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하아. 젝스 경. 이런 곳에서 살고 있었습니까? 귀신 나올 것 같은데. 아니, 사실 젝스 경이 귀신인 거 아닙니까? 이리 와 봐요. 당신이 귀신인지 사람인지 확인 좀 해 봐야겠습니다.”
오두막에 들어서기 무섭게 디에리안이 말을 쏟아 냈다.
그가 젝스를 향해 손끝에 마력을 두르고 다가서자, 농담을 모르는 호위 기사가 저 멀리 도망갔다.
“디에리안 님, 이러지 마십시오.”
“만나자마자 젝스 경을 놀리지 마.”
결국 에슬린이 중재에 나섰다.
디에리안은 테이블 한켠에 가 털썩 주저앉았다. 에슬린이 맞은편에 자리하기 무섭게 까칠한 시선이 내리꽂혔다.
“근데 대체 왜 이런 곳까지 오게 되신 겁니까? 제가 황궁을 나가면서 에르단 전하와 각하께 마법 전서구를 띄웠는데요.”
캘룩, 캘룩. 말하면서 숨이 달렸는지 디에리안이 마른기침을 했다.
물을 따라 건네던 에슬린은 고개를 기울였다.
“테베트 경에게도 연락을 했었어?”
“그럼 안 합니까? 전하께서 위험해졌다는 걸 알아야 그 돌아 버린, 돌아 버리신 각하가 길을 만들어서라도 달려가 당신을 구할 것 아닙니까.”
탁. 단숨에 물을 마신 디에리안이 거칠게 컵을 내려놓았다. 그때를 회상하며, 에슬린은 차분히 대꾸했다.
“1황자가 움직이는 게 더 빨랐어. 고문 명령이 내려와 도망쳐야 했거든. 너에게 가려다 테베트 경을 만났고, 절벽에서 떨어져 여기까지 흘러……”
“절벽에서 떨어졌다고요?”
그가 꽥 소리를 지르며 일어섰다.
뎅그르르. 구리로 된 컵이 테이블을 굴러 바닥으로 떨어졌다.
“괜찮으신 겁니까? 사지는요? 척추는? 머리는?!”
“진정해. 보다시피 멀쩡하니까.”
에슬린은 컵을 주워 들었다. 잠시 눈만 깜빡이던 디에리안은 곧 바람 빠진 공처럼 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하긴. 그 남자가 가만 있진 않았겠죠.”
빈정거리듯 그가 입술을 씰룩였다.
잠깐의 정적이 흘렀다.
손안의 컵을 만지작거리던 에슬린이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근데 너, 나한테 할 말 없어?”
디에리안이 어깨를 움찔 떨었다.
“이제 본론을 얘기해 보는 건 어때?”
차분하게 이어지는 음성에 그는 묘한 표정으로 콧잔등을 긁었다. 이미 에슬린의 다음 말을 예상한 듯한 표정이었다.
“너…… 내 정체를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야?”
그녀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처음부터입니다.”
디에리안 또한 단도직입적으로 대답했다.
“그럼 왜 공작저에선 날 모른 척한 거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 날…… 네가 왜 그 자리에 있었던 건데? 테베트 경과는 또 무슨 관계고?”
조금 흥분한 듯, 에슬린의 목소리가 빨라졌다.
그림자처럼 주변을 지키고 선 젝스는 둘의 대화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그때 너흰 모두 감옥에 있었을 텐데. 어떻게?”
“전하.”
“진실을 말해, 디에리안.”
대답 대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기억은 어디까지 돌아온 거죠?”
“아직 전부는 아니야.”
“그렇다면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없습니다.”
“뭐? 그게 대체 무슨……”
에슬린이 발끈해 눈썹을 치켜들었다.
탁. 그때 테이블 위에 무언가가 놓였다. 익숙한 물건이었다.
“이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되는 유리병.
전보다 더 진해진 푸른 액체가 존재감을 드러내듯 찰랑 움직였다.
“그건 정말 시제품이었습니다. 그래서 부랴부랴 돌아가 개선할 필요가 있었던 거고요.”
“…….”
