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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53화 (53/147)

53화

‘또야.’

에슬린은 생각했다.

‘또 저런 눈으로 나를…….’

온몸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그녀는 몰래 입술을 물었다. 제 손을 잡고 묵묵히 걷는 남자의 옆얼굴이 달빛에 흔들리고 있었다.

잠시 흐려졌던 그의 눈동자는 다시 평소의 기색을 되찾은 상태였다.

“에시?”

시선을 느낀 테베트가 한쪽 눈썹을 치켜들었다.

“표정이 왜 그러죠?”

“……아니에요.”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옅게 웃었다. 그 미소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테베트가 맞잡은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 산기슭만 지나면 말을 탈 수 있을 겁니다. 힘들면 제가 당신을 안을 테니 버티지 말고 말해요.”

“네, 힘들면 이야기할게요.”

에슬린은 짧게 대꾸한 뒤 고개를 돌렸다.

분명 뭔가가 신경 쓰이는 눈치인데. 테베트는 에슬린의 가라앉은 옆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당장이라도 안아 들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억눌러야만 했다.

조금 더 의지해 주면 소원이 없겠군. 그는 속으로 한탄을 삼켰다.

두 사람은 다시 묵묵히 숲길을 걸었다.

마물의 영향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 디에리안이 펼친 마법 때문인지 갈라지고 부러진 나무들이 간간이 눈에 띄었다.

음?

문득 드는 위화감에 에슬린이 우뚝 멈추어 섰다.

“테베트 경…….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네, 그렇군요.”

테베트 또한 위화감을 감지했는지 날카로운 눈빛으로 주변을 넓게 훑었다.

그는 반으로 뚝 갈라진 나무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나무. 분명히 지나쳤을 텐데.’

에슬린은 미간을 구겼다.

“아까부터 주변 풍경이 하나도 바뀌지 않고 있어요.”

“감히 누가 이따위 짓을.”

테베트가 으르렁대며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쿠우웅.

그 순간, 불길한 땅울림이 느껴졌다.

“물러서요.”

그는 에슬린을 제 등 뒤로 숨겼다. 사방을 경계하는 검붉은 눈동자가 칼날 같은 빛으로 번득였다.

에슬린의 시선이 크게 움직였다.

‘하늘빛이…….’

하늘이 기묘한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간간이 불어오던 산바람도 어느새 뚝 멈춘 채였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감각.

에슬린은 직감했다.

‘마법사야.’

“테베트 경, 마법사의 결계 안인 것 같아요.”

“아무래도 그런 모양이군요.”

그는 거칠게 혀를 찼다.

대체 언제부터?

저벅, 저벅. 멀리서 느린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지?”

테베트의 어깨가 바짝 경직했다. 그의 칼끝이 방향을 조준하듯 느리게 움직였다.

눈앞의 검은 수풀이 크게 흔들렸다.

“오, 드디어 만났잖아!”

어둠을 헤치고 나타난 남자는 낡은 잿빛 로브를 입고 있었다.

버석하게 마른 손가락으로 그는 제 얼굴을 미친 듯이 쓸어내렸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몸짓이었다.

“수상한 황궁 하녀와…….”

노란 눈이 에슬린을 훑고 테베트에게 닿았다.

“리페리우스 공작? 이건 또 무슨 조합이지?”

그는 입술을 씰룩이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해할 수 없기는 에슬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가늘게 눈을 좁혔다. 사위가 어두워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저자는…….”

‘카르단의 마법사?’

에슬린은 눈을 크게 떴다.

“날 기억하는 눈치네.”

마법사가 목을 긁으며 웃었다.

“그럼…… 이 얼굴은 어떨까?”

휙, 그가 마력을 일으켰다.

주름진 그의 얼굴 근육이 크게 꿈틀거렸다. 눈과 코와 입과 피부가 기묘한 형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넌!”

뱀 같은 노란 눈.

에슬린이 손을 들어 입을 막았다. 푸른 눈동자가 커다랗게 부풀어 올랐다.

“에시?”

“테베트 경, 기억나지 않아요? 저 얼굴.”

“무슨……?”

“당신이 심장을 찔러 죽인 남자잖아요.”

테베트와 눈이 마주쳤다. 에슬린은 빠르게 속삭였다.

“저를 끌고 갔던 그 마법사 말이에요.”

