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크아아!
풀숲에서 불쑥 마물이 튀어나왔다. 젝스가 검을 휘둘러 그것들을 베어 냈다.
“이게 무슨 소규모 마물 포털입니까! 거의 산 전체에 포털이 나타난 것 같은데! 눈, 입, 귀 셋 중 하나는 어디 잘못된 거 아닙니까? 저 각하!”
“디에리안 님! 조심하십시오!”
“으아악! 눈이 세 개! 진짜 징그러워!”
디에리안은 마력을 이용해 마물을 터뜨렸다. 붉은 살점이 허공으로 흩어졌다.
“주군, 괜찮으십니까?”
마법으로 만든 푸른 말은 속도가 느렸다. 거친 산길을 헤쳐야 하는 데다, 심한 오르막길이었기 때문이었다.
“하…… 난 괜찮아.”
에슬린은 지끈대는 머리를 짚으며 대답했다. 그녀는 중간부터 젝스의 말에 올라탄 채였다.
몸에 힘이 점점 빠져 도저히 지탱하고 있기가 어려웠다.
가만히 지켜보던 디에리안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약 기운이 돌고 있군요. 동굴까지 서두르는 게 좋겠습니다. 아, 진짜 이것만큼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어쩔 수 없네요…….”
크르르! 그때 풀숲이 흔들리며 또다시 마물들이 튀어나왔다.
“잠시 좀 떨어지십시오, 젝스 경.”
디에리안이 마물을 터뜨리며 앞으로 나섰다.
“디에리안 님?”
“제가 마력 부족으로 짐덩이가 되거든 젝스 경이 거둬 줘야 할 겁니다. 아니면 평생 원한을 품고 젝스 경의 옷장 유령이 되어 매일 괴롭힐 거니까…….”
“유령은 싫습니다.”
휙. 디에리안이 손을 크게 휘둘렸다.
마른 손바닥 위로 순식간에 마력이 촘촘하게 모여들었다. 둥근 공 형태를 이룬 마력구가 그의 손바닥 위에 떠올랐다.
슈우욱! 이윽고 푸른 공이 수십, 수백, 수천 개로 쪼개져 사방으로 쏘아져 나갔다.
“……!”
산이 한 번 크게 진동했다. 저 멀리 새들이 푸드덕 날아올랐다. 지면이 묵직하게 꿀렁이자 푸른 말이 크게 앞발을 들었다.
퍼엉! 펑! 펑!
튀어 오르던 마물이 안쪽에서부터 터지듯 폭발했다.
“이게 대체…….”
젝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폭발음은 레비브 산기슭 전체로 한참 동안 이어졌다.
그러기를 잠시. 얼마 후 진동이 멈추었다. 곳곳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고, 옅은 피 냄새가 바람에 실려 왔다.
“…….”
에슬린은 가만히 고개를 들었다.
그야말로 초토화된 주변이 눈에 들어왔다.
산더미처럼 쌓인 마물 사체를 보며, 그녀는 디에리안을 물끄러미 응시했다.
“왜 진작하지 않았냐는 듯한 눈으로 보지 마십시오.”
디에리안이 숨을 헉헉 몰아쉬며 말했다.
“그럼…… 말로는 해도 됩니까?”
피로 번들거리는 제 검을 흘깃거리던 젝스가 중얼거렸다.
“공작 각하가 마물 수를 미친 듯이 줄여 놨기 때문에 가능했던 겁니다. 그게 아니었다면 제 목숨을 걸어도 절대 불가능……”
“디엘!”
냉랭하게 쏘아붙이던 디에리안의 몸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이내 그의 마력으로 움직이던 푸른 말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괜찮아?”
“주군.”
바닥에 내려선 에슬린이 비틀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린 건 에슬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제게 기대십시오.”
젝스가 그녀를 훌쩍 안아 들었다.
“하지만 디엘이…….”
“괜찮아요, 괜찮아…… 마력을 모두 쓴 건 아니니 걸을 만은 할 겁니다.”