“……황궁에선, 에르단 전하와 각하께서 계시니 괜찮을 거라고 생각한 게 제 계산 착오였습니다. 그렇게 빨리 상황이 악화할 줄은…….”
그는 뒷말을 조금 우울하게 덧붙였다.
당시 디에리안은 에슬린이 황궁에 있다는 사실은 물론, 그녀가 이미 카르단과 조우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따라서 에슬린의 상황이 급격히 나빠질 것이라곤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신경 쓰지 마. 결국 난 괜찮았으니까. 근데, 그래서?”
“그래서요? 전 그길로 돌아와 신전 마법 화로에서 조제한 만월화와 잎새 물갈퀴의 배합을 끝마쳤습니다. 시간제한이 있는 수식이라 아슬아슬했죠. 시간을 맞추지 않으면 서로 충돌을 일으켜 결국엔 기초 수식부터 다시 구축해야 했으니까. 하지만 엔티마 기법을……”
“아니, 아니.”
에슬린은 단호히 그의 말을 잘랐다. 쉴 새 없이 나불대던 입술이 뚝 움직임을 멈추었다.
“과정을 물은 게 아니야. 제발 결론만 말해 줘.”
“아.”
과정이 중요한데. 디에리안이 퉁명스러운 얼굴로 잠시 구시렁댔다.
“좋습니다. 결론만 말씀드리자면.”
“…….”
“이게 완전한 기억의 물약이라는 겁니다. 아마 전하께서 원하시는 답은 모두 이 안에 있을 테죠.”
슥, 그가 푸른 병을 에슬린 쪽으로 밀었다. 그녀는 그 물약을 꾹 말아 쥐었다.
완전한 기억의 물약.
진실의 무게라고 생각하니 지나치게 무거운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대로 드시면 됩니다.”
병 입구를 막고 있는 마개에 손을 얹었다. 그대로 조금만 힘을 주면 쉽게 뽑힐 것 같았다.
하지만 왠지 모르게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줄곧 진실에 닿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그것을 목전에 두니 묘한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건…… 영원히 봉인해야 할 상자가 아닐까?
예기치 못한 것들이 무자비하게 튀어나오면 어쩌지?
“전하?”
오랫동안 침묵하는 에슬린을 디에리안이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고개를 들자 시선이 마주쳤다.
순식간에 에슬린의 표정을 읽은 그가 설핏 인상을 구겼다.
“혹시…… 두려우신 겁니까? 그걸 마시는 게.”
마법사의 눈동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 날카로웠다. 에슬린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두렵냐고?”
나는 두려워하고 있던 거였나. 그녀는 비로소 제 망설임의 이유를 깨달았다.
그의 말이 맞았다.
디에리안을 만났을 때부터 이 물약을 받아 든 지금까지, 에슬린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오늘은 테베트가 돌아오는 날.
‘……기억을 찾으면, 테베트 경에게 정체를 밝혀야겠지.’
에슬린은 눈을 질끈 감았다.
꿈결 같던 며칠이 떠올랐다. 이대로 이 아늑한 평화 속에 머물고 싶다고 생각한 제 마음도 떠올랐다.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거짓된 평화일 뿐이다.
꿈은 영원할 수 없고, 현실은 언제나 엄혹한 법이니.
‘이젠 더는 미뤄선…… 안 돼.’
게다가 기억을 찾기로 마음먹은 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 아니었던가?
“기억을 찾으면 모든 게 바뀌겠지?”
“바뀔 겁니다.”
디에리안은 딱 잘라 대답했다.
“하지만 그건 마땅히 그래야 할 방향으로 바뀔 거예요.”
“…….”
“그러니 뭘 두려워하시는진 몰라도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다 괜찮을 겁니다. 여기 저도 있고, 저어기 우락부락한 젝스 경도 있지 않습니까.”
“디에리안 님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와 디에리안 님이 주군 곁에 있겠습니다.”
젝스가 충직한 얼굴로 덧붙였다. 에슬린은 물약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래…….
인생엔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닥쳐온다.
