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화
타다닥.
목표를 잃은 화살들이 날카로운 무언가에 쪼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
그녀는 발작처럼 몸을 돌렸다.
에슬린이 돌아보는 잠깐의 시간조차 그에게는 충분한 것이었다.
“으아악!”
비명이 난무했다. 은빛 칼날이 어둠을 가르고, 순식간에 피비린내가 피어올랐다.
툭, 툭, 툭. 묵직한 뭔가가 젖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위험을 감지한 마법사가 재빨리 마법 실드를 펼쳐 방어했다. 그러나 말에서 굴러떨어진 그는 제 한 몸 구하는 것만으로도 겨우였다.
“감히.”
모든 것을 얼려 버릴 듯한 싸늘한 목소리가 주변을 메웠다.
“누구에게 활을 겨누는 거지?”
목을 긁는 듯한 짐승의 목소리였다.
에슬린은 가까스로 초점을 맞추었다.
서서히 비가 잦아들었다. 구름이 움직이고, 희미한 달빛이 모습을 드러냈다.
눈앞에 태산처럼 커다란 검은 등이 있었다.
“리페리우스 공작 각하?”
바닥을 구르던 마법사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주변에 흩어진 기사들의 목을 확인하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저, 저희한테 왜 이러시는 겁니까? 그 하녀를 잡아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1황자 전하께요. 그러니 실례가 안 된다면……”
“말이 많아.”
단단한 등이 크게 움직였다. 그가 품 안에서 꺼낸 단검을 망설임 없이 내다 꽂았다.
푹! 무언가에 박히는 소리가 선득했다.
“…….”
이후 남자는 천천히 말 머리를 돌렸다.
그는 검은 망토를 두른 채였다. 비를 맞아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 얼굴이 모두 드러나 있었다.
유달리 눈동자가 선명하게 보였다.
붉은 기 도는 검은 눈동자. 차갑게 가라앉은…… 에슬린을 꼼꼼하게 살피는 그 눈동자.
“이리로 오십시오. 위험합니다.”
그가, 테베트가 에슬린에게로 손을 뻗었다. 막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기사는 평소보다 크고 단단해 보였으며, 어딘지 모르게 위험한 기색이 일었다.
“손을 잡아요.”
에슬린은 멍하게 테베트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그는 초조한 듯 한 번 더 말을 덧붙였다.
“제발.”
그러자 에슬린이 홀린 듯 손을 움직였다.
그와 동시였다.
쩌저저적!
갈라져 있던 대지가 불안한 소리를 내며 한 번 더 꿈틀거렸다.
에슬린은 무심코 옆을 바라보았다. 이대로라면 이 지반이 무너질 터였다.
여기가 무너진다면 그다음은.
죽음처럼 흐르는 세하즈강의 물살이 눈앞에 보이는 듯했다.
“에시!”
테베트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그녀의 말이 딛고 선 지반이 크게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테베트는 말을 움직여 재빨리 에슬린에게 다가갔다. 쏜살같은 속도로 순식간에 그녀의 허리를 낚아챘다.
자신의 품 안에 에슬린을 보호하고, 고삐를 움켜쥐었다.
쿠구궁!
지면이 흔들렸다. 박차고 앞으로 나가려던 테베트의 말이 기우뚱 옆으로 쓰러졌다.
바닥이 빠르게 무너지기 시작한 것이었다. 본능적으로 틀렸다는 생각이 들었다.
“테베트 경!”
에슬린이 비명처럼 소리쳤다. 그 목소리 하나에 테베트의 팔에 힘이 꾹 들어갔다.
이윽고 그가 한 손으로 쥐고 있던 고삐를 놓았다. 제 몸을 방패 삼아 에슬린을 온전히 감싸 안았다.
“걱정하지 말아요.”
쿠우웅! 굉음이 울렸다.
절벽이 무너지는 소리였다. 순식간에 모든 것들이 중력을 거스르지 못하고 빨려 들어갔다.
아래로, 저 아래로.
검은 불길처럼 치솟는 세하즈강의 품속으로.
“하아.”
테베트가 품에 안은 에슬린을 단단히 고정했다. 그녀의 향기가 훅 코끝을 파고들었다.
