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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50화 (50/147)

50화

“뭡니까!”

디에리안이 번쩍 튀어 올랐다. 그는 반사적으로 마법 실드를 펼쳤다.

퍽, 퍼억, 퍽!

유리처럼 단단한 푸른 장막 위로 검붉은 덩어리들이 쇄도했다.

아니, 그건 덩어리가 아니었다.

장막에 달려들다 몸이 으깨진 괴생물체들의 피와 살점이었다.

주우욱. 에슬린의 눈앞에서 핏덩어리가 미끄러졌다.

“주군!”

젝스가 재빨리 검을 뽑아 들고 그녀의 시야를 가렸다.

흡. 급격히 퍼져 나가는 피 냄새에 에슬린은 입을 틀어막았다. 손에서 놓친 빈 물약 병이 아무렇게나 바닥을 굴렀다.

“이건…….”

크으으으. 부서진 오두막 출입문으로 괴생물체들이 속속들이 침입했다.

디에리안의 결계 주변을 빙빙 돌며 공격할 틈을 엿보았다.

“마물? 이런 곳에 마물이라니 말도 안 돼!”

디에리안이 믿기지 않는다는 투로 소리쳤다. 그러면서도 마력을 움직여 실드를 세 겹, 네 겹, 연이어 강화했다.

“디엘!”

“전하, 물러서 계십시오.”

모처럼 긴장감 어린 목소리였다. 그는 에슬린 쪽은 돌아보지도 않은 채 정면에만 시선을 집중했다.

쿠웅! 크아아아!

뒤쪽에서 큰 폭발음이 터졌다. 이번엔 침실 쪽이었다.

“젝스 경, 뒤를 조심해!”

“주군! 이쪽으로!”

젝스가 크게 검을 휘둘렀다. 그는 디에리안과 제 사이로 에슬린을 보호하고, 달려드는 마물들을 단칼에 베어 넘겼다.

“읏…….”

퀴퀴한 마물 특유의 악취와 비릿한 피 냄새가 진동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에슬린은 갑자기 벌어진 일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대체 왜 이런 곳에 마물이?

그때 오른쪽 창문이 와장창 깨졌다.

“전하!”

그 틈으로 또 다른 마물이 쇄도했다. 에슬린과 가까운 방향이었다.

속도가 빨라 피할 수 없었다.

“……!”

“주군!”

디에리안이 서둘러 결계의 범위를 변화시키고, 젝스가 제 몸을 날렸다.

하지만 타이밍이 애매했다.

“안 돼!”

에슬린이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눈을 질끈 감은 그 순간.

휘이익. 푹!

단검이 날아와 마물의 옆통수를 관통했다.

검은 마물은 에슬린의 얼굴에 빨간 피를 점점이 뿌리고, 오두막 벽에 가 박혔다.

터어엉, 단검임에도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묵직한 진동이 느껴졌다.

“헉…….”

어디선가 희미한 말 울음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곧이어 무너진 문으로부터 커다란 그림자가 등장했다.

남자는 정면에서 우글거리던 마물들을 베어 넘기며 순식간에 길을 만들었다. 눈으로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잡을 수 없을 정도였다.

툭, 툭. 그저 무언가가 두 동강 나는 소리만이 선연했다.

크으륵! 마물의 피 끓는 울음소리가 소름 끼쳤다.

“결계를 잠깐 거둬, 마법사.”

우글거리던 마물들의 사체를 밟고, 그가 중얼거렸다.

“나한테 명령하지 마십시오!”

그러면서도 디에리안은 결계에 살짝 틈을 만들었다.

단숨에 이쪽으로 다가온 남자는 달빛을 몰고 온 사람 같았다. 그의 탄탄한 어깨 윤곽을 타고 푸른 달빛이 은은하게 빛났다.

“하…….”

그는 안도의 숨을 길게 내뱉었다.

“앞으로 집터를 정할 땐 신중하도록 해, 젝스 에티우드.”

빌어먹을 숲 같으니라고. 낮은 중얼거림이 이어졌다.

“테베트 경?”

에슬린은 멍해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그가 꼼꼼한 눈빛으로 그녀의 무사를 확인하며 뺨에 묻은 피를 닦아 냈다.

