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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46화 (46/147)

46화

며칠이 흘렀다.

오두막에서의 생활은 생각보다 평화로웠다. 온통 숲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그런지, 마치 다른 세계로 뚝 떨어져 나온 듯한 느낌이었다.

그곳에서 테베트는 빠르게 부상을 회복했다. 젝스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기함할 만한 속도였다.

“내일은 마을에 내려가 봐야겠습니다.”

테베트가 샐러드에 손을 뻗으며 말했다.

따뜻한 아침 태양이 테이블 위로 비스듬히 내리쬐고 있었다. 멀리서 부지런한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가 났다.

“그러네요. 슬슬 마을이 어떤 곳인지도 궁금하고요.”

에슬린은 제 앞에 놓인 샐러드와 잘 구운 감자를 들여다보았다.

마을에 가는 건 테베트가 말하지 않았다면 제가 제안할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벌써 며칠짼데.’

디에리안에게서 아무런 소식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곳에 오자마자 보낸 편지는 진작 도착했을 텐데.

그녀는 훨씬 부드러워진 손목을 움직여 물을 마셨다.

‘한 번 더 소식을 보내야겠어.’

여태까지 감감무소식인 게 마음에 걸렸다.

“마을에 추적자가 있지는 않겠죠?”

에슬린이 물었다. 어찌 됐건 자신은 쫓기는 신세였다.

가만히 빵을 우물거리던 젝스가 대답했다.

“아마 괜찮으실 겁니다. 매일 마을을 살펴보고 있지만, 수상한 기색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레비브는 산으로 둘러싸인 곳이라, 외부인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이기도 합니다.”

“음, 그럼 결정됐네요.”

에슬린이 두 사람을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내일 함께 마을에 내려가 보도록 해요. 그보다 테베트 경.”

“네.”

“제 접시에 음식 좀 그만 옮겨 담을래요?”

뚝. 그 말에 테베트가 동작을 멈추었다.

산더미 같은 음식 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던 토마토가 쭈욱 미끄러져 내렸다.

“당신은 환자니 잘 먹어야 해요.”

그가 뻔뻔스럽게 이야기했다. 하나도 줄지 않는 그녀의 접시 위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자못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하, 에슬린은 짧게 헛웃음을 흘렸다.

“대체 누가 환자라는 건지…….”

객관적으로 따져도 당연히 테베트 쪽이 환자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베트는 흘러내린 토마토 대신 큼지막한 고기를 떼어 에슬린의 접시 위에 올렸다.

“손목이 잘 안 나아 큰일입니다.”

“이 정도면 보통 수준인 거예요.”

당신의 회복력이 지나치게 괴물 같은 수준인 거고.

그러나 구태여 그 말은 더하지 않았다.

테베트가 물끄러미 에슬린의 왼쪽 손목을 바라보았다.

“마을에 치료 마법사가 있으면 좋겠는데, 워낙 변방이라 과연.”

“아쉽지만 이곳에 마법사는 없습니다.”

“쯧.”

테베트는 진심으로 못마땅해 보였다. 에슬린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식사에 집중했다.

“그 마법사 놈이라도 있었다면 차라리 나았을지도 모르겠군.”

그에게서 문득 그런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에슬린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자, 테베트가 다정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기억합니까? 공작저에서 만났던 그 마법사 놈 말입니다.”

“물론, 기억해요.”

젝스의 시선이 이쪽을 향하는 게 느껴졌다. 에슬린은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흘러내릴 듯한 고기 조각을 포크로 쿡 찍을 때였다.

‘그 마법사 놈과 어제도 밤을 새우셨다고 들었습니다.’

어디선가 환청이 들렸다.

“…….”

에슬린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테베트는 입을 다문 채 생선 살을 발라내고 있었고, 젝스는 묵묵히 식사를 하고 있을 뿐이었다.

‘네, 맞아요. 연구할 게 있었거든요.’

익숙한 듯 낯선 제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에슬린은 깨달았다.

기억이구나.

‘왜 그래요?’

‘그 마법사가 정말, 측근은 맞습니까?’

