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화
“으윽.”
에슬린은 몸을 반쯤 일으켰다. 축축이 젖은 옷 때문에 쉽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니 세하즈강의 검은 물결이 넘실거리는 게 보였다. 물살이 강하지 않은 걸 보니, 하류 어딘가까지 흘러내려 온 듯싶었다.
무심코 왼손으로 바닥을 짚다 찌를 듯한 통증에 신음을 삼켰다.
천천히 두 다리를 딛고 섰다. 손목이 아프고 온몸이 욱신거렸으나,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
그제야 바로 근처에 쓰러져 있는 인물이 눈에 들어왔다. 그의 숨을 확인하기 위해 단숨에 몸을 숙였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쿵쿵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차갑게 식은 피가 다시 도는 느낌이었다.
“하아.”
탈력감이 몰려와 에슬린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는…….’
거칠게 눈을 비벼 닦았다.
‘대체 왜 당신을 잊고 있었던 걸까……?’
눈앞의 남자는, 그때보다 더 성숙해진 얼굴이었다.
새파란 달빛 아래, 자신을 안고 묵묵히 걸음을 옮기던 단단한 얼굴이 떠올랐다.
테베트 리페리우스.
어디에도 기울지 않는 리페리우스의 천칭을 짊어진 남자.
그리고 그 천칭에 자신을 올려 주길 바라던 제 선명한 마음이 기억났다.
‘대체 왜?’
당신에 관한 기억을 모두 잊은 거지?
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당신은 왜…….’
나에게 독배를 건넨 거고?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러나 더 떠오르는 기억은 없었다.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젖은 옷이 몸에 달라붙으며 심한 한기가 느껴졌다.
‘일단 지금은…… 여길 벗어나는 게 먼저야.’
에슬린은 고개를 흔들어 생각을 털어 냈다.
추적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 거기다 아직도 눈을 뜨지 않는 테베트 또한 걱정이었다.
“테베트 경.”
죽은 듯 눈을 감고 있는 남자를 깨웠다. 그러나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불길한 예감이 전신을 타고 올라왔다.
“일어나 봐요, 테베트 경.”
에슬린은 한 번 더 그를 흔들었다. 약하지 않은 강도였으나, 꽉 닫힌 눈은 움직이지 않았다.
문득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에슬린은 까맣게 젖은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손이 축축한 게 물 때문인 줄 알았는데.
손을 들어 냄새를 맡자, 지독한 피 냄새가 올라왔다. 삽시간에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테베트 경!”
에슬린이 소리쳤다.
‘이게, 대체 무슨 피지?’
멀쩡한 에슬린과 달리 그의 온몸은 찢기고 멍들어 있었다. 특히 상체를 가로지른 상처가 심해 보였다.
그러나 절벽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라고 하기엔 뭔가가 이상했다.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에 입은 상처 같은데…… 아.’
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절벽에서 떨어지기 전이라면, 전쟁터에서 입은 상처일 것이다.
‘부상이 회복되지도 않았는데 말을 달리다니.’
거기다 저를 안은 채 세하즈강의 절벽을…….
아찔한 감각이 목뒤를 내달렸다. 에슬린은 고개를 흔들었다.
“안 돼. 이대로라면.”
파랗게 질려 가는 테베트의 입술을 보며 에슬린이 중얼거렸다.
어떻게든 그를 옮겨 보려 애를 썼지만, 바위보다 무거운 그의 몸은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거기 누구십니까?”
어둠 속에서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에슬린은 숨을 죽였다.
추적자인가?
온몸의 솜털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그녀는 테베트를 가리듯 몸을 숙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발자국은 천천히 가까워졌다. 희미하게 불을 밝힌 램프를 든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게 무슨……?”
“제, 젝스 경?”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쳤다.
흐릿한 불빛에 드러난 얼굴은 절대 모를 리 없는 사람의 것이었다.
그러나 상대는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누구냐? 어떻게 날 알지?”
남자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은빛 칼날이 망설임 없이 에슬린의 목덜미를 향했다. 그 차가운 감각에 그녀는 입술을 떨었다.
“말해라. 넌 누구냐?”
“그건…….”
에슬린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곳에서 제 호위 기사였던 젝스를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에슬린이 말을 고르던 그때였다.
“테베트 경!”
새된 비명이 튀어 나갔다.
죽은 듯 누워 있던 남자가 에슬린을 겨눈 칼날을 맨손으로 움켜쥔 것이었다. 어찌나 세게 잡았는지 젝스가 힘주어 빼내려 해도 움직이지 않았다.
주르륵. 피가 흘렀다.
에슬린은 기함하여 테베트를 바라보았다. 상체만 겨우 일으킨 남자의 눈엔 초점이 없었다. 에슬린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그는 정신이 든 게 아니었다.
“테베트 경, 난 괜찮아요.”
울음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에슬린이 말했다. 그는 눈동자만 굴려 그녀의 얼굴을 보았다.
“이 사람은 날 해치지 않아요. 안심해요.”
에슬린이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테베트는 무의식적으로도 에슬린의 얼굴을 훑는 듯했다.
풀썩. 단단한 몸에 힘이 풀린 건 순식간이었다.
에슬린은 그의 상체를 받아 들었다. 엉망으로 짓이겨진 손바닥이 마음 아팠다.
“……리페리우스 공작 각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는 검을 거두었다. 설명이 필요하다는 듯한 눈동자가 에슬린을 향했다.
“젝스 경.”
에슬린은 그 잿빛 눈동자를 보며 말했다.
작은 부름 하나에 덩치 큰 남자가 든 램프가 크게 요동쳤다.
그는 대륙 너머의 사람이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와 잿빛 눈동자, 유달리 큰 덩치 같은 것들이 그 증거였다.