“다친 덴 없습니까?”

“네, 전…… 덕분에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테베트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그녀의 뺨을 몇 번 더 쓸었다. 그러곤 허리를 바로 세워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봐요, 공작 각하! 이런 곳에 왜 마물이 나타난 겁니까!”

디에리안이 한계치까지 결계를 펼쳐 사방을 수호하고 있었다. 테베트가 한바탕 모두 죽였는데도, 새로운 마물들이 쉴 새 없이 침입해 들어왔다.

“또 포위당했잖습니까! 보고만 있을 겁니까?”

고위 마법을 겹겹이 두른 마법사가 잔뜩 예민해진 얼굴로 소리쳤다. 그 말에 에슬린도 정신을 차렸다.

“그래요. 이게 대체 무슨 일이죠?”

“불시에 소규모 마물 포털이 발생했다고 합니다. 황궁에서 감지가 늦었어요.”

“그런…….”

“제가 너무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그는 힐끔 제가 꿰뚫은 마물을 바라보았다.

콰앙!

갑자기 오두막이 크게 흔들렸다. 천장에서 나무 부스러기와 먼지들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후방인 주방 쪽마저 뚫린 듯했다. 이대로라면 오두막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제길! 젝스 경! 여기 마물 사이에서 뭐 유명한 데라고 소문이라도 난 겁니까?”

“아뇨. 당연히 그런 건 아닐 겁니다, 디에리안 님.”

“악! 반응 재미없어! 그보다! 이제 그만 놀고 여길 빠져나갈 생각을 좀 해 보는 건 어떻습니까? 마물 먹이로 죽는 게 아니라 깔려 죽을 것 같은데요!”

“마물은 내가 유인하지.”

테베트가 툭 내뱉었다. 그러자 신경질적으로 소리치던 디에리안이 입을 딱 다물었다. 딱히 납득하는 표정은 아니었다.

“뭐라고요? 드디어 정말 돌아 버리신 겁니까?”

“곧 내 부관이 병사들을 이끌고 올 거다.”

워낙 다급하다 보니 혼자 먼저 도착했으나, 제롬이 그의 뒤를 따라오고 있었다.

“그건 위험해요, 테베트 경.”

잠자코 있던 에슬린이 말했다.

테베트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디에리안을 응시할 때와는 정반대인 다정한 시선이 하얀 얼굴에 닿았다.

“당신은 쫓기는 몸이니 황궁 병사들과는 마주치지 않는 게 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정도는 일도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제가 몇 살 때부터 전쟁에 나갔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순간 에슬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테베트는 주변을 훑어보느라 미처 그 변화를 감지하지 못했다.

에슬린은 그의 단단한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언제부터 그가 마물 전쟁에 참전했냐고?

왜일까?

예전이었으면 몰랐을 그 답을, 왜 지금, 어렴풋이 알 것만 같은 거지?

‘첫 전쟁 말입니까? 잘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열 살 때일 겁니다.’

그렇게 말하던 얼굴과 말투가 선명했다. 그 말에 안타까워하던 자신의 감정까지도.

문득 바닥을 구르는 빈 물약 병에 시선이 닿았다.

크르르르! 쿵! 쿵!

“주군! 각하! 시간이 없습니다!”

우직하게 버티던 젝스가 소리쳤다. 인내심을 잃은 마물들이 다시 결계에 몸을 부딪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터지고, 찢기고, 잘리고.

눈에 담기도 끔찍한 광경들이 연이어 펼쳐졌다.

“자, 서두르십시오.”

테베트는 에슬린을 왼쪽 창가로 밀었다. 아직 마물들이 침투하지 않은 방향이었다.

손에 쥔 검을 한 번 더 말아 쥐며 그가 정면을 응시했다. 이런 일은 숨 쉬는 것보다 익숙한 사람처럼 보였다.

“저 둘이라면 이번에야말로 목숨을 걸어서라도 당신을 지킬 테니 괜찮을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에슬린이 그가 아무 생각 없이 중얼거린 말을 곱씹었다. 표정이 싸하게 굳어져 갔다.

