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남자는 제가 헝겊을 던지고도 스스로 당황한 것 같았다.
“아, 아니. 그걸 던질 생각은 없었는데. 하지만 이런 데에 이국인이…….”
그는 횡설수설했다. 젝스는 무덤덤한 얼굴로 제 후드를 다시 뒤집어쓸 뿐이었다.
그 모습이 더욱 에슬린의 화를 돋웠다.
“이봐요, 이국인에 대한 차별이……”
“이국인에 대한 차별이 법으로 금지된 지가 언젠데! 이눔이 미쳤나!”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나무 지팡이가 남자의 머리를 깡 때렸다.
“아악!”
남자가 제 머리를 감싸 쥐고 주저앉았다.
돌아보니 언제 나타난 건지, 형형한 기세의 노인이 서 있었다. 에슬린은 깜짝 놀라 눈만 깜빡였다.
“뭐야, 할멈!”
“몹쓸 놈 같으니라고.”
쇠를 긁는 듯한 거친 음성이었다.
탁, 탁.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한 채 가판 앞으로 걸어왔다. 자세히 보니 그녀의 눈동자가 탁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아니…… 나는…….”
남자가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훔치며 웅얼거렸다. 노인의 얼굴이 한 번 더 와작 구겨졌다.
“당장 사과드리고 썩 꺼지지 못해? 내가 널 그렇게 가르쳤느냐!”
걸걸한 노성이 터져 나오자 남자가 꾸벅 허리를 굽혔다.
“미, 미안해. 너무 당황해서.”
젝스는 무덤덤한 얼굴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는 이국인이지만.”
고저 없는 목소리가 젝스에게서 흘러나왔다. 낮지만 강한 어조였다.
“그걸 이유로 당신에게 업신여김을 받거나 함부로 대우받을 이유는 없습니다.”
“…….”
“베르타니아는 법으로 이국인 차별을 금지하는 나라이기도 하니 말입니다.”
“……미안합니다.”
남자는 진심으로 사과하며 눈치를 살폈다. 젝스는 더 대꾸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한심한 놈! 썩 꺼져!”
노인이 바닥에 떨어진 헝겊을 뭉쳐 쥔 뒤 남자에게 집어 던졌다. 그러곤 한 손에 들고 있던 나무 지팡이로 남자의 엉덩이를 팡팡 때렸다.
“우씨, 할멈! 그만 때려! 가, 간다고!”
그 서슬에 남자는 저 멀리 줄행랑을 쳤다.
쯧, 노인이 거칠게 혀를 찬 뒤 가판 근처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미안하게 됐어.”
허공을 보며 그녀가 말했다. 잠자코 있던 에슬린이 길게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저야 괜찮지만.”
“사과를 들었으니 저도 괜찮습니다.”
젝스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기분이 가라앉은 건 에슬린이었다.
“그래…… 무슨 물건을 보고 있었던 거요?”
노인이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이 가판에 온 이유가 있었다.
“저 붉은 마법석을 사고 싶어서요.”
“응?”
에슬린은 가판 구석에 처박혀 있던 마법석을 꺼내 노인에게 건넸다. 먼지가 뽀얗게 쌓여 손가락이 닿은 자리마다 자국이 남았다.
아하, 마법석을 이리저리 만져 보던 노인이 입술을 꿈틀거렸다.
그녀는 끝단에 기묘한 술이 잔뜩 달린 정체 모를 옷을 입고 있었다.
마법사인가?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다.
“미안하지만 이건 파는 게 아니야.”
“네?”
“안 판다고. 그보다 저어기 있는 저 마법석이 더……”
“왜죠?”
에슬린은 다소 급하게 물었다. 다른 마법석으로 손을 뻗으려던 노인이 행동을 멈추었다.
“전 이 마법석만 필요해요.”
“흐음. 당신…….”
노인이 입술을 비틀어 올렸다.
“이게 뭔지 알아보는 거군?”
“…….”
옆에서 젝스의 시선이 느껴졌다. 에슬린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끌끌끌, 노인이 즐겁다는 듯 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거 아는가?”
“네?”
“오감이라는 거 말이야. 하나가 안 좋으면 다른 게 비상하게 발달하는 법이지.”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자기 눈을 툭툭 가리켰다.
