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화
에슬린이 뒤로 물러서며 물었다. 그러나 피가 통하지 않을 정도로 세게 팔이 붙잡힌 채였다.
“저라니까요, 아서스 녹턴.”
에슬린은 고개를 저었다.
“넌 기사님이 아니야.”
그의 손을 뿌리치고자 크게 팔을 휘둘렀다. 다행히 붙잡힌 팔은 빼낼 수 있었으나, 이번엔 양어깨를 잡혔다.
빙글. 아서스의 눈이 한 번 돌았다.
“하녀님, 하녀님, 하녀니임!”
그가 무서운 기세로 에슬린을 몰아세웠다. 몸이 속절없이 밀리며 등이 옥사 벽에 거칠게 닿았다.
“으윽.”
고통보다 먼저 소름이 올라왔다.
가까이에서 본 아서스의 눈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치 누군가에게 조종이라도 당하는 것처럼.
“구하러 왔다고요! 그냥, 좀, 잠자코, 따라오시면 안 되겠습니까?”
“대체 어디로……”
“당연히 고문실이죠! 당신을 지금부터 고문할 거니까요! 선생님께서!”
아서스가 미친 듯이 소리쳤다.
선생님?
에슬린은 눈을 찌푸렸다. 어깨를 잡은 손의 힘이 너무 강했다. 자칫 빠질 것 같았다.
“정 저를 따라가기 싫으시다면…….”
아서스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냥 여기서 할까요?”
그의 손이 에슬린의 목으로 스물스물 올라왔다. 에슬린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소리쳤다.
“아서스 경, 정신 차려요!”
그때 거짓말처럼 아서스의 손이 뚝 멈추었다.
깜빡, 깜빡. 그의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이윽고 그가 덜덜 손을 떨었다. 표정이 일그러졌다.
마치 내면의 무언가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는 것처럼.
“이…… 미친, 놈아.”
억눌린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허억, 허억. 거친 숨이 터져 나옴과 동시였다.
“하녀님께……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퍼억. 아서스는 떨리는 주먹을 들어 그대로 자기 얼굴에 날렸다.
그의 코에서 후두둑 피가 쏟아져 내렸다.
“하, 하녀님.”
“아서스 경, 괜찮아요?”
그제야 탁하던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바닥에 쓰러진 아서스를 에슬린이 재빨리 부축했다.
“얼른, 얼른 도망가십시오. 제가 어디에 좀 홀렸나 봅니다. 고문 명령이 떨어진 건 진짜니까, 사람들이 오기 전에 빨리…….”
그가 횡설수설 말했다. 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함께 가 드리고 싶지만, 저도 지금 좀 혼란스러워서…… 제가 또다시 하녀님께 상처를 입힐까 봐…….”
아서스는 덜덜 떨리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때, 멀리서 여러 사람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요! 하녀님! 어디 숨기라도 하십시오!”
그가 다급하게 속삭였다.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서스 경, 이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은혜라뇨. 저는 하녀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절 구한 건 아서스 경이에요. 언젠가…… 언젠가 이 은혜는 꼭 갚을게요.”
“……하녀님.”
아서스는 이별을 예감했다. 그의 눈이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저벅, 저벅.
발걸음 소리가 가까워졌다.
아서스가 몸을 움직여 자신의 로브를 벗어 에슬린에게 둘러 주었다. 작은 단도를 건네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가 하녀님께 좋아한다고 말씀드렸나요?”
희미하게 웃으며 아서스가 말했다. 왠지 모르게 자꾸만 잠이 오는 것 같았다.
“가십시오. 저 사람들은 제가 여기 잡아 둘 테니.”
“……정말 고마워요. 다음에 꼭 다시 만나요.”
에슬린은 짧게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그대로 뛰어나가려다 문득 떠올라 빠르게 속삭였다.
“그 몸에 또다시 이상이 생긴다면, 마법사 디에리안 프레이를 찾아가 보도록 해요.”
“디에리안 프레이?”
“에슬린이 보냈다고 말하면 알 거예요.”
그 말을 끝으로 에슬린은 달렸다.
아서스가 들어온 길을 따라 빠져나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서스의 작품인 건지, 뭔진 모르겠지만 간수들과 문지기들이 모두 잠들어 있었다.