디에리안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그는 품 안에서 마력 포션 두 개를 꺼내 연달아 마셨다.
“아, 젝스 경이 그 곰 같은 팔만 좀 빌려주면 좋겠군요……. 물론 저도 젝스 경도 모두가 내키지 않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않습니까. 지금 제 다리가 방금 태어난 고라니 새끼처럼 후들거리고 있으니…….”
“알겠으니 그만 말씀하십시오.”
후우우, 디에리안은 긴 숨을 내뱉었다.
젝스는 에슬린을 안지 않은 다른 팔로 그를 지탱했다.
“자. 동굴까지 얼마 안 남았습니다. 남은 마물은 저 돌아 버리신…… 돌아 버린 각하한테 맡기고 우린 빨리 가자고요…….”
10년쯤 폭삭 늙은 것 같은 목소리로 마법사가 중얼거렸다.
에슬린은 젝스의 품에서 잠시 정신을 잃었다. 물약의 힘을 더는 버티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눈을 뜨니 검은 천장이 보였다.
서늘한 공기가 뺨에 닿았다. 어디선가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축축한 이끼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아무래도 무사히 동굴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역시…… 디에리안 프레이는 뛰어난 마법사군.
다시 눈을 뜬 그녀가 제일 먼저 한 생각이었다.
“…….”
에슬린은 가만히 몸을 일으켰다. 툭. 저를 덮고 있던 디에리안의 로브가 미끄러져 내렸다.
내부는 어둡고 고요했다. 은신처처럼 넓게 파인 동굴은 외부로부터 몸을 피하기에 딱 알맞았다.
벽에는 마법으로 만들어 낸 불빛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고, 앞에는 마법 실드가 겹겹이 둘러싸고 있었다.
‘마력이 부족해 힘들었을 텐데.’
에슬린은 긴 꿈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한숨을 내쉬었다.
그 기척에 마력 포션을 들이켜던 디에리안이 고개를 돌렸다.
“전하, 눈을 뜨셨…… 지금 우시는 겁니까?”
“주군?”
가까이에서 보초를 서던 젝스 또한 놀라 다가왔다.
“…….”
에슬린은 손을 들어 뺨을 문질렀다. 투명한 물이 점점이 묻어났다. 그녀는 멍하게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설마…….”
디에리안이 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기억이 모두 돌아온 겁니까?”
에슬린은 잠시 그 짙은 눈동자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털썩,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디에리안이 주저앉았다.
“드디어…….”
젝스는 에슬린의 곁에 곧은 자세로 몸을 낮추었다.
“다행입니다, 주군.”
자신을 올려다보는 충직한 두 쌍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에슬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디엘, 젝스 경.”
동굴의 벽을 타고 나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금껏 고생 많았어.”
그러자 두 남자의 얼굴이 여러 가지 감정을 담고 꿈틀거렸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똑, 똑.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선명했다.
침묵을 깬 건 조금 떨리는 디에리안의 목소리였다.
“그 말씀을…… 그 말씀을 들었으니 전 이제 됐습니다.”
그는 아주 먼 길을 돌아온 사람처럼 피곤한 얼굴이었다.
“디엘.”
“그보다 이제 답해 주십시오, 전하.”
에슬린은 가만히 눈을 내려 그를 응시했다.
“전하께선 왜 기억을 잃으셨던 겁니까?”
“…….”
“그건, 그건 그런 마법이 아니었습니다!”
디에리안이 목소리를 높였다. 젝스가 그런 그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건 그저 전하의 영혼만을 옮기는, 그런 마법이었는데. 그렇게 기억에 문제가 생길 거라곤. 저는…… 우리는…….”
어울리지 않게 조금 흥분한 듯한 목소리였다. 늘어뜨린 그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전하께 사실을 털어놓지도 못하고, 애꿎은 기억 물약이나 만드느라 죽을 뻔했습니다!”
“알아.”
에슬린이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디에리안은 입술을 말아 물었다.