두려움을 이유로 그 일들을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비겁해지고 싶지 않았다.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채로 사는 건, 이제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니 ‘에슬린 로즈벨’로만 사는 건 여기까지다.
“고마워, 디엘. 젝스 경.”
그녀는 믿음직스러운 측근들을 눈으로 훑었다. 늘 그랬듯, 그들이 곁에 있었다.
그러니 그와의 이별도 괜찮을 것이다.
깨달은 순간, 무언가가 울컥 목을 치고 올라오려 했다. 그러나 에슬린은 그 무언가를 푸른 액체와 함께 꿀꺽 삼켜 버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쿠우웅!
“뭡니까!”
낡은 오두막의 문짝이 열리며 검은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 * *
“각하! 각하아!”
테베트는 귀찮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부관인 제롬은 그를 졸졸 쫓아왔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되신 겁니까! 정말 제가 어찌나 걱정했는지! 어디 다치신 덴 없으신 겁니까? 그때 그렇게 큰 부상을 입으시고도 부득불 수도로 돌아가시겠다고 하셔서 걱정했는데 이런 참담한 일이…….”
테베트는 대충 귓등으로 흘려들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벌써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쯧, 그가 짧게 혀를 찼다.
이곳은 거친 숲을 헤치고 도착한 도시, 롭시온이었다.
여기서 제 부관인 제롬을 만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실종된 테베트를 찾기 위해 수색대를 이끌고 왔다고 했다.
과한 반응이 몹시 귀찮았으나, 테베트는 한편으론 잘됐다고 생각했다.
“제롬.”
저벅저벅 마구간으로 걸어가던 테베트가 우뚝 멈추어 섰다.
“예?”
“내가 누구지?”
나직한 목소리에 제롬이 우물쭈물 덧붙였다.
“……테베트 리페리우스 공작 각하이십니다?”
“좋아. 지금 그 말을 황궁에 가 똑똑히 전하도록 해.”
“예? 대체 뭘 말씀이십니까?”
마구간에 들어선 테베트는 날카로운 눈으로 내부를 훑기 시작했다. 가장 속도가 빠른 말을 골라내기 위해서였다.
“내가 두 눈 멀쩡히 뜨고 살아 있다는 걸 황궁 놈들에게 알리란 소리야. 그 빌어먹을 수색대 보낼 생각 같은 건 제발 그만두고.”
엥? 제롬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같이 돌아가실 생각이 아니셨던 겁니까?”
“그래.”
테베트는 못마땅한 듯 미간을 구겼다. 산을 넘기에 말들의 상태가 썩 좋아 보이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래서야 내일 밤에나 도착하면 다행이겠군. 그는 생각했다.
“대체 무슨 소리십니까?”
“저리 비켜. 벌써 시간을 지체했으니까.”
“아니 그러니까 어딜 가시겠다고…….”
제롬은 답답한 듯 가슴을 퍽퍽 쳤다. 실종 상태였던 상관이 불쑥 돌아와 하는 말들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디 머리라도 다치신 건가? 그런 불경한 생각을 할 때였다.
“제롬 경!”
저 멀리서 병사 하나가 달려왔다.
그는 테베트와 제롬 앞에 멈춰 서더니 귀신이라도 마주한 사람처럼 입을 떡 벌렸다.
“허억, 리, 리페리우스 공작 각하! 살, 살아 계셨…….”
“무슨 일이지?”
제롬이 물었다. 그러자 병사가 정신을 차리고 소식을 전했다.
“황궁에서 급보입니다!”
“급보?”
가만히 듣고 있던 테베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마물 포털이 감지되었다고 합니다! 크기는 소형이지만 수일 내 긴급으로 발생할 거라 큰 피해가 예상된다고…….”
“뭐? 어딘데?”
제롬이 번쩍 뛰었다.
“이 근방이긴 한데…….”
설마…… 테베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건 오랜 경험에 의한 직감 같은 것이었다.
아니면 아니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일지도 모르고.
그는 말 위로 뛰어올랐다. 크게 고삐를 휘두르자 말이 무서운 기세로 지면을 박찼다.
“레비브 마을 산기슭이라고 합니다!”
병사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