그 와중에도 그게 좋아 미칠 것 같았다. 처음으로 숨 쉬는 법을 배운 사람처럼, 그는 깊게 그녀의 목덜미를 길게 흡입했다.
떨어지는 순간이 마치 천 년처럼 느껴졌다.
“흐읏.”
품 안의 에슬린이 두려운 듯 소리를 내었다.
그는 그녀의 머리를 소중하게 감싸 쥐었다. 두려웠지만, 두렵지 않았다.
티끌 하나 다치지 않게 할 것이다. 이제 절대 놓지 않을 것이다.
시간의 흐름은 순식간에 돌아왔다.
풍덩! 큰 충격이 몸에 전해지고, 잡아먹을 듯한 물살이 온몸을 휘감았다.
그러나 테베트는 차라리 좋았다.
이 온기가, 이 숨결이. 그토록 갈망하고 찾아 헤매던 에슬린이 제 품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어 있던 손이 비로소 가득 찬 기분이었다.
* * *
에슬린은 눈을 떴다.
온몸이 무겁게 축 늘어졌다. 눈꺼풀을 드는 게 고작이었다.
하아. 내뱉는 숨이 뜨거웠다.
가까스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으니 불덩이 같아 스스로 놀랄 정도였다.
‘여긴 어디지……?’
에슬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어둠이 내려 잘 보이지 않았다.
열에 달뜬 눈 때문인지 시야가 울렁거려 어지러웠다.
‘납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카르단의 짓인가?’
에슬린은 입 안 살을 깨물었다.
그러나 크게 두렵지는 않았다.
디에리안이든 젝스 경이든 로하르트든.
자신이 없어진 걸 안 측근들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들은 무능하지 않으니 곧 저를 찾아내겠지.
하지만 이 움직일 수 없는 몸이 문제였다.
‘발견되기 전까지 무사하면 좋으련만. 적어도 목숨이 붙어 있기만 한다면…….’
에슬린은 냉정하게 생각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문이 거칠게 열렸다.
“어디 꼭꼭 숨겨 뒀나 했더니.”
훅 피 냄새가 끼쳐 왔다. 에슬린은 미간을 구긴 채 어둠 속에 드러난 인영을 응시했다.
빠르고 묵직한 발걸음 소리가 바닥을 울렸다. 스으윽. 뭔가가 끌리는 소리는 그다음이었다.
흔들리는 시야를 맞추자, 일렁이는 붉은 눈동자와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괜찮으십니까, 전하?”
남자가 물었다. 에슬린의 얼굴을 보며 그는 빠득 이를 갈았다. 검집에 검을 집어넣은 뒤 다른 손에 쥐고 있던 것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에슬린은 바닥으로 시선을 옮겼다.
가슴을 검에 꿰뚫린 시체가 눈에 들어왔다. 에슬린을 이곳으로 끌고 온 범인이었다.
“테, 테베트 경?”
“네.”
테베트가 단숨에 거리를 좁혔다. 창백한 얼굴을 샅샅이 살피던 남자가 거칠게 욕을 내뱉었다.
“제기랄. 상태가 왜 이래요?”
“경이 여긴 어떻게…… 콜록, 콜록!”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갑자기 피비린내가 훅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부릅뜬 시체의 노란 눈동자와 마주쳤다. 경악에 물든 눈빛을 보니,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깨닫기도 전에 즉사한 것 같았다.
“말하지 말아요.”
테베트가 에슬린을 침대에 기대어 앉혔다. 험악한 표정과 달리 손길은 몹시 조심스러웠다.
그는 제 망토를 벗어 떨리는 어깨에 둘러 주었다.
“대체 어떻게 날 찾은 거죠……?”
“그게 중요합니까?”
“…….”
“대체 제대로 된 호위도 없이 황궁을 왜 나오신 겁니까.”
폭풍전야 같은 고요한 분노가 느껴졌다.
“번화가에서 갑자기 사라지셨다는 소릴 듣고 얼마나, 얼마나 놀랐는지…….”
망토 자락을 쥔 테베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에슬린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떨리는 한숨이 터져 나왔다.
