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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44화 (44/147)

44화

인기척을 눈치챈 여자가 비척비척 눈을 떴다.

“테베트 경?”

꽉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테베트는 검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괜찮아요? 아직 움직이면 안 돼요. 마물 독이 온몸에 퍼져서 자칫하면 더 안 좋아질 수도 있다고…….”

“…….”

그는 눈동자만 굴려 여자를 바라보았다.

창문에서 새어 들어오는 빛에 흰 낯이 드러났다. 매끄러운 연보랏빛 머리카락은 그다음이었다.

그리고 나타난 맑고 깊은 푸른 눈동자와 마주치는 순간.

“……에슬린?”

그는 홀린 듯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네.”

에슬린이 대답했다.

“왜 그래요?”

테베트는 그제야 손의 힘을 풀었다. 툭. 검이 침대 위로 떨어졌다.

“테베트 경?”

아무 말 없는 테베트가 걱정됐는지 에슬린이 한 발자국 더 다가섰다.

익숙한 향기가 밀려들어 오자, 테베트는 비로소 막혔던 숨을 토해 냈다.

“내가…… 당신을.”

순간 못 알아볼 뻔했다.

테베트는 그 말을 집어삼켰다. 아무래도 제 부상이 너무 심한 것 같았다.

잠시 머리가 어떻게 되어 버릴 정도로.

“뭐라고요?”

“……아닙니다. 그보다…… 그러고 보니, 몸은 좀 어떻습니까. 다친 곳은요?”

함께 세하즈 강물에 빠졌던 기억이 떠올라 테베트가 다급하게 물었다. 에슬린이 부드럽게 웃었다.

“전 괜찮아요.”

하아. 긴 한숨이 터졌다.

안심한 탓인지 순식간에 긴장이 풀리며 시야가 턱턱 좁아 들었다.

“경?”

“…….”

테베트의 커다란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테베트 경!”

에슬린은 재빨리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돌덩이 같은 몸이 그대로 에슬린을 향해 쓰러지는가 싶던 그 순간.

“보고 싶었습니다.”

강한 팔힘이 느껴졌다. 그가 제 옆에 앉은 에슬린을 그대로 끌어안은 것이었다.

작은 몸을 품에 넣은 테베트가 어깨에 이마를 묻었다. 긴 한숨 같은 목소리가 흩어졌다.

“이대로 당신을 못 만나게 되는 줄 알았어요.”

“잠시만…….”

에슬린은 딱딱하게 몸을 굳혔다. 빠져나가기 위해 발버둥 쳐도 소용없었다.

단단한 팔이 덩굴처럼 제 몸을 옭아매고 있었다. 이제 막 병상에서 일어난 환자의 것이라기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힘이었다.

떨리는 숨결이 귓가에 닿았다. 커다란 손이 에슬린의 뒤통수를 조심스럽게 감싸 쥐었다.

“…….”

딱딱하고도 뜨거운 품이었다. 거칠지만 부드러운 손길이 이어졌다.

에슬린은 멍하게 천장을 응시했다.

‘내가 베르타니아였을 땐…….’

늘 칼로 잰 듯 날카롭던 얼굴이 떠올랐다.

‘절대 손에 넣을 수 없었던 사람.’

‘테베트 경, 내 사람이 될 생각은 없어요?’

‘없습니다.’

‘당신이 리페리우스라서?’

‘더 설명이 필요합니까?’

베르타니아의 이름을 가진 에슬린은 리페리우스의 이름을 가진 테베트를 가질 수 없었다.

‘이 하녀는 이렇게 쉽게 닿을 수 있었구나.’

속이 쓰렸다. 그건 새카만 질투와도 닮아 있었다.

자각한 마음은 눈덩이처럼 불어나 에슬린의 온몸을 잠식했다.

“얼굴을 좀 보여 줘요.”

그가 몸을 뒤로 물리며 속삭였다.

“왜 그럽니까?”

그러나 이번엔 에슬린이 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의아해진 건 테베트였다.

“에시?”

지금 얼굴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지금 얼굴을 보이면…….

제 정체는 물론, 이 시커먼 마음까지 모조리.

다 들켜 버리고 말 테니까.

둘은 한참 만에 침실에서 벗어났다.

테베트는 익숙하게 오두막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에슬린도 몰랐던 주전자나 찻잔, 말린 과일 같은 것들을 찾아내더니, 금세 과일차 한 잔을 뚝딱 만들어 냈다.

“여긴 어디죠?”

테이블 근처에 앉으며 테베트가 물었다. 관찰하는 듯한 시선이 창문 밖으로 향해 있었다.

에슬린은 뜨거운 차를 마시며 말했다.

“세하즈강의 하류예요. 근처에 레비브라는 마을이 있는 것 같아요.”

“그렇게 멀리 온 건 아니군요.”

“네.”

“다친 곳은 정말 없습니까?”

“덕분에요.”

“다행입니다.”

그제야 그는 진심으로 안도한 얼굴을 했다.

에슬린은 찻잔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슬쩍 눈만 올려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조금 날카로워진 것 같은 얼굴이었다. 턱선이 도드라지고, 눈가가 좀 더 우묵해졌다. 피로해 보이는 낯빛은 아마 부상의 여파일 것이다.

‘그러고 보니 벌써 이렇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

마물 독에 심하게 당한 상태라고 했는데.

에슬린은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아무렇지 않게 행동해 잊고 있었으나, 그는 엄연한 중환자였다.

“테베……”

“그보다.”

테베트의 낮은 목소리가 에슬린의 말을 가로막았다.

“감히 누가 당신을 쫓고 있던 거죠?”

소름이 돋을 만큼 서늘한 어조였다.

“그건.”

“그건?”