“젝스 에티우드.”

“알고 있습니다, 각하.”

젝스는 테베트 대신 에슬린의 앞을 막아섰다.

“이봐, 마법사. 뭘 꾸물거리는 거지?”

“네! 갑니다! 말하지 않아도 각하를 방패 삼아 도망칠 거라고요! 으악, 징그러워!”

디에리안은 결계에 몸이 잘려 죽는 마물들을 보며 두 발을 쾅쾅 굴렀다.

“빨리 움직여. 그리고……”

“네, 네! 털끝 하나도 다치게 하지 않을 겁니다! 각하께서 그렇게 무시무시한 얼굴로 굳이 부탁하지 않아도 알아서 잘할 거라고요. 젝스 경!”

디에리안의 신경질적인 부름에 젝스가 움직였다.

“주군, 실례하겠습니다.”

“잠시만.”

에슬린은 손을 들어 그를 저지했다. 테베트를 향해 몸을 돌렸다.

“테베트 경.”

“에시?”

“이게 당신의 선택인가요?”

어딘지 냉정하게까지 들리는 어조였다. 테베트는 순종적인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렇습니다.”

순간 에슬린의 푸른 눈동자에 많은 감정들이 일렁였다. 하지만 그녀는 모든 걸 나중으로 미뤄 두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아직은.

“그렇다면 맡길게요. 대신, 이걸 받아요.”

“이건?”

“없는 것보단 나을 거예요.”

그녀가 건넨 건 투명하고도 붉은 마법석이었다.

펠리서스? 흘끔 이쪽을 바라보던 디에리안이 중얼거렸다.

테베트가 잠시 멍한 얼굴로 제 손안을 내려다보았다. 영롱한 붉은색 보석은 마치 제 눈동자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조금 감격에 젖어 중얼거렸다.

“당신에게 받는 첫 선물이군요.”

‘……아닐 텐데.’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생각했다.

‘이걸 내게 왜 주는 거죠?’

에슬린이 테베트에게 준 첫 선물은, 그녀가 첫 재배에 성공한 겨울 포도였다.

그러나 에슬린은 덧붙이지 않고 몸을 돌렸다. 지금은 일단 여길 벗어나는 게 우선이었다.

“그럼 우린 도망치자, 디엘. 젝스 경.”

망설임 없는 말투였다.

테베트 리페리우스의 실력은 알고 있다. 그러니 걸림돌이 될 뿐인 자신은 없는 게 나았다.

젝스가 에슬린을 가볍게 안아 들었다. 디에리안은 서서히 결계의 범위를 좁히며 오두막에서 빠져나갈 수 있도록 길을 만들었다.

크아악!

세 사람을 향해 마물이 달려들었다.

“감히 어딜.”

테베트가 움직였다. 검의 움직임을 따라잡기도 전에, 마물은 피를 흩뿌리며 쓰러졌다.

알 수 없는 요요한 기운이 그의 검날에 스며 있었다. 눈에 보일 정도로 선명한,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뿜는 검기였다.

“근처에 동굴이 있습니다. 거기서 뵙겠습니다, 각하!”

젝스가 외쳤다. 테베트는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에슬린은 그가 가는 가죽끈이 달린 마법석을 목에 거는 걸 보았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타십시오!”

디에리안이 외쳤다. 세 사람은 그가 마법으로 만든 푸른 말을 타고 달렸다.

쿠우웅!

오두막이 있는 곳으로부터 무지막지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에슬린은 돌아보지 않았다.

“주군?”

“괜찮아. 난…… 괜찮아.”

그녀는 말 위에서 주문처럼 중얼거렸다. 바로 옆에 붙어 달리던 젝스가 걱정스러운 시선을 던졌다.

꽈아악. 고삐를 쥔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나아 가던 손목이 다시 시큰거렸다.

그는 괜찮을 것이다.

그건 소망이 아닌 확신이었다.

‘괜찮지 않은 건 따로 있지…….’

파도처럼 밀려드는 이 기억.

이 기억은 정말 괜찮은 게 맞는 걸까?

물약을 삼킨 식도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듯했다.

깨문 입술에서 비린 쇠 맛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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