“걱정시켜 미안해요. 나는…….”
에슬린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지친 기색이 역력한 작은 목소리에 테베트가 미간을 구겼다.
“겨울 포도를 재배하는 데 성공해서…… 경에게 빨리 보여 주고 싶은 마음에.”
“부르셨으면 당연히 만나러 갔을 겁니다.”
그가 단호한 낯으로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그 말에 에슬린은 애매한 듯 웃었다.
“글쎄…… 나한테 화가 났었잖아요.”
테베트가 찾아왔던 그 새벽. 팽팽하게 기 싸움 하던 기억이 선명했다.
테베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제가 감히 어떻게 전하께 화를 냅니까.”
지금도 화내고 있으면서.
에슬린은 속으로 웃었다.
“그보다, 저 마법사 놈이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요.”
그가 으르렁거렸다.
“제 움직임을 막으려고 독을 쓴 것 같아요.”
“그리고?”
“……그 외엔, 아무것도요. 게다가 이미 죽었잖아요.”
“시체라도 한 번 더 죽일 수 있습니다.”
에슬린은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기운이 빠져 더는 말할 힘도 없었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테베트가 물었다. 그러나 딱히 대답을 기대한 물음은 아닌 듯했다.
“조금만 참아요.”
테베트는 망토째 그녀를 안아 올렸다.
석벽보다 단단한 그의 어깨에 저절로 머리가 기대어졌다. 쿵쿵.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가까웠다.
“이번 마물 전쟁 때…… 디에리안을 내주지 못해 미안해요.”
에슬린은 그 심장 소리를 들으며 한숨처럼 말했다. 걸음을 옮기던 테베트가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됐습니다. 더 말하지 말아요.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얼굴이니까.”
아까보다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에슬린은 혼곤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숨을 내쉬었다.
테베트와는 종종 티격태격하긴 했지만, 이번처럼 길게 얼굴을 보지 못한 건 처음이었다.
물론 그가 마물 전쟁에 나가느라 그랬던 것이었으나, 전쟁에서 돌아오고 난 뒤로도 테베트는 에슬린을 찾아오지 않았다.
에슬린은 변명하듯 말을 덧붙였다.
“이번 전쟁에 디엘이 필요하다는 이유가 납득되지 않았어요. 제가 납득하지 못하는 위험한 곳에 제 소중한 사람을 내보낼 수는……”
“소중한 사람.”
다시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에슬린은 가물가물 감기려던 눈을 떠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뚜벅, 뚜벅.
어느새 테베트는 바깥을 걷고 있었다. 은은한 달빛 아래 그의 얼굴이 시리게 빛났다.
“제 속을 다시 뒤집어 놓을 생각이 아니라면, 제발, 조용히 주무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에슬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나 곧 다시 그를 불렀다.
“테베트 경.”
“조용히 주무시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내 사람이 될 생각은 없어요?”
우뚝. 망설임 없이 뻗어 나가던 그의 걸음이 멈추었다.
테베트가 고개를 내려 에슬린을 보았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제기랄. 또 저 눈이지.
테베트는 속으로 욕을 삼켰다.
제가 무슨 소리를 한 줄도 모르고, 호수처럼 깊고 푸른 눈동자는 그저 고요하기만 했다.
“없습니다.”
“당신이 리페리우스라서?”
그렇게 되묻는 에슬린은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이기까지 했다.
그 얼굴을 보며 테베트는 설핏 웃었다.
“더 설명이 필요합니까?”
에슬린은 눈을 감았다.
* * *
눈을 떴다.
풀벌레 우는 소리가 났다. 주변은 온통 어둠이었다.
세하즈강의 거센 물결 소리가 귓전에 울렸다.
‘나는…….’
에슬린은 까만 어둠을 보며 되찾은 기억을 더듬었다.
‘테베트 경을…….’
뜨거운 눈물이 급격히 차올랐다.
대체 내가 뭘 잊고 있는 걸까?
나는 왜 당신을 까맣게 지워 버린 거지?
‘좋아했어.’
아득한 기분이 들었다.
잊은 줄도 모르고 있었던 마음이 왈칵 쏟아져 내린 건 한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