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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43화 (43/147)

43화

‘난 저 노예 놈에게 걸겠어!’

‘아니야. 저 맥시라는 사냥개 기세가 장난 아니던걸? 난 저 개에게 걸어 보지.’

젝스는 이국인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모국을 나와 베르타니아 남부에 도착했으나 기다리는 건 더 큰 시련이었다.

생활은 지독했다. 불법 투견판에서 마법에 걸린 사냥개들과 싸우는 게 그의 일이었다.

매일, 매분, 매초 마음이 죽어 갔다. 세상이 온통 검고 흐려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잊어 갈 즈음이었다.

‘이봐, 당신. 살아 있어?’

갇혀 있던 자신에게 누군가 말을 걸었다. 대체 이 삼엄한 경비를 어떻게 뚫고 온 건지는 알 수 없었다.

‘…….’

‘살아 있네. 자, 이 향낭을 지니고 있도록 해. 그럼 그 개는 더 이상 당신에게 덤비지 못할 테니까.’

‘……너는 누구지?’

‘나? 난 에슬린이야.’

종처럼 맑은 목소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 이상 베르타니아인에게는 속지 않을 것이다. 젝스는 족쇄에 묶인 제 손발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너도 나를 노예로 사고 싶은 건가?’

‘응?’

‘너도 나에게 일자리를 주겠다고 꼬셔서 목줄을 채우고, 채찍질을 하면서 또 다른 지옥으로 날 내보낼 생각인 건가?’

‘음…… 맞아.’

젝스는 빠득 이를 갈았다.

‘나는 당신에게 일자리를 주겠다고 꼬시는 중이야.’

‘뭐?’

‘하지만 목줄을 채우거나 채찍질을 하고 싶지는 않네. 그건.’

여자가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로브 후드 아래로 깊고 푸른 눈동자가 드러났다.

‘그냥 사람에게 할 짓은 아니잖아?’

‘…….’

‘어때, 내 기사로 일하는 건? 난 때마침 실력 좋은 기사가 필요한 참이었거든. 처우는 당연히 지금보다 훨씬 나을 거라고 장담해.’

‘너는…… 내가 무섭지 않은가?’

젝스의 커다란 덩치와 다른 피부색 같은 것들은 일부 제국민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여자는 재미있는 말을 들었다는 듯 웃었다.

‘내가 왜 당신을 무서워해야 하지?’

“젝스 경, 내 말 듣고 있어?”

서로 다른 목소리가 겹쳐졌다. 젝스는 화들짝 정신을 차렸다.

“아…… 죄송합니다.”

서둘러 들고 있던 주전자를 기울였다. 쪼르르. 뜨거운 물이 에슬린의 빈 잔을 한 번 더 채웠다.

“괜찮아?”

“예. 잠시 생각을 좀. ……뭘 물으셨는지 다시 말씀해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응급 약 같은 게 있냐고 물었어. 테베트 경의 부상을 치료할 만한.”

“아.”

젝스는 잠시 오두막을 둘러보다 고개를 저었다.

“구비해 둔 건 없습니다. 곧 날이 밝을 테니, 근처 마을에서 의원을 불러오겠습니다.”

“의원은 안 돼. 쫓기고 있거든. 약과 붕대 같은 것만 사다 줘.”

“하지만…….”

하지만?

에슬린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치켜들었다. 그녀의 말에 이의를 표하는 젝스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주군의 안색 또한 좋지 않으십니다.”

파리하게 질린 낯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보였다. 에슬린은 빙긋 웃었다.

“난 괜찮아. 다친 데도 없고.”

“…….”

“괜히 외부인을 들였다가 추적자에게 들키는 게 더 문제야.”

“……알겠습니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수긍했다. 그러면서 마을에 있는 약이란 약은 모조리 쓸어 오리라 다짐했다.

에슬린이 몸을 일으켰다. 벽난로의 온기로 옷은 대충 마르긴 했지만, 아직도 축축해 기분이 나빴다.

