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주군?”
“아.”
식은땀 한 줄기가 흐르는 걸 느끼며, 에슬린은 잽싸게 변명을 덧붙였다. 감정을 감추는 데 능숙해 다행이었다.
“추적자가 쫓아올까 봐 무서워서, 이분을 호위로 고용했어요. 예전에 황궁 기사를 하셨다고 하길래.”
“아하.”
그랬군요, 테베트는 그렇게 중얼거리며 앞에 놓인 차를 마셨다.
“…….”
데룩, 데룩. 젝스의 눈동자 굴러가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 듯했다.
에슬린은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고 젝스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우리 통성명이 아직이었죠?”
“예?”
“저는 에슬린 로즈벨이라고 해요.”
“……예? 무슨 벨이요?”
그의 얼굴이 점점 더 흙빛으로 물들어 갔다.
“황궁 하녀로 일하다 우연한 일로 여기까지 오게 되었고,”
에슬린은 서둘러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빠르게 덧붙였다.
“그 전엔 리페리우스 공작가의 하녀였어요. 여기에 있는 이유는 아마…… 제가 공작님과는 매우 가까운…… 그런, 관계였던 것 같아서.”
설명이 마음에 드는지 테베트가 배부른 사자처럼 웃었다.
“…….”
“…….”
“……예?”
기사는 과부하가 걸리고 말았지만.
* * *
테베트가 씻고 옷을 갈아입는 동안, 에슬린은 젝스에게 천천히 그간의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 이유로 내 정체는 테베트 경에게 아직 드러낼 수 없어.’
‘주군.’
‘기억을 찾으면, 그때 모든 걸 밝힐 거야. 그동안만이라도 협조해 줘, 젝스 경.’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지, 저는……’
‘아직은, 테베트 리페리우스를 적으로 돌릴 순 없으니까.’
푸른 눈동자는 어딘지 모르게 서글픈 기색이었다. 그 때문에 젝스는 그저 잠자코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세 사람은 젝스가 마을에서 사 온 음식으로 간단한 식사를 했다.
이후엔 오두막 주변을 둘러보았다. 울창한 나무와 푸른 수풀이 우거진 숲이라 걸어도 걸어도 비슷한 풍경들만 펼쳐져 있을 뿐이었다.
“이제 그 손목을 좀 보여 주는 건 어떻겠습니까?”
테베트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조금 전까지 함께 숲길을 걸어서 그런지 그에게서는 짙은 나무와 풀 냄새가 났다.
그는 젝스의 낡은 튜닉을 입고 있었다. 평민들이 주로 입는 거친 재질의 옷이었으나 의외로 잘 어울리는 구석이 있었다.
유달리 덩치가 큰 젝스의 옷임에도 맞춘 듯 잘 맞는 게 신기했다.
“손목을 왜요?”
에슬린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녀가 찻잔을 들어 입을 축이는 일련의 동작을 테베트는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움직임이 불편해 보여요. 그 정도면 꽤 아프다는 말이겠죠.”
“괜찮……”
“한 번만 더 괜찮다고 말하면 앞으로 그 차는 물론 식사까지 전부 제 손으로 먹여 드릴 겁니다.”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다정한 어조임에도 왠지 모르게 대꾸할 수가 없었다.
“……말하고 보니 괜찮은 방법이군.”
진지한 혼잣말에 에슬린은 냉큼 손목을 내밀었다.
잘 감추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차를 마신 건 오른손이고.
에슬린은 조금 머쓱해졌다. 근처에 서 있던 젝스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아까 숲에서 진통 효과가 있는 약초를 발견했으니 그걸 좀 바르는 게 낫겠습니다.”
“알겠어요.”
에슬린은 얌전히 대꾸했다.
“물을 끓일 수 있도록 준비하겠습니다.”
잠자코 있던 젝스가 휙 몸을 돌렸다.
“마을에서 사 온 약과 새 붕대도 함께 가져와.”
“예, 각하.”
젝스가 멀어지고, 벽난로 근처에는 에슬린과 테베트만이 남았다.
깊은 숲은 밤도 빠르게 찾아왔다. 노을을 본 게 좀 전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푸른 어둠이 하늘을 물들이고 있었다.
“테베트 경께서도 치료를 더 받으셔야 해요.”
“저는 괜찮습니다.”
테베트가 램프에 불을 밝히며 말했다. 재질이 얇은 옷이라 그런지 그의 사소한 움직임에 옷 주름이 팽팽해졌다 느슨해지기를 반복했다.
에슬린은 그 상체를 가로지른 끔찍한 상처를 떠올렸다.
“하지만 상처가 심했는데.”
“정말 괜찮아요. 이래 봬도 전 단련한 몸이고, 리페리우스인지라 당신하고는 회복하는 속도 자체가 다릅니다.”
에슬린은 입을 다물었다.
리페리우스…….
대대로 마물 퇴치를 책임져 온 리페리우스는, 보통 사람들보다 강인한 육체를 타고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그래서 에슬린은 더 걱정이었다.
“그런데도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였으니, 보통 상처가 아닌 거잖아요.”