“아까부터 느낀 거지만, 당신은 누군가를 떠오르게 해. 내가 수도에 살았을 때 먼발치에서 보았던…… 그래. 물론 모든 게 다르긴 하지만…… 대체 왜일까?”
철컥. 젝스가 허리춤에 손을 얹었다.
“젝스 경.”
에슬린은 조용히 그를 만류했다.
“좋아.”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클클 웃었다. 붉은 마법석을 제 옷 아무 데나 슥 문질러 먼지를 닦아 냈다.
“오늘 저 놈이 무례를 저지른 것도 있고, 이걸 알아보는 사람이라면 분명…… 이 마법석에도 드디어 쓸모가 생겼다는 의미겠지.”
그러곤 에슬린에게 불쑥 내밀었다.
“자. 가져가도록 해. 돈은 됐어.”
“아뇨, 값을 치를게요.”
“됐어, 됐어. 다음에 레비브에 또 오거든 내게 바깥 얘기나 들려주든가. 그쪽 이야기도 좋고.”
노인은 귀찮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버석 마른 손이 기어코 에슬린의 손에 마법석을 쥐여 주었다.
차가운 마법석의 감촉이 느껴졌다. 에슬린은 조금 얼떨떨한 기분으로 손을 내려다보았다.
“도대체 무슨 불행을 피하고 싶은 건진 모르겠지만, 그래. 불확실한 행운을 가져다주는 것보다야 예견된 불행을 피하게 해 주는 게 더 나은 일일지도 몰라.”
“저는…….”
“부디 불행이 찾아오지 않기를 빌겠네.”
흐린 눈동자는 지금 이곳보다 더 먼 곳, 범인에게는 보이지 않는 그 너머를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았다.
에슬린은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불행을 피하게 해 주는 돌, 펠리서스.”
“그런 귀한 마법석이었습니까?”
젝스가 고개를 갸웃했다. 도대체 어떻게 알아본 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젝스 경, 기억 안 나? 디에리안이 보여 준 거잖아.”
“디에리안 님께서는 늘 항상 너무 많은 걸 보여 주셨기에…….”
음. 에슬린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맞는 말이긴 해.’
매일 얼굴이 벌게져서는 온갖 수식과 알 수 없는 책, 그림 같은 것들을 들이밀곤 했으니까.
“그래도 워낙 자세히 보여 줬던 거라 기억이 확 났어. 사실 처음엔 긴가민가했는데, 이렇게 보니까 확실한 것 같아.”
에슬린은 마법석을 들어 태양 빛에 비추어 보았다.
평범해 보이는 투명한 붉은 돌이었다. 그러나 태양 빛을 흡수시키자 그 안에서 온갖 무지갯빛이 산란하기 시작했다.
‘전하, 전하! 이 그림 속 이건 보물 중의 보물이니 반드시 봐 두십시오! 혹시나 발견하면 어디 누구 주지 마시고 반드시 저에게…….’
‘너무 평범해서 절대 못 알아볼 것 같은데?’
‘뭐라고요? 이 크기와 오묘한 빛깔, 섬세한 굴곡이 어떻게 평범합니까? 딱 보면 기억에 남을 정도로 독보적인데!’
‘나는 너처럼 천재가 아니라고.’
‘네? 저도 천재는 아닌데요? 그냥 보기만 하면 기억이 날 뿐인데.’
‘말을 말자.’
이런 데서 그 보물을 발견할 줄은 몰랐다.
불행을 피하게 해 주는 마법석.
사용 조건은 무엇일까? 불행의 기준은? 마법사가 아니라도 유효한 걸까?
에슬린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아무래도 디에리안을 만나면 물어볼 게 하나 더 늘어난 듯했다.
“그걸 바로 알아보시다니 대단하십니다.”
젝스가 말했다. 에슬린은 펠리서스 마법석을 주머니에 넣으며 그를 돌아보았다.
“그보다…… 미안해, 젝스 경.”
“예?”
“아까 같은 상황이 분명 처음은 아니었을 텐데.”