‘아서스 경이 타고 온 말이 있을 거야.’
에슬린은 어렵지 않게 그 말을 발견했다.
‘그리고 이 근처에 비밀 문이 있었는데.’
황궁 구조라면 눈 감고도 외울 수 있었다. 에슬린은 빠르게 말을 이끌었다.
다그닥거리는 말발굽 소리가 어둠을 갈랐다.
비밀 통로 입구에 거의 다다랐을 때였다.
“죄수를 잡아라!”
횃불이 올라가며 간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에슬린은 재빨리 말에 올라탔다.
“가자!”
에슬린은 크게 고삐를 휘둘렀다. 말이 크게 울며 앞으로 튀어 나갔다.
저기 있다! 가까운 곳에 있던 병사들이 에슬린을 쫓았다. 그러나 그들은 말을 타고 있지 않았다.
“잡아! 죄수가 도망친다!”
순식간에 황궁이 어수선해졌다. 에슬린은 수풀을 헤치며 저 멀리 보이는 낡은 나무문을 향해 달렸다.
히이잉! 말이 크게 울며 몸을 일으켰다.
쾅!
말은 엄청난 기세로 낡다 못해 썩어 들어가는 문을 힘차게 걷어찼다.
에르단과 수백 번은 오갔던 비밀 문이었다. 황궁 밖으로 이어지는.
황궁 밖으로 내달렸다.
달 하나 뜨지 않은 어두운 밤이었다.
‘또다시 카르단에게 질 생각은 없어.’
에슬린은 생각했다.
일단 디에리안을 만나야 했다. 감옥에서 꾼 꿈이 생생했다.
‘디에리안이 독배에 무슨 짓을 한 게 분명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벌써 추적대가 따라붙은 것이었다.
에슬린은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승마는 에슬린의 특기였다.
‘진실을 알아야겠어.’
등 뒤로 화려한 황궁이 멀어졌다.
황녀로 태어나, 하녀로 돌아갔던 곳. 제 가족인 에르단을 만나기 위해서.
저곳으로 다시 돌아갈 일이 있을까? 그렇다면 그땐, 과연 무엇을 위해서일까?
“방향을 튼다! 숲 쪽이야!”
쿵쾅대는 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그게 자신을 쫓는 말발굽 소리인지, 제 심장 소리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먹구름이 가득한 하늘이었다. 에슬린은 거친 숲길을 내달렸다.
오른편에 있는 절벽 아래 세하즈강이 흐르는 소리가 났다.
물 냄새가 나는 것 같았는데 강물 냄새라기보단 비 냄새에 가까웠다.
‘비가 오면 안 되는데.’
땅이 질척해지면 속도가 느려진다. 에슬린은 고삐를 움켜쥐며 속력을 높였다.
“하아, 하아.”
숨이 거칠어졌다. 뒤에서 쫓아오는 추격자들 또한 속도를 높였다.
다그닥 다그닥!
지진처럼 땅이 울렸다. 그러나 에슬린은 망설임 없이 나아갔다.
그들은 숙련된 기사들이었다.
에슬린이 그 노련함을 따라갈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나 이 길은 그녀가 잘 아는 길이었다.
프레이 백작령으로 향하는 길.
‘디에리안은 백작령에 갔을 거야.’
백작령은 수도에서 그다지 멀지 않았다.
쇄애액! 퍽!
뒤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척척하게 젖어 드는 바닥에 내리박히는 소리가 선득했다.
에슬린은 움칠 몸을 떨었다.
그러나 화살은 말의 옆이 아닌 뒤에 꽂혔다. 그건 아직 그녀를 충분히 따라잡지 못했다는 의미였다.
‘더, 더 빨리…….’
에슬린은 한 번 더 채찍질하며 말을 재촉했다.
“히이잉!”
말이 크게 울며 속력을 높였다. 에슬린이 몸을 낮추었다.
쫓아오는 말발굽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모든 풍경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 눈 하나 깜빡할 수 없었다.
“젠장, 따라잡을 수 없어!”
문득 그런 외침이 들린 것도 같았다.
