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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48화 (48/147)

48화

“테베트 경.”

에슬린은 흔들리는 눈으로 테베트를 돌아보았다.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한 얼굴이었다.

“손에 찻물이 튀었습니다.”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요.”

잡힌 손을 빼내자 그제야 테베트는 시선을 맞춰 왔다. 흔들림 없는 눈동자가 올곧게 에슬린을 향해 있었다.

“지금이라도 바로 돌아가시는 게 낫겠어요.”

“당신은 어떻게 할 겁니까?”

“네?”

“당신도 나와 함께 돌아갈 건가요?”

테베트가 나직한 어조로 물었다. 그 물음에 말문이 막힌 건 에슬린이었다.

“저는…….”

쉽사리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후 자신이 어떻게 할지, 그녀 또한 결정한 게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단 기억을 찾는 게 목표긴 하였으나…….

그 이후에는?

에슬린의 찻잔에 테베트가 천천히 차를 따라 주었다. 기다릴 테니 언제든 준비가 되면 대답해 달라는 의미에서였다.

“저는 황궁에서 쫓기는 신세예요.”

에슬린은 일단 떠오르는 대로 말했다.

“그건 이유가 안 됩니다, 에시.”

테베트가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당신이 원한다면 어디든 가지 못할 이유가 없어요.”

그는 찻잔을 에슬린 앞으로 밀어 주었다.

“제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도울 테니 말입니다.”

에슬린은 일렁이는 찻물의 표면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흔들리는 물결은 마치 그녀의 마음속 같기도 하고, 또 내내 생각하던 남부의 깊은 바닷길 같기도…….

“물론 대륙을 나가는 건 제외입니다.”

“…….”

에슬린은 고개를 들었다. 다정하게 웃고 있는 남자의 얼굴이 시야를 메웠다. 왠지 모르게 뒷목이 싸해지는 미소였다.

테베트가 찻잔을 들어 입술을 한 번 축였다.

“수색대가 온다고 하니 당분간 마을은 들락거리지 않는 게 낫겠습니다. 오늘도 이만 돌아가도록 하죠.”

“하지만 경.”

“에시.”

그는 가만히 에슬린을 불렀다.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였다.

“당신에게 전 더 이상 리페리우스가 아닐 거라고 했던 말, 기억합니까?”

“…….”

눈이 마주쳤다.

순간 매서운 칼바람이 불던 북부 리페리우스 공작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그건 황녀였던 시절, 에슬린이 그 무엇보다도 바라던 말이었는데.

비록 그걸 바랐다는 것도 이제 와서야 깨닫게 되었지만.

“그러니 제가 당신을 두고 혼자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겁니다.”

붉은 눈동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호했다. 그 누구도 그의 고집을 꺾을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그건, 이 상황에서 말 그대로 그의 고집일 뿐이다.

“아뇨.”

에슬린은 한숨처럼 입을 열었다.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차분한 음성이 천천히 이어졌다.

“리페리우스의 가주를 이대로 계속 실종된 상태로 둘 순 없어요. 일단 돌아가서 무사함을 알리고 다시 돌아오시는 게 나아요.”

그는 베르타니아 대귀족 가문의 가주였다. 그런 공작이 행방불명되었다는 건 결단코 만만한 일이 아닐 터.

아직 이곳은 조용하지만 분명 국가 단위의 수색이 있을 것이다. 그 규모와 비용, 미묘하게 달라진 권력 구조를 생각하면…….

분명 테베트 또한 그걸 모르지 않을 텐데.

“싫습니다.”

단호한 거절에 에슬린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무거운 침묵이 머물렀다.

어쩔 수 없다. 그가 이렇게 완고하니, 에슬린은 최후의 카드를 내밀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어요.”

일순 테베트의 눈빛이 돌변했다.

“아직 일부분일 뿐이지만 말이에요.”

“…….”

“그러니까…… 저는 아직 이곳에서 좀 더 시간이 필요해요.”

고요한 목소리가 한낮의 분수처럼 주변을 메웠다 사라졌다. 테베트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 뒤, 그가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감쌌다.

어떤 감정이 떠오른 것 같았는데, 커다란 손에 가려 그게 무엇이었는지 보이지 않았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다는 건 정말…….”

조금 떨리는 듯한 목소리가 손 틈새로 흘렀다.

“좋은 일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그는 다시 손을 내렸다. 이전과 같은 미소를 머금은 채였다.

왠지 모르게 만들어 낸 미소 같다고 에슬린은 생각했다.

“그러니 테베트 경, 걱정하지 마세요.”

푸른 눈동자가 확신을 담아 말하고 있었다.

“오히려 어설프게 수색대가 마을을 헤집고, 젝스 경의 오두막까지 찾아오는 게 더 걱정이에요. 또다시 쫓기는 신세가 되고 싶진 않아요.”

“에시.”

“수도까지 갈 필요도 없을 거예요. 근처 도시에 가서 경이 무사하다는 걸 알리고 오도록 하세요. 이곳 레비브까지 수색대가 오지 않도록.”

명료하고 확고한 어조는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테베트는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마지막 발악이나 다름없는 짓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했다.

“차라리 편지를 보내겠습니다.”

“편지는 안 돼요. 레비브 인장이 찍힐 텐데, 그런 수상쩍은 편지만 달랑 도착한다면 더더욱 수색대가 여기로 오지 않겠어요?”

“…….”

테베트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걸 예상했다는 듯, 에슬린의 입가에 매끄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테베트 경, 이게 가장 합리적인 선택이에요.”