에슬린은 다소 우울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젝스는 조금 당황하여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이전에 비하면…… 법 덕분에 이제 좋은 일자리도 충분히 구할 수 있게 되었으니 말입니다.”
“…….”
“그러니 그런 시선들도 차차 바뀔 겁니다.”
위로를 받아야 할 건 그인데, 오히려 젝스가 위로하듯 덧붙였다.
남부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에슬린은 젝스가 편안하게 살 수 있는 베르타니아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비단 이국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었다.
“나는…….”
사실 좀 더 많은 것들을 바꾸고 싶었어.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이 아득히 먼일이었다.
에슬린은 입술을 물었다. 억지로 닫아 두었던 마음의 뚜껑이 자꾸만 들썩거리려 했다.
“표정이 왜 이렇게 어두워요? 누가 당신을 괴롭게 했죠?”
광장에서 에슬린을 기다리던 테베트가 한달음에 다가왔다. 그는 태양을 등지고 선 채 에슬린의 얼굴을 샅샅이 살폈다.
“아니에요. 그냥 사람이 많아 정신이 없었던 것뿐이에요.”
에슬린은 대충 얼버무렸다. 그의 날카로운 시선이 일순 젝스에게로 향했다. 물론 그에게선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었다.
말할 생각이 없는 거군. 짧게 한숨을 내쉰 테베트가 그녀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이쪽으로 와요. 당신의 기분을 달래 줄 좋은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에슬린은 잠자코 테베트를 따라갔다.
그가 이끈 곳은 광장 한쪽에 있는 야외 카페였다.
푸르른 화초가 전체를 둘러싸고, 벽면을 따라 능소화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마치 작은 정원을 연상시키는 곳이었다.
“아름다운 곳이네요.”
테베트는 다정하게 미소 지었다. 차양이 드리워진 자리는 레비브 광장이 한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세 사람은 점원의 추천을 받아 차를 주문했다.
“차는 입에 맞아요?”
“네.”
에슬린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입 안 가득 달달한 차향이 퍼졌다. 복잡하던 머릿속이 조금은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지?’
근본적인 물음이 들었다.
분명 남부로 도망가 새로운 삶을 꾸리고자 했다.
눈앞의 이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하지만.
‘그게 맞는 걸까?’
스스로의 단호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렸다.
‘하지만 떠나지 않으면 뭘 어떡하겠다고?’
답이 없는 물음이 빙글빙글 반복되었다.
까르르, 문득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멀리서 들려왔다. 광장 한복판에 놓인 커다란 분수대에서 물장난하는 소리였다.
에슬린은 눈을 들어 광장을 응시했다.
따뜻한 태양 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는 광장은 참으로 고즈넉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그 속을 뛰노는 아이들과 삼삼오오 모여 들뜬 얼굴로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다른 세상 같아.’
모든 고민이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풍경이다.
북부 공작저와 황궁에서 지냈던 살얼음판 같던 시간들을 잊을 만큼 비현실적인 감각.
‘그냥 이대로…….’
이대로 있게 된다면 어떨까? 좋아하는 사람과 믿음직스러운 측근과 함께 지금처럼만…….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세 사람의 테이블에 침묵이 흘렀다. 에슬린이 입을 다무니 자연히 대화가 사라진 것이었다.
“…….”
에슬린은 한 손에 찻잔을 쥔 채 턱을 괴고 본격적으로 광장 풍경을 바라보았다.
그건 테베트에게도 좋은 기회였다. 그는 마음 놓고 그런 그녀의 옆얼굴을 구경했다.
“그거 알아?”
침묵 속 바람을 타고 우연히 옆자리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뭘?”
“리페리우스 공작께서 실종되셨대.”
“뭐? 그 전쟁 영웅께서?”
“그래. 귀환하는 길에 산사태에 휘말리셨다는데…… 그래서 지금 수도는 난리라던데? 황궁에서 대대적으로 수색 작업을 펼친다나 뭐라나…….”
달그락. 에슬린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찻물이 튀어 손등을 적셨다.
그게 신호였을까?
“설마 이 마을까지 병사들이 들이닥칠까?”
“글쎄…… 이런 구석까지?”
짧은 꿈이 지나고, 거짓말처럼 지독한 현실 감각이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