“넌 충분히 잘해 줬어. 고마워, 디에리안.”
그녀는 디에리안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두어 번 토닥이니 격한 감정으로 들썩이던 어깨가 서서히 잠잠해졌다.
마법사의 목울대가 몇 번 꿀렁거렸다. 이윽고 그는 아주 길고 긴 숨을 내뱉었다.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땐 평소의 싸늘하고도 퉁명스러운 낯을 되찾은 채였다.
“그래서. 말씀 안 해 주실 겁니까? 왜 기억을 잃으셨는지에 대해서요?”
“글쎄…… 잘 기억 안 나. 아무래도 그것까진 떠오르지 않은 것 같아.”
“전하.”
“나중에, 디에리안.”
에슬린이 속삭이듯 말했다.
디에리안은 콧잔등을 씰룩였다.
지금 말할 생각은 없단 말씀이시군.
몹시 못마땅했지만, 그는 곧 받아들였다. 에슬린이 입을 다물어 버리면 저로선 강제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체념한 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하아. 알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전하의 고집을 꺾겠습니까? 언젠가 마음 내키면 알려 주세요.”
그 말에 에슬린은 애매하게 웃었다.
“마력을 어느 정도 회복했으니, 결계나 강화해야겠습니다. 전하께서는 좀 더 쉬세요. 젝스 경, 절 좀 도와주십시오.”
“예, 디에리안 님.”
두 사람은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 뒷모습을 응시하던 에슬린은 다소 거친 손길로 제 얼굴을 닦아 냈다. 손바닥이 금세 축축해졌다.
동굴 내부를 느리게 훑어보았다.
문득 한쪽 구석에 있는 물웅덩이에 시선이 닿았다. 불빛이 닿지 않는 곳이라 그런지 웅덩이의 물이 온통 검게 보였다.
똑.
천장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그 반동으로 검은 물이 튀어 올랐다.
마치…… 그날 마신 독배처럼.
‘에슬린 베르타니아 황녀, 그대가 마실 독배를 가져왔다.’
아. 그렇구나.
에슬린은 그제야 깨달았다.
무정한 얼굴을 가장하고 있었지만, 그건 그의 고통을 참는 표정이었다.
‘테베트 경은…….’
순간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묵직한 진실이 연기처럼 차올라 곧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처음부터.’
에슬린은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눌렀다.
‘처음부터 내 편이었던 거야.’
그는 하녀를 사랑하는 남자가 아니었다.
그는.
‘내가 선택한 건 에슬린 베르타니아 당신입니다.’
에슬린 베르타니아를 선택한 남자였다.
‘난 두 번 다시. 리페리우스의 이름 뒤에 비겁하게 숨지 않을 겁니다.’
최후의 최후에 가서야 알게 된 진심.
마지막 순간이 와서야 비로소 듣게 된 그 말.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와중에도, 에슬린은 그 말이 기꺼워 어쩔 줄을 몰랐다.
하지만.
[순리를 거스른 죄, 대가를 치러야 한다.]
신은 잔혹하리만치 공평했다.
‘마우시스!’
[때마침 네게 대가로 받을 만한 소중한 것이 생겼구나.]
“……대가라.”
에슬린은 천천히 손바닥에 묻었던 얼굴을 들었다. 촉촉이 젖은 눈동자가 어느새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다.
시릴 듯 푸른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도 고요해 보였다.
‘빙의의 대가라.’
에슬린은 입 안 살을 깨물었다.
테베트가 돌아올까?
이젠 그마저도 확신할 수 없게 됐다.
‘하지만 당신 뜻대로 되진 않을 겁니다, 마우시스.’
흐릿한 불빛이 흰 얼굴 위로 일렁거렸다.
‘난 더 이상 피하지도, 순응하지도 않을 거니까.’
기껏 받은 두 번째 목숨이다.
못다 이룬 것에 대해 미련을 남기기엔, 당신이 준 삶이 너무 아깝지 않은가?
결심을 마친 푸른 눈동자에 번득이는 빛이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