‘무슨 뜻이죠?’

‘그 마법사 놈과 매일, 단둘이…… 낮부터 밤까지 좀처럼 떨어지지 않으니 드리는 말씀입니다.’

기억 속 자신이 얼굴을 구겼다.

이 밤중에 집무실에 쳐들어와서 한다는 소리가 고작 저거라니.

‘지금 감히 나랑 디엘을 모욕하는 건가요? 당신이 대체 뭐라고?’

‘…….’

‘불쾌하네요. 그만 돌아가세요.’

싸늘한 대꾸에 테베트는 잠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불쑥 입을 열었다.

‘곧 마물 전쟁에 나갈 겁니다.’

‘알아요.’

‘마법사를 내주십시오. 필요합니다.’

그 말엔 에슬린도 더 이상 참지 않았다. 도대체 뭐에 꽂혔는지는 모르겠지만 이토록 막무가내로 구는 모습을 용납할 수 없었다.

설령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일지라도 말이다.

‘오늘 정말 무례하시네요, 리페리우스 공작.’

‘하. 이젠 이름도 안 불러 주시는 겁니까?’

기억 속 테베트가 으르렁거렸다.

‘대체 이렇게까지 화가 난 이유가 뭐죠?’

‘그걸 알면 찾아오지도 않았습니다.’

테베트가 중얼거렸다.

무언가를 참듯 그가 양손을 꽉 쥐고 있는 걸 발견했다.

‘초조하고, 불안하고, 하루에도 수백 번씩.’

‘…….’

‘당신 측근들 목을 비틀고 싶기도 하고.’

검붉은 눈동자가 에슬린을 직시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그는 완벽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전하께선 똑똑하시니 알려 주십시오. 제가 왜 이러는 겁니까? 왜 전하 앞에만 서면.’

‘…….’

‘이성이 날아가 버리는 거죠?’

“……시? 에시?”

순간 저를 붙드는 손길에 에슬린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

그녀는 천천히 눈에 힘을 주고 초점을 맞췄다.

낯익은 붉은색 홍채가 가장 먼저 보였다.

“왜 그러죠? 어디 안 좋은 데라도 있는 거예요?”

다정하고, 따뜻하고, 염려와 확신이 담긴.

그때보다 단단해진 듯한 눈동자가.

“테베트 경?”

“네.”

테베트가 미간을 살짝 좁히며 대답했다. 그녀의 얼굴을 샅샅이 살피는 표정이 설핏 매서워졌다.

에슬린은 눈을 깜빡이며 고개를 털었다.

“아, 아뇨…… 아무것도 아니에요. 잠시 멍해져서.”

“아무래도 더 쉬는 게 좋겠습니다. 얼굴이 창백하군요.”

“그럴게요.”

에슬린은 순순히 대답했다.

신경 쓰지 말라는 뜻에서였으나 테베트와 젝스는 그런 그녀의 태도에 오히려 더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나를…… 꺼리는 줄 알았는데.’

에슬린은 기계적으로 식기를 움직였다. 무엇을 씹고 있는지조차 제대로 느껴지지 않았다.

자신을 향하던 강렬한 눈빛만이 머릿속에서 반복되었다.

‘그 표정은 마치…….’

에슬린은 억지로 음식을 밀어 넘겼다.

살짝 눈을 들자,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테베트와 눈이 마주쳤다.

‘……왜?’

저절로 의문이 솟아올랐다.

왜 기억 속 그는…….

마치 이 하녀를 보듯.

‘왜 전하 앞에만 서면 이성이 날아가 버리는 거죠?’

날 바라봤던 거지?

* * *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일행은 오두막을 나섰다.

레비브 마을은 숲에서 한참 벗어난 곳에 있었다. 주변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데다가 지대가 낮아, 아늑한 요람을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의외로 떠들썩하네요.”

에슬린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조용한 시골 마을을 상상했는데, 의외로 활기차고 사람도 많았다. 반짝이는 짙푸른 눈동자가 여기저기로 이동했다.

오랜만에 마을을 둘러본 그녀의 뺨이 조금 상기해 있었다.