“젖은 옷을 갈아입고 씻고 싶어. 가능할까?”

“물을 끓이고 욕조를 준비해 두겠습니다. 주군께 맞는 옷은 없습니다만…….”

“몸만 가릴 수 있다면 아무거나 괜찮아. 마을에 나간 김에 적당한 걸 구해다 줘도 좋고. 그리고…… 소식 하나만 전해 줄 수 있을까?”

젝스는 당연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장작을 좀 더 가져오겠습니다.”

어느덧 벽난로의 불씨가 사그라들고 있었다. 젝스는 숯을 한 번 뒤집은 뒤, 오두막을 나왔다.

“…….”

마당 한쪽에 널브러져 있던 장작을 주워 들었다. 그의 눈이 짙고 어두웠다.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너희들의 주인은 오늘 죽었다. 황궁에 남고 싶다면 남고, 떠나고 싶다면 떠나라. 원하는 대로 해. 그런 약속이었으니.’

‘그런…… 약속?’

‘가거라.’

젝스의 턱이 단단해졌다.

문득 답답한 기분이 들어 손을 들어 가슴을 쿵쿵 쳤다. 전혀 시원해지지 않았다.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작은 오두막 창문에서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와 함께 아른거리는 인영이 보였다.

이 감정은 무엇일까?

표현이 서투른 탓에 젝스는 저를 파도처럼 집어삼키는 이 기분이 무엇인지 제대로 표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번에야말로 끝까지 저분의 곁을 지킬 것이다.’

다신 그런 패배감을 맛보지 않기 위해서.

그건 에슬린이 스스로를 포기하도록 만들지 않겠다는 다짐과도 같았다.

‘나는 주군이 언제나 옳은 줄 알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에게 에슬린은 영웅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하지만.

‘주군은 제 목숨을 버리고 우릴 떠났어.’

그건 명백히 틀린 선택이었다. 그러니 두 번 다시 그런 선택은 하지 않게 할 것이다.

설령 그 때문에 에슬린의 말을 거스르게 되더라도, 이젠 상관없었다.

그녀를 잃지 않을 수만 있다면.

비어 버린 주인의 자리를 보며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삶.

“젝스 경, 장작 줍는 거 도와줄까?”

그런 지옥 같은 삶은 더 이상 사절이었다.

* * *

에슬린은 작은 오두막에 홀로 남았다.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니, 어느덧 푸르스름하게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후…….”

젝스는 장작을 해 오겠다, 수프를 끓이겠다, 간이침대를 마련하겠다 하며 분주히 움직이다 조금 전 마을로 떠났다.

그녀는 테베트가 잠든 침실에 앉아 있었다. 시체처럼 잠든 남자는 도무지 눈을 뜰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피곤하네.”

커다란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 양 무릎을 끌어안았다. 무거운 피로가 짐처럼 온몸을 내리눌렀다.

‘너무 많은 일이 있었어.’

혼자가 되니 비로소 제게 벌어진 일을 되짚어 볼 수 있었다.

‘테베트 경은 괜찮은 걸까?’

젝스가 말하기로, 마물 독이 온몸에 퍼져 좋지 않은 상태라고 했다.

그 만신창이가 된 몸으로 쉬지 않고 말을 달리고, 저를 감싼 채 세하즈강을…….

아찔한 기분이 들어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걱정은 비단 테베트의 몸에 대한 것뿐만은 아니었다.

‘테베트 경은…… 리페리우스 공작은 대체 뭘까?’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화로의 장작이 타닥거리는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난 어쩌다 그를 좋아하게 된 거지? 그는…….’

순간 눈에 열이 몰렸다.

‘이 하녀를 사랑해 내게 독배를 건넨 사람인데.’

작은 어깨가 더욱 움츠러들었다.

차라리 기억을 찾지 않는 게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랬다면 이런 비참한 기분은 들지 않았을 테니까.

자기 연민만큼 쓸모없는 감정도 없다고 생각했으나, 오늘만큼은 저 자신이 가엾게 느껴져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이 하녀의 몸에 빙의하게 된 건.

