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각하께서 생각보다 늦으시는 것 같습니다.”
결계 너머를 응시하며 젝스가 말했다.
동굴 입구에 겹겹이 친 푸른 장막은 바깥으로부터 완벽하게 내부를 보호해 주고 있었다.
하아암, 늘어지게 하품하던 디에리안이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그냥 우리끼리 산을 넘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괴물 같은 각하 따위, 죽여도 죽지 않을 위인이니 알아서 잘 오겠죠.”
“…….”
에슬린은 미묘한 얼굴로 디에리안의 로브를 차곡차곡 접었다.
평평한 바위에 걸터앉자 차가운 돌의 온도가 느껴졌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디에리안이 다가왔다. 그는 근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네? 언제까지고 이 동굴에 있을 수만은 없지 않습니까, 전하?”
“글쎄…….”
“젝스 경, 이 산을 넘으면 롭시온이라는 도시가 있지 않습니까?”
“예. 꽤 큰 도시입니다. 수도와도 가깝습니다. 마차로 반나절 거리니까요.”
흠, 디에리안이 짧은 소리를 냈다.
“롭시온에 가서 에르단 전하께 연락을 취하죠. 아니면 프레이 백작령으로 갑시다. 아예 남부로 떠나 버려도 되고요. 때마침 남부에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네가 남부에 아는 사람이 어딨…… 잠시만.”
순간 에슬린이 말을 멈추었다.
왜요? 디에리안이 묻자 그녀는 조용히 하라는 듯 검지를 입가에 가져다 댔다.
“무슨 소리 들리지 않아?”
살짝 미간을 구긴 에슬린이 속삭였다. 디에리안과 젝스는 숨소리를 죽인 채 신경을 집중했다.
소리는 결계 밖으로부터 들려왔다.
쩌저적. 쩌적.
무언가가 갈라지는 것 같은, 혹은 깨지는 것 같은 소리였다.
젝스가 민첩하게 검을 뽑아 들었다. 디에리안 또한 몸을 일으켜 마력을 둘렀다.
동시에 두꺼운 푸른 장막에 균열이 갔다.
“……!”
결계를 찢고 등장한 남자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희미한 불빛을 반사하는 검붉은 눈동자가 야생 동물의 것처럼 선명하게 번들거렸다.
“테베트 경……?”
에슬린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가 동굴 안으로 들어와 내부를 쭉 살폈다.
어렵지 않게 눈이 마주쳤다.
아무런 감정이 담기지 않은 눈.
에슬린은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
가만히 있던 디에리안이 중얼거렸다. 혼이 빠진 목소리였다.
“지금 제 결계를 찢은 겁니까!”
그가 왁 소리쳤다. 비틀비틀 다가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부서진 결계를 어루만졌다.
“…….”
그러거나 말거나, 테베트는 에슬린을 향해 직진할 뿐이었다.
철컥, 철컥. 그가 걸을 때마다 묵직한 쇳소리가 났다. 에슬린은 눈동자를 굴려 그의 손을 응시했다.
검을 뽑을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지?
철컥. 맹수의 눈을 한 남자가 에슬린의 앞에 긴 그림자를 드리우며 섰다.
“후우.”
긴 숨과 함께 그가 몸을 낮췄다. 망토 자락이 크게 펄럭이며 함께 바닥에 내려앉았다.
“다친 곳은요?”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슬린은 홀린 듯 그를 바라보았다.
“……없, 없어요.”
순간, 그에게 베이는 상상을 했다.
에슬린은 아찔한 기분에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자신을 살피는 붉은 눈동자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렇겠죠! 제가 혼신의 힘을 다해 세운 결계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젠 안 괜찮을걸요? 그걸 누가 쫙 찢어 버린 탓에 마력이 고갈된 불쌍한 나란 마법사가 또다시……”
“시끄럽긴.”
테베트가 이를 갈며 무언가를 휙 던졌다. 디에리안은 반사적으로 그가 던진 물건을 받아 들었다.