에슬린은 떨리는 입술로 말했다.
그녀의 충직한 호위 기사였던 남자에게.
“나야, 에슬린.”
철거덕. 남자가 바닥에 검을 떨어뜨렸다.
“8년 전, 남부의 노예 시장에서.”
그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커다란 덩치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내가 당신을 구했잖아. 기억 안 나?”
남자가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았다.
늘 무뚝뚝하던 우직한 기사의 얼굴이 천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 * *
“…….”
남자는 말없이 벽난로에 장작을 던졌다. 여름이 가까워 오는 날씨였으나 이곳의 밤은 이상하게 추웠다.
“젝스 경.”
곰처럼 커다란 사내의 등이 움찔했다.
에슬린은 뜨거운 물이 담긴 머그잔을 바라보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고 있었다.
남자가 천천히 에슬린을 향해 몸을 돌렸다. 흘끔흘끔 에슬린의 얼굴을 살피는 눈동자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듯했다.
“잘 지냈어? 는…… 아닌 것 같네.”
에슬린은 작은 오두막을 둘러보았다.
다 쓰러져 가는 집은 침실 하나 있는 게 고작이었다. 게다가 생활 감각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제대로 된 음식도, 하물며 그 흔한 찻잎 하나도 없었다.
젝스가 벽난로에 불을 붙이지 않았더라면, 에슬린은 분명 이곳을 폐허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대,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전 도저히…….”
남자가 머리를 쥐며 의자에 앉았다.
에슬린은 테베트를 눕혀 놓은 침실 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방금 얘기한 대로야. 난 죽지 않았고, 이 하녀의 몸에 빙의된 채 눈을 떴어.”
“그런 걸…….”
믿을 수 있을 리가. 젝스가 혼란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우직한 남자였다. 요령 같은 건 피울 줄 모르는.
에슬린은 곤란한 표정으로 볼을 긁으며 웃었다.
“알아. 믿기 어렵겠지. 젝스 경하고는 둘만 아는 추억이 많지 않아서 곤란하네.”
컵을 들어 따뜻한 물을 마시자 푹 젖은 몸이 조금 데워졌다.
“그래, 맥시.”
문득 생각나 말했다. 그러자 곰 같은 사내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맥시를 기억해? 젝스 경이 보살피던 개 말이야.”
젝스가 입술을 떨었다.
표정 변화가 많지 않은 이였다. 그런 그가 저렇게 감정을 드러내다니. 에슬린이 애틋하게 웃었다.
이국 출신인 그가 남부에서 노예로 전전하던 것을 구한 건 에슬린이었다.
그때 젝스 곁에는 사냥개 한 마리가 있었다. 죽어 가던 것을 살린 것이라고 했다. 에슬린은 맥시와 함께 젝스를 빼내었다.
비록 맥시는 병이 깊어 얼마 지나지 않아 죽어 버렸지만.
둘은 남부 바다가 보이는 곳에 맥시의 봉분을 만들어 주었다.
그 앞에서 굵은 눈물을 흘리던 젝스가 아직도 선명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둘만의 기억이었다.
“주군!”
젝스가 털썩, 무릎을 꿇었다. 두꺼운 어깨가 크게 요동쳤다.
에슬린은 쓰게 웃었다.
“오랜만에 듣네, 그 말…….”
“대체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전…… 전 그날.”
답지 않게 그는 횡설수설했다.
“주군께서 돌아가신 줄로만…….”
먹먹하게 잦아드는 목소리에 가슴이 쓰렸다.
에슬린이 죄인처럼 앉은 젝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를 칭찬하거나 위로할 때, 자주 해 주던 동작이었다.
낯익은 온기에 그가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생각보다 끈질긴 목숨이었나 봐.”
벽난로의 불빛이 일렁였다. 젝스는 홀린 듯 에슬린의 얼굴을 보았다.
다른 얼굴이었다. 분명히 다른 얼굴.
빙의라니. 그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말인지 젝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 그리운 느낌은 분명 황녀의 것이었다.
목숨을 다해 섬기겠노라 맹세했던 자신의 유일무이한 주군.
젝스는 떨리는 턱을 굳게 다물었다. 이럴 땐 뭐라고 말해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왜 이런 곳에서 이러고 살아?”
에슬린이 어두컴컴한 오두막을 슥 훑으며 물었다. 의문과 못마땅함이 한데 섞인 표정이었다.
젝스에게 기사 작위를 내린 건 에슬린이었다. 비록 이국 출신이었으나, 자신과 함께한 시간이 적지 않았으니 모아 둔 재산이 아예 없지는 않았을 것이다.
“기사 작위는 반납하였습니다.”
“뭐? 대체 왜?”
“주군께서 안 계신 곳에 남을 의미가 없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젝스는 중얼거리듯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전…… 주인을 끝까지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진작 끊어 버렸어야 할 목숨입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에슬린은 미간을 구겼다.
“안 돼. 함부로 목숨을 포기하지 말라고 했잖아.”
“그래서입니다.”
“…….”
“그래서 끊을 수도 없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말씀하신 주군을…… 조금 원망하기도 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잿빛 눈동자가 올곧게 에슬린을 향했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니까 그는 에슬린의 말 때문에 죽지 못해 억지로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혼자 숨어 저를 돌보지도 않은 채, 마치 자신을 벌주는 것처럼.
“어찌 됐든 주군의 말씀을 지키길 잘했습니다.”
“젝스 경.”
“이렇게 다시 뵐 수 있게 됐으니 말입니다.”
한쪽 무릎을 세운 채 꿇어앉은 그는 충직한 측근의 얼굴로 에슬린을 올려다보았다.
긴 악몽에서 깨어난 기사의 눈동자에 비로소 어떤 의지가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