테베트는 그런 그녀를 내려다보며 부드럽게 물었다.

“지치진 않았어요?”

그 말엔 에슬린이 조금 질린다는 표정을 했다.

“가만 보면 절 너무 약골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요.”

테베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은 채 어깨만 으쓱였다.

세 사람은 조금 더 거리를 걸었다.

아. 에슬린이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지친 건 아닌데…….”

“아닌데?”

“날이 좋으니 광장 근처에서 가볍게 차를 마시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러자 테베트가 낮게 웃었다. 에슬린이 고개를 빼며 한참 앞에 있는 광장을 살펴보았다.

“사람이 많아 괜찮은 데가 있을지…….”

“당신이 갈 만한 데가 있는지 보고 오겠습니다.”

테베트가 젝스에게 시선을 두었다. 그녀를 잘 호위하라는 눈짓이었다.

한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걷던 젝스가 에슬린에게 바짝 다가섰다. 테베트의 넓은 등이 성큼성큼 멀어졌다.

그 모습을 확인한 에슬린이 홱 몸을 돌렸다.

“젝스 경, 지금이야. 따라와.”

“주군?”

젝스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에슬린을 불렀다.

그녀가 잽싸게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걸 가장 빠른 편으로 전달하고 싶어요.”

간단한 편지를 보낼 수 있는 간이 우편국이었다.

디에리안에게 소식을 보낼 타이밍을 줄곧 재고 있었던 것이다.

“알겠습니다. 동쪽 산 너머 중턱 마을까지 인편으로 보내고, 거기서부턴 마법 전서구를 날리도록 하죠. 그 마을엔 마법사가 있으니까요.”

“좋아요.”

에슬린은 빠르게 편지를 접수원에게 전달했다.

“휴, 드디어 보냈네.”

둘은 우편국에서 나와 광장 쪽으로 다시 걸었다. 마을에서 해야 할 일은 이로써 모두 완수한 셈이었다.

“음?”

문득 시야에 걸리는 게 있었다.

그녀는 홀린 듯 어느 가판 앞으로 다가섰다.

“이건…….”

“주군, 살 게 있으신 겁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잡동사니 골동품들을 모아 놓고 파는 노점상이었다.

싸구려 액세서리나 낡은 식기, 가죽 장식, 촛대, 조악한 마법석 같은 것들이 순서 없이 늘어서 있었다.

“하아암. 엇, 손님인가? 어서 오쇼!”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젊은 남자가 쾌활하게 인사했다. 에슬린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가판 앞으로 다가섰다.

남자는 에슬린을 흘깃거렸다. 커다란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어 잘 보이진 않았으나, 얼핏 보이는 얼굴은 이 마을 사람의 것이 아닌 성싶었다.

“으음? 당신 외지인인가?”

“네, 뭐…….”

“오! 외지인은 언제나 환영이지! 하하!”

남자가 기지개를 쫙 켜며 말했다.

“자자, 관심 있는 물건은 언제든 말하라고! 내가 팍팍 깎아 줄 테니.”

에슬린은 망설임 없이 시선을 잡아끌던 물건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동시에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근처 천막이 크게 펄럭일 정도로 드센 돌풍이었다.

“주군.”

젝스가 커다란 몸으로 에슬린을 바람으로부터 보호했다. 그녀의 후드가 벗겨지지 않도록 양손으로 잡아 고정했다.

그래서 그는 정작 제 후드가 휙 벗겨지는 것은 막지 못했다.

“뭐, 뭐야…….”

남자가 드러난 젝스의 얼굴을 보며 중얼거렸다.

“베르타니아인이 아니잖아.”

외지인도 반긴다며 활짝 웃던 남자의 얼굴이 딱딱해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 이국인……!”

그가 들고 있던 헝겊 조각을 툭 내던졌다.

젝스의 팔에 맞고 떨어진 헝겊을 에슬린은 느리게 응시했다.

“지금 이게 대체…….”

푸른 분노가 그녀의 얼굴 위를 뒤덮었다.

“무슨 짓거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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