“이, 이건!”
물건의 정체를 알아챈 디에리안의 낯빛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대용량 마력 포션이었다. 그는 전에 없이 퍽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계 한두 개쯤 더 깨 먹어도 기꺼이 용서하겠습니다, 각하.”
테베트는 비웃듯 짧게 코웃음 칠 뿐이었다.
그가 몸을 돌려 에슬린의 왼손을 감아쥐었다.
“손목이 또다시 안 좋아졌군요.”
커다란 손이 닿자 저절로 몸이 얼어붙었다. 디에리안과 젝스의 시선이 에슬린의 손목에 와 박혔다.
“역시, 당신 측근이라는 놈들은 하나같이 다 쓸모없는 놈들뿐입니다.”
측근?
에슬린은 작게 입술을 벌렸다.
제 귀가 잘못된 걸까? 단숨에 혼란이 찾아왔다.
“지금…… 뭐라고?”
“기억이 돌아온 게 아닙니까?”
테베트가 턱을 기울였다. 옅은 불빛을 반사한 그의 머리카락이 슬쩍 움직였다.
“그걸, 어떻게……?”
“저 떠벌이가 여기에 있는 걸 보니, 뭐가 됐든 기억 마법을 완성해 온 것 같아서 말입니다.”
“…….”
“오두막에 빈 약병이 떨어져 있기도 했고.”
그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에슬린의 손목 붕대를 단단히 여며 주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바위에 걸터앉은 에슬린의 손목을 들여다보는 눈빛이 몹시 진지했다.
문득 그의 목에 건 빛나는 붉은 마법석이 눈에 들어왔다.
“……테베트 경, 나는……”
“에시.”
테베트는 손목에 시선을 둔 채 그녀의 말을 막았다.
“제가 당신에게 한 맹세도 제대로 기억이 났나요? 그 맹세를 누구에게 한 건지도, 전부?”
“…….”
두 사람 사이에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네.”
침묵을 깬 에슬린의 대답에, 테베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그림 같은 미소가 다정히 떠올랐다.
“그거면 됐습니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건 알겠지만, 그건 무사히 이 산을 빠져나가고 난 다음에 하도록 해요.”
그는 그렇게 말하며 에슬린의 손등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에슬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베트의 눈빛이 더욱 짙어졌다.
“무사히?”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디에리안이 말했다. 그는 테베트의 말속에서 이상한 부분을 감지한 듯했다.
“마물을 모두 없앤 거 아니었습니까?”
“핵을 아직 파괴하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핵이 없었지.”
“뭐라고요?”
디에리안이 꽥 소리쳤다. 테베트는 몸을 일으켜 디에리안과 젝스를 향해 살짝 고개를 돌렸다.
“내 부하들이 찾고는 있지만, 어쨌든 이 산은 안전하지 않아.”
낭패였다. 당연히 마물 포털의 근원이 되는 핵까지 파괴한 줄 알았는데.
“하아. 이게 정말 무슨 일인지. 마치 누군가 의도적으로 마물을 풀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그 순간 에슬린이 홱 고개를 돌렸다.
“디에리안.”
싸늘한 표정의 마법사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기를 잠시.
그는 한쪽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네? 설마, 설마요. 그냥 한 말인데요?”
“하지만 네가 예전에 말했잖아. 인간이 마물을 부릴 수도 있다고.”
“마물을 부리는 일은 흑마법사 정도나 되어야 가능한 거라고요. 대체 어떤 정신 나간 마법사가 검은 피로 타락해 흑마법사로…….”
“…….”
에슬린은 가만히 디에리안을 응시했다. 그 시선의 의미를 읽은 디에리안이 움찔 몸을 떨었다.
“설마, 타툴란 얘길 하려는 건 아니시죠?”
테베트가 고개를 기울여 에슬린을 보았다. 타툴란이라는 이름이 나오자 젝스 또한 반사적으로 제 검을 말아 쥐었다.
그건, 모두에게 실책으로 남은 사건이었다.