이전 생에서는 받지 못했던 그의 사랑을…… 이렇게라도 받아 보고 싶어서?

“하, 참.”

에슬린은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에슬린 베르타니아.’

그녀는 자신을 꾸짖었다.

아직 무엇 하나 확실한 게 없는 상황이었다. 무의미한 어림짐작으로 스스로를 비참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에슬린은 객관적으로 생각했다.

‘그날, 디에리안이 나를 살리기 위해 독배에 무슨 짓을 한 건 분명해. 문제는…… 도대체 디에리안이 왜 그 자리에 있었느냐 하는 건데.’

당시 디에리안은 반역 혐의로 감옥에 있어야 했다. 그런 그가 어째서 에슬린의 처형 장소에 나타났는가?

그것도 집행인인 리페리우스 공작과 함께.

고개를 들었다. 활활 타오르는 화로에 시선을 옮기자, 푸른 눈동자에 붉은색 화염이 소용돌이쳤다.

‘대체 디에리안이 어떻게 그 자리에 있을 수 있었던 거지? 테베트 경은…… 왜 그런 디에리안을 눈감아 준 거고?’

만약 그가 디에리안의 계획을 알고 있었던 거라면?

그러다 뭔가 일이 잘못되어, 에슬린이 빙의해 버린 거라면?

‘하지만…… 중립인 리페리우스가 디에리안과 함께 나를 도왔을 리 없을 텐데.’

가라앉은 시선이 잠든 테베트의 얼굴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그를 흔들어 진실을 묻고 싶었다.

하지만 야속한 남자는 그림처럼 단정한 얼굴로 잠든 채였다.

“……지금은 디엘을 기다릴 수밖에 없겠네.”

에슬린이 한숨처럼 중얼거렸다. 젝스에게 소식을 전해 달라고 했으니, 곧 그가 찾아올 것이다.

다시 무릎에 고개를 묻었다.

뜨겁게 돌아가던 뇌의 움직임이 그제야 조금씩 느려졌다.

눈을 감았다. 수마가 해일처럼 몰려와 몸을 덮쳤다.

* * *

테베트는 낙하하고 있었다.

끝없이, 끊임없이, 영원히…….

온몸이 사정없이 뜯기고 찢겼으나 상관없었다.

이 품 안에 있는 사람만 떠나지 않는다면. 그녀만 무사하다면.

그런데 어느 순간 위화감이 느껴졌다. 꽉 찬 줄 알았던 양팔이 텅 비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허억!”

그는 강제로 눈을 떴다.

장거리를 질주한 사람처럼 호흡이 거칠었다. 온몸이 뜨겁고 아팠다. 그러나 그는 재빨리 제 품을 더듬었다.

없었다. 그녀가.

에슬린이 또 저를 떠났다!

“제기랄.”

그는 욕설을 짓씹으며 몸을 일으켰다. 억지로 이불을 걷고 밖으로 나가려는데.

“…….”

작은 숨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시야가 돌아왔다. 어두컴컴한 내부는 창문을 모두 닫아 두었으나, 그 틈 사이로 태양 빛이 스며들어 오고 있었다.

그 빛에 의지해 숨소리가 들려온 곳을 바라보니.

“하아…….”

에슬린이 있었다.

그녀는 방 한가운데에 놓인 소파에 동그랗게 몸을 말고 잠든 채였다.

테베트는 미간을 구겼다.

“왜 저런 곳에.”

불편할 텐데.

그녀를 옮기고자 침대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그대로 몸을 일으키려는데.

순간 시야가 크게 흔들렸다.

‘뭐지?’

테베트는 길게 고개를 털었다.

본능적으로 옆에 놓인 제 검을 움켜쥐었다. 손바닥에서 이유 모를 통증이 올라왔다.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고개를 들자 눈앞에 구겨진 채 잠들어 있는 여자가 있었다. 알 수 없는 감각이 전신을 휘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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