“아하.”

그제야 테베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차갑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어쩐지 그때 시체라도 다시 한번 더 죽이고 싶더라니.”

그의 목소리에 살기가 가득했다.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스윽 굴러 앞을 향했다.

“뭘 쑥덕대는 거야?”

마법사가 빙글빙글 웃으며 말했다. 에슬린이 고개를 들었다.

“넌 누구지?”

“내가 누구냐고? 어라, 지금 알아본 거 아니었어? 알면서 왜 물어?”

“빙빙 돌리지 말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에슬린의 목소리가 낮게 진동했다. 눈이 마주쳤다. 마법사의 눈꺼풀이 가늘게 떨렸다.

히죽, 기분 나쁜 웃음이 흘러나왔다.

“왜일까? 그 눈빛, 말투…… 아무리 봐도 어디선가 본 것 같단 말이지.”

그는 광기 어린 얼굴로 한 발자국 다가섰다.

테베트가 단단한 팔을 뻗어 에슬린 앞을 보호하듯 막았다.

“그래서 만나고 싶었어. 망할 아서스 놈이 황궁에서 놓쳤을 땐 열 받아 죽을 뻔했지만 말이야.”

귀를 잡아끄는 이름에 에슬린이 반사적으로 미간을 구겼다.

“아서스 경? 너, 아서스 경을 알아?”

“누굽니까?”

“황궁에서 도움받았던 기사예요.”

흐음. 테베트가 짧은 소리를 내며 눈썹을 까딱거렸다.

에슬린이 재차 물었다.

“아서스 경을 어떻게 한 거야? 네 정체는 대체 뭐고? 대답해. 왜 나를……”

“그만!”

마법사가 빽 소리쳤다. 그는 눈을 깜빡거리며 몹시 히스테릭한 얼굴로 덧붙였다.

“내가 누구냐고? 그건 내가 묻고 싶었던 말이야! 황궁에서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그가 씩씩대던 호흡을 가다듬었다. 일렁이는 광기를 갈무리한 채 비식 웃음을 걸친다.

“대체 네가 누구길래…… 젝스 에티우드와 디에리안 프레이가 목숨 걸고 널 지키는 거냐고?”

그러자 에슬린의 입꼬리가 싸늘하게 올라갔다. 푸른 눈동자가 먹이를 발견한 매처럼 반짝 빛났다.

마법사는 입술을 길게 찢어 웃었다.

“역시 넌 그냥 하녀가 아니라……”

“너구나.”

“뭐가?”

“이곳에 마물을 보낸 게.”

냉랭한 목소리가 고요한 숲에 울렸다.

이번 마물 포털은 지나치게 절묘하고, 또 기묘한 데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를 노리는 듯한 움직임…….

에슬린은 그 이상 현상에 대해 줄곧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하하, 맞아! 내가 만든 거야. 제법이지?”

그는 과장해서 눈을 깜빡이며 손뼉을 쳤다.

“네가 사라진 세하즈강의 절벽부터 샅샅이 뒤지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

“그렇게까지 해서 날 만나 뭘 확인하고 싶었는데?”

“네 영혼!”

“뭐라고?”

“네 영혼을 들여다보고 싶었다고!”

짐작하기 어려운 말에 에슬린의 얼굴이 구겨졌다. 그런 반응을 즐기듯, 마법사가 광기에 찬 얼굴로 허리를 젖혀 가며 소리쳤다.

“네가 에슬린 베르타니아일지도 모르니까!”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문득 옆에서 검을 고쳐 쥐는 소리가 들렸다. 에슬린은 반사적으로 테베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서늘하게 내려앉은 눈동자가 몹시 검고 어두웠다.

“죽이는 게 좋겠습니다.”

낮고 거친 음성이 흘러나왔다.

“잠시만요, 테베트 경.”

당장이라도 튀어 나갈 기세를 에슬린이 만류했다.

죽이는 건 쉽다. 하지만 그 전에 확인해야 할 게 있었다.

에슬린은 손을 들어 앞을 가리켰다.

“저자의 옷을 찢어 봐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테베트는 작은 단도를 꺼내 던졌다.

마법사는 질끈 눈을 감고 소매를 들어 눈앞을 가렸다. 재빨리 몸을 돌렸으나 그의 소맷