디에리안이 냉소적으로 덧붙였다.
“걘 죽었습니다! 잊으셨습니까? 몇 년 전에, 전하를 몰래 끌고 갔다가 여기 계신 공작 각하께 심장이 꿰뚫려 죽었다고요!”
“하지만 그때도 기운이 이상하긴 했어.”
에슬린이 중얼거렸다. 저를 데려갔던 뱀처럼 노란 눈을 가진 마법사를, 에슬린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그는 죽었다. 하지만.
‘뭐지. 이 찜찜함은……?’
“흑마법사가 되는 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닌데…… 젠장!”
디에리안이 신경질적으로 바닥의 돌을 콱 찼다. 벽 한쪽을 맞고 튀어 나간 돌은 데굴데굴 구르다 어디론가 사라졌다.
제 머리를 헝클어뜨린 마법사가 수심 깊은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요. 저는 남아 이 산을 좀 더 살펴봐야겠습니다.”
“흑마법의 기운을 조사하겠단 건가?”
테베트가 물었다.
“네. 그러니 전하께서는 먼저 산을 넘으십시오. 흑마법사의 소행이 맞는다면, 이 산은 정말 위험합니다.”
“너도 혼자선 위험해.”
에슬린이 만류했다. 그러자 잠시 분위기를 지켜보던 젝스가 나섰다.
“주군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디에리안 님과 함께 남겠습니다. 그러니 주군께서는 걱정하지 마시고 산을 벗어나십시오.”
“예에? 젝스 경이요? 왜요? 드디어 제 마법 제자로 들어올 생각이 든 겁니까?”
디에리안이 반색하자 젝스는 합 입을 다물었다. 에슬린이 가볍게 눈을 흘겼다.
“젝스 경을 놀리지 말랬지.”
“진심인데요?”
젝스의 얼굴에 일순 후회의 빛이 스쳤다.
“그럼…… 결정됐군요.”
테베트가 에슬린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옆을 돌아보니 부드러운 낯을 한 남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번엔 제가 당신을 지키도록 하죠.”
* * *
‘롭시온에서 만나. 도착하면 디엘 네가 나에게 마법 전서구를 띄우도록 해. 늘 그랬던 것처럼.’
에슬린의 당부와 함께 네 사람은 헤어졌다.
테베트는 에슬린의 손을 쥐고 성큼성큼 숲길을 헤쳤다. 푸른 보름달이 그들의 앞길을 환하게 밝혀 주고 있었다.
“걸을 수 있겠습니까? 안 되면 제가 당신을 안고……”
“전혀 문제없으니 앞장서세요.”
단호한 대꾸에 그는 피식 웃었다.
조금이라도 피곤한 기색이면 바로 안아 들 생각이었는데. 역시 제 흑심 따위, 에슬린에겐 모두 간파당한 모양이었다.
테베트는 한 손으로 수풀이며 나뭇가지들을 헤치며 길을 만들었다. 에슬린과 마주 잡은 손에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
그는 순간 가슴이 뻐근해지는 걸 느꼈다.
제가 일방적으로 잡는 것이 아닌, 함께 맞잡아 오는 손의 온기…….
이 따스함을 얼마나 바라 왔던가?
휘이잉.
그때 강한 산바람이 불어왔다.
테베트는 본능적으로 몸을 틀어 바람으로부터 에슬린을 보호했다.
양 눈을 질끈 감고 제 품에서 바람을 버티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그 순간마저 못내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바람은 아주 천천히 멎어 들었다.
테베트는 그녀를 감쌌던 손을 내렸다. 금세 고요해진 주변은, 다시 풀벌레 우는 소리와 이따금 야생 동물이 움직이는 소리만이 들려올 뿐이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테베트 경?”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테베트는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맑고도 명료한 목소리가 귓가에 맺혔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제 품 안에 있는 작은 여자. 푸른 눈동자와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가진…….
……이건, 뭐지?
테베트의 눈이 탁하게 흐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