“아. 그건 상처 때문인 것도 있지만.”
그가 곤란한 듯 턱을 긁었다.
“……휴식이 부족해서 그랬습니다. 몇 주간 거의 자지 못했거든요.”
“휴식이 왜 부족…….”
에슬린이 말을 중간에서 멈추었다. 그녀의 입매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그가 몇 주 동안이나 제대로 자지 못한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기함할 만한 속도로 어려운 전쟁을 끝마치고, 쉬지 않고 말을 달려야만 했던 이유.
‘내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잖아.’
가슴속 한구석에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당신을 찾기 위해 다소 서두른 건 맞지만.”
테베트가 그린 듯한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건 당신 탓이 아닙니다.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그는 마치 에슬린의 속내를 들여다본 것처럼 말했다. 한숨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테베트는 에슬린의 안색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노란 램프의 불빛이 수심 깊은 흰 얼굴에 머물러 있었다.
그 빛을 홀린 듯 바라보던 테베트가 문득 손을 뻗었다.
“아.”
에슬린의 눈썹이 구겨졌다.
그의 손이 닿은 오른쪽 목덜미에서 싸한 고통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더 다친 곳은 없다더니.”
“그러게요…… 몰랐어요.”
“정말 제대로 다 치료한 게 맞는 겁니까?”
“작은 상처인데요, 뭘.”
머리카락에 가려진 부분이었고 말 그대로 큰 상처가 아니었기에 미처 발견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그러나 테베트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구겼다. ……이라는 놈들이 하나같이 다 쓸모가 없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것도 같았다.
“뭐라고요?”
“아닙니다.”
에슬린은 근처에 굴러다니던 작은 거울에 목을 비추어 보았다.
그때 손에 무언가를 잔뜩 든 젝스가 나타났다.
“약과 붕대를 가져왔습니다. ……어디 아프십니까?”
그가 걱정스러운 낯으로 물었다. 테베트는 젝스에게서 약과 붕대를 빼앗듯 낚아챘다. 냉랭한 시선을 던지는 건 덤이었다.
“깨끗한 수건과 뜨거운 물을 더 가져오도록 해.”
“예, 예. 각하.”
젝스가 황급히 다시 주방 쪽으로 사라졌다.
테베트는 혀를 차며 몸을 일으켰다. 자연스럽게 에슬린 옆자리에 와 앉으며 그녀를 의자째 들어 돌려 앉혔다.
“머리카락을 잠시.”
그가 목 옆을 타고 흐르는 머리카락을 거두어 냈다. 순식간에 가까워진 얼굴에 에슬린은 당황해 눈동자만 굴렸다.
“제가 할게요.”
“아파도 조금만 참아요.”
그는 에슬린의 말이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굴었다. 이윽고 여린 목덜미에 딱딱한 손이 닿았다.
“…….”
에슬린은 숨을 멈추었다. 쿵쿵대는 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릴까 두려웠다.
차가운 연고가 닿고, 그것을 문지르는 손길이 느릿했다. 감각이 예민해졌다. 귓가에 커다랗게 들리는 숨결마저 지나치게 선명했다.
“움직이지 말아요.”
자꾸만 뒤로 몸을 빼는 에슬린을 테베트가 반사적으로 붙들었다.
한쪽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고, 다른 쪽 손으로는 목덜미의 상처를 치료했다.
‘얼굴이 너무…… 가까워.’
못마땅한 듯 찌푸린 짙은 눈썹과 살짝 내리깐 눈매, 날카로운 콧날과 꽉 다문 입술까지.
에슬린은 차라리 두 눈을 질끈 감는 걸 택했다.
“제 탓입니다.”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온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연고가 묻어나지 않도록 붕대를 작게 잘라 붙인 테베트가 몸을 바로 세웠다. 짙었던 향기가 조금 멀어졌다.
“당신을 이렇게…… 몰아세우고 싶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조금 음울한 말투에 에슬린은 눈을 떴다.
램프의 불빛을 한쪽만 받아, 그의 다른 쪽 얼굴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그 때문인지 그의 표정이 몹시 복잡해 보였다.
“경……?”
그는 부름에 대답하는 대신 시선을 내렸다.
에슬린의 부푼 손목과 옷자락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자잘한 생채기들, 마지막으로 그녀의 목덜미를 차례로 응시했다.
“미안해요.”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 말투가 어딘지 모르게 아파 보여,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경께서 사과하실 것까지는……”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슬린의 상처를 헤집던 눈동자가 갑자기 시선을 맞춰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을 절대 포기할 수 없습니다.”
다짐 같은 말이었다.
에슬린의 한쪽 어깨를 감싸고 있던 손에 힘이 더해졌다.
에슬린은 물끄러미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러니 용서하십시오.”
무엇을?
에슬린은 속으로 반문했다.
그 순간 테베트의 사과에는 자신이 감지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건 기억을 잃은 에슬린을 몰아붙여, 결국 도망치게 했다는 것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일까? 무엇을 용서해야 하길래?
“부디 날 용서해요, 에슬린.”
당신이 그런 죄인 같은 얼굴을 하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