그때 에슬린의 콧잔등 위로 물방울 하나가 툭 떨어졌다.
‘비라니.’
미간을 구겼다.
비는 좋지 않았다. 진흙밭에 말발굽이 빠지면 속도가 느려진다.
게다가 자칫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옆은 절벽이라고!”
병사들의 외침이 들려왔다.
빗방울은 하나둘 숫자를 더하더니, 곧 빠르게 내리기 시작했다. 시야를 가릴 만큼의 장대비는 아니었으나, 옷을 적실 만큼의 양은 되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가면…….’
에슬린은 이를 악물었다.
앞으로 조금만 달리면 이 추적자들을 떨어낼 수 있을 터였다.
에슬린이 알기로, 이 앞에 몹시 갑작스럽게 끊어지는 길이 있었다.
짧은 절벽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초행자들은 곧잘 그 절벽에 발을 헛디디고, 세하즈강의 제물이 되곤 했다.
하물며 지금은 달빛 하나 없는 밤이었다.
‘절벽만 잘 넘는다면, 추적자를 떨칠 수 있어.’
다그닥, 다그닥!
에슬린은 쉴 새 없이 말을 몰았다. 축축이 젖은 흙냄새가 올라왔다. 비에 젖은 로브가 무겁게 늘어졌다.
그러나 멈출 수 없었다.
에슬린은 가만히 주변을 가늠해 보았다. 익숙한 나무나 바위 같은 것들이 번개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곧이었다.
이를 악물었다. 이 정도 속도로 여길 달린 건 처음이었으니, 솔직히 반쯤은 운에 맡긴 채였다.
‘지금이야!’
고삐를 힘차게 쥐어 당겼다. 말이 크게 도약했다.
절벽은 갑작스러울 뿐, 틈이 그리 넓지는 않았다. 신중히 움직이기만 하면 분명 빠지지 않으리라.
철벅, 타악.
에슬린은 막힌 숨을 토해 내었다.
“히이이잉!”
무사히 다음 땅을 밟은 말이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크게 울었다.
“으악!”
뒤에서 끔찍한 비명이 들려옴과 동시였다.
“후우우…….”
에슬린은 한 번 더 크게 숨을 내뱉었다. 그리고 바로 말을 몰아 달렸다. 굳이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뒤를 쫓는 말발굽 소리가 멀어졌다. 이대로 순조롭게 추격에서 벗어나나 싶은 순간.
쩌저저적.
달리던 땅이 엄청난 소리를 내며 갈라졌다.
말이 크게 울며 앞발을 들었다.
“……!”
순간 절벽 쪽으로 미끄러질 뻔했다.
에슬린은 고삐를 움직여 말을 진정시켰다. 말에서 떨어지지 않기 위해 온 힘을 주어야만 했다.
“윽.”
왼쪽 손목이 시큰거려 신음이 샜다.
“추적 마법사?”
에슬린은 가늘게 눈을 좁혔다.
황궁의 추적 마법사까지 쫓아오다니.
황궁 로브를 입은 마법사 몇이 말 위에 앉아 있었다. 그들은 마법으로 말을 조종해 온 듯싶었다. 말의 눈동자가 푸르게 물들어 있었다.
“자, 이제 넌 독 안에 든 쥐나 다름없다.”
에슬린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설상가상으로 운 좋게 절벽을 넘은 기사 서넛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다.
“어떻게 할까요?”
누군가 마법사에게 그렇게 물었다.
“살려서 데려오라고 하셨지만, 뭐…….”
마법사는 무뚝뚝하게 말했다.
“꼭 멀쩡한 채일 필요는 없지.”
그 말에 기사가 활시위를 팽팽하게 당기는 소리가 났다.
에슬린은 재빨리 말고삐를 잡아 방향을 돌렸다. 도망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등 뒤에서 쇄도하는 화살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약해지는 빗줄기를 가르고 화살이 달려들었다.
억울했다.
또 이대로 죽어야만 하는 걸까?
이제 겨우 실마리를 잡았는데.
이제 겨우 진실에 닿게 되는 줄 알았는데!
그때 에슬린의 옆으로 돌풍이 스쳐 지나갔다.
“몸을 숙여요.”
나직한 음성과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