“황궁에서 누명을 쓰는 바람에, 쫓기던 중이었어요.”

“…….”

“솔직히 그 절벽에선 다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에슬린은 그의 눈을 똑바로 응시하며 덧붙였다.

“구해 줘서 고마워요.”

창문을 등지고 있는 터라 그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래서인지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누명이라. 테베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에시.”

스윽. 그가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찻잔 내려놓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려, 몸이 바짝 경직했다.

“공작저를 왜 나갔습니까?”

“…….”

과일차의 향이 진했다. 그 향에 질식해 버리기라도 한 듯 에슬린은 숨 쉬는 게 불편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반듯하게 앉아 그를 정면에서 응시했다.

“그 전에 저도 묻고 싶은 게 있어요.”

“네.”

“가주님, 아니. 테베트 경께서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었던 거죠?

디에리안의 계획을 알고도, 당신은 그를 눈감아 준 건가요? 왜?

“…….”

하지만 에슬린은 그 모든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검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모든 생각들이 하얗게 탈색돼 버렸기 때문이었다.

“뭘 물으려는 거죠?”

다정한 시선이 에슬린을 휘감았다. 애정과 신뢰가 가득 담긴 얼굴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낭패감을 맛봤다.

‘그걸 물으려면…… 내가 에슬린 베르타니아라는 걸 밝혀야 하는 거잖아.’

온몸의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 하녀에 빙의한 거라는 걸 밝힌다면, 나와 그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그는 하녀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지금도 저렇게 맹목적인 애정을 보내고 있는데.

‘자기를 속였다며 날 영원히 경멸하게 되겠지.’

꾸욱. 찻잔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에시?”

“……아무것도 아니에요.”

결국 에슬린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무거운 침묵이 찾아들었다.

테베트는 고개를 기울였다. 에슬린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진 탓이었다. 그런 그녀가 걱정스러워, 뭐라고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에슬린의 입술이 다시 열렸다.

“저택을 나간 이유에 대해 물으셨나요?”

혼란스러운 감정 때문인지 에슬린의 목소리가 낮고 차가웠다.

“수도에 있는 가족에게서 급보가 왔어요. 그래서 부랴부랴 떠나야만 했고, 일은 계속 해야 하니 황궁 하녀로 들어가게 된 거예요.”

“…….”

“가주님과의 약속을 어긴 건 죄송한 일이지만……”

“됐습니다.”

그가 고개를 저으며 말을 잘랐다. 그러곤 에슬린에게 손을 뻗었다.

“당신의 딱딱한 사과를 듣고 싶었던 게 아닙니다.”

테베트는 찻잔을 꽉 쥐고 있던 그녀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떼어 냈다. 붕대를 감은 손목 위를 부드럽게 쓰다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무슨 상황이었는지는 알겠습니다. 탓하려는 게 아니니 사과하지 말아요.”

잠시 간격을 두고 테베트가 덧붙였다.

“아, 당신에게 누명을 씌운 놈은 제가 반드시 죽여 버릴 테니 그건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당신 손목을 그렇게 만든 사람도 포함해서요.”

에슬린은 물끄러미 제 손목을 뒤덮은 커다란 손을 응시했다. 따스한 체온이 두꺼운 붕대 아래로 전해졌다.

그는 여전히 지나치게 다정하고, 또 달콤한 남자였다.

그래서일지도 모른다.

난생처음으로, 에슬린이 자기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하고 싶어진 것은.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만이라도…….’

안다. 이건 전혀 합리적이지 못한 선택이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온전한 나로 있을 수 있을 때.’

그때쯤이면 당신을 잘 떠나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때쯤이면…… 당신이 날 경멸하게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기억은 아주 좋은 핑계였다.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모든 결과를 유예할 수 있는 허울 좋은 변명.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그건 테베트와 이 하녀에 대한 미안함이기도 했다.

‘미안해요, 로즈벨 하녀님. 기억이 돌아올 때까지만, 그때까지만…… 나를 당신으로 살게 해 줘요.’

돌아올 리 없는 용서를, 에슬린은 간절하게 구해 보았다.

눈을 들었다. 다정한 검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쳤다.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한결같은 눈동자였다.

* * *

얼마 뒤 마을에 갔던 젝스가 돌아왔다.

“리페리우스 공작 각하? 일어나신 겁니까?”

오두막에 들어선 젝스를 보자마자, 에슬린은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벌써 움직이실 수 있을 만한 상처가 아니었는데.”

생각해 보니, 젝스에게 제대로 된 상황 설명을 해 두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에슬린이 정체를 감춘 채 공작저 하녀로 일했다는 사실도 몰랐고, 이 하녀가 리페리우스 공작의 비밀 연인이었다는 사실도 몰랐다.

“너는…… 젝스 에티우드?”

“예, 각하.”

쿵. 젝스가 어깨에 주렁주렁 짊어지고 있던 꾸러미들을 내려놓았다.

테이블 위에 식어 가는 찻잔을 보며 그가 대체 이런 게 어디 있었냐는 얼굴을 했다.

테베트가 가느스름하게 눈매를 좁혔다.

“황녀의 개가 여긴 무슨 일이지?”

젝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에슬린에게로 향했다. 그가 입을 떼려는 순간, 에슬린은 재빨리 끼어들었다.

“이분께서 저흴 구해 주셨어요.”

“……이분?”

데구르르. 사과 한 알이 나무 바닥을 굴렀다. 귀신 울음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젝스가 몸을 굳혔다.

“젝스 경? 사과가 떨어졌어요.”

“마, 말씀을 낮추십시오.”

바위 같던 얼굴이 희게 질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에슬린이 테베트의 눈치를 살피며 젝스 경, 하고 부르려던 순간이었다.

“주, 주군. 제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습니까?”

주군? 테베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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