조용한 침묵이 테이블 위에 머물렀다.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고, 그에게서 긴 숨이 터졌다.

“……알겠습니다.”

체념과도 같은 말투였다.

“당신을 거스르는 건, 역시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일이군요.”

그 말에 에슬린은 머쓱한 표정으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나흘이면 충분할 겁니다.”

테베트가 덧붙여 말했다.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말대로, 어차피 근처 도시까지이니 전속력으로 말을 달리면 오래 걸리지 않을 거리였다. 그런데도 불안해하는 그가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그러나 곧 다른 감정이 찾아들었다.

그가 이토록 간절히 붙어 있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이 하녀였으니까.

에슬린은 테베트가 안쓰럽고 안타까웠으나, 동시에 참으로 야속하다고 생각했다.

* * *

결심한 테베트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날 바로 여장을 꾸려, 나흘 후까지 돌아오겠다는 선언을 남기고 떠났다.

오늘은 그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정말 오늘 돌아오는 걸까?

에슬린은 멍하게 생각했다.

“주군, 저는 저기서 채소를 좀 사 오겠습니다.”

에슬린은 식재료가 떨어져 젝스와 함께 레비브 마을로 내려온 참이었다.

그는 주렁주렁 짐을 매달고 마지막 채소 상점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응. 난 근처에 있을게.”

상점은 지나치게 좁아 두 사람이 함께 들어가기에 애매했다. 에슬린은 얌전히 상점 옆 가판을 구경하기로 했다.

“어서 오시게!”

“이건…… 마법석인가요?”

“알아보는군? 맞아! 오늘 막 개업했지.”

상인이 신이 난 얼굴로 말했다.

저절로 품 안에 넣어 둔 펠리서스 마법석이 떠올랐다.

마을에 올 때마다 그 노인이 있던 곳을 들러 보았지만, 어째서인지 그날 이후로 골동품 가판은 찾을 수가 없었다.

“내가 좀 추천해 줘 볼까?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마법석은 뭐 이런 거지.”

상인이 자신만만하게 무언가를 집어 들었다.

“자.”

“이건?”

“짝사랑을 이뤄 주는 마법석이야.”

“짝사랑……이요?”

분홍색으로 빛나는 작은 돌멩이였다. 에슬린은 얼떨결에 마법석을 손에 쥐게 되었다. 매끄럽고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이걸 지니고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상대도 그쪽에게 푹 빠지게 된다, 이 말이야!”

“…….”

레비브에는 사기꾼이 많네.

에슬린은 생각했다. 그러나 짝사랑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떠오르는 얼굴이 하나 있긴 했다.

‘나도 참 중증이네.’

조건 반사처럼 테베트가 떠오르다니.

에슬린은 자신을 비웃으며 손안에 쥔 마법석을 의미 없이 굴려 보았다.

“나라면 그거 안 사.”

그때 옆자리에 긴 그림자가 늘어졌다.

“……!”

“딱 들어도 사기잖아. 설마 살 생각이었던 건 아니지?”

투덜대는 까칠한 목소리.

에슬린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그는 이상한 무늬가 그려진 마법사용 로브를 입고 있었다. 소매는 오늘도 까맣게 그을린 채였다.

“뭐, 뭐요? 당신! 어딜 근거도 없이 사기라고 남의 영업을 방해……”

“이거랑, 이거랑, 이거랑, 그리고 저거.”

“응?”

“줘. 살 거니까.”

“아잇, 뭐야. 손님이었수? 진작 말하지!”

상인이 반색하며 손을 비볐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뚱한 얼굴로 값을 치를 뿐이었다.

“…….”

청록색 마법석 주머니를 손에 쥔 그가 그제야 에슬린을 돌아보았다.

창백한 낯이 에슬린을 똑바로 향해 있었다. 그가 불쑥 주머니를 내밀었다.

“자, 받아. 그것보단 이것들이 훨씬 값어치 있으니까. 이걸로 황궁에서 혼자 두고 가 버린 일을 용서해 주면 좋겠……”

에슬린은 그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몸이 크게 휘청였으나, 그는 쓰러지지 않도록 에슬린을 단단하게 받쳤다.

디에리안이었다.

그토록 만나고자 했던 에슬린의 마법사.

자신을 그 죽음에서 구해 냈을지도 모르는, 소중한 제 측근.

“……이것 좀 놔줄래? 각하가 없다는 건 알지만 저기 인상 더러운 호위 기사가 날 무지 노려보고 있거든. 당신 주변은 도대체 왜 저런 인간들만 있는 거야?”

그가 툴툴거렸다.

바로 옆 약초 상점에서 나온 젝스가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을에 들어설 때부터 뒤따르던 디에리안의 존재를 그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

에슬린은 살짝 몸을 떼고 디에리안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 옆으로 긴 녹색 머리카락이 흐르고 있었다.

“디엘.”

“…….”

에슬린의 부름에 그가 입술을 움찔 떨었다.

“……물약을 먹었어? 시제품이라고 했잖아.”

“그래. 네가 만든 물약이잖아.”

에슬린은 희미하게 웃었다.

“뭐야, 그럼 이제.”

그가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반말 못 하겠네?”

반짝, 그의 눈이 빛났다. 그리고 몸을 낮췄다.

그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힘없이 늘어져 있던 에슬린의 한 손을 가볍게 말아 쥐었다.

“오랜만입니다, 전하. 잘 지내셨습니까?”

씩 웃는 얼굴은 모처럼 산뜻한 기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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