이었다.
“고문 명령이 내려온 건가요?”
“네, 당장 고문실로 이동하라는 명령이 나왔습니다. 도망치셔야 해요.”
결국.
에슬린은 주먹을 꽉 쥐었다.
고작 이런 일로 고문을 당할 수는 없었다. 에르단의 말대로 일단 몸을 숨기는 게 우선일 것이다.
“자. 오십시오, 하녀님.”
아서스가 말했다. 그는 어느새 옥사 문을 활짝 열어젖힌 채였다. 에슬린은 아서스의 얼굴을 보며 쇠창살 쪽으로 다가갔다.
……뭐지?
흐릿한 횃불에 흔들리는 얼굴이 왠지 모르게 낯설었다.
늘 밝은 햇살 아래에서 보던 얼굴을 이런 데서 봐서 그런가.
에슬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이쪽으로.”
그가 말했다. 지나치게 주변이 고요했다.
그 많던 간수들을 다 매수한 건가? 에르단이…… 그렇게까지 할 수 있었다고?
자꾸 이상한 불안감이 발끝을 타고 올라왔다.
“기사님.”
“네, 하녀님.”
“……제가 아는 아서스 기사님 맞으신 거죠?”
“…….”
꿈틀, 이름이 불리자 아서스의 눈썹이 순간 흔들렸다. 그가 덧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물론입니다, 하녀님. 자. 시간이 정말 없어요. 사람들이 오기 전에 얼른 가시죠.”
평소와 다름없는 웃음이었다. 에슬린은 쭈뼛쭈뼛 옥사 밖으로 빠져나갔다.
홱. 에슬린이 나가자마자 아서스가 그녀의 팔을 붙들었다. 황자비궁에서와는 다른 아주 강한 악력이었다.
“아파요, 기사님.”
에슬린이 작게 속삭였다.
아서스는 평온한 표정으로 에슬린을 바라보며 그저 웃을 뿐이었다.
‘아니야.’
어딘가 이상하다.
그는 저렇게 태연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치는 사람이 아니었다. 불안한 예감은 강렬한 직감을 불러일으켰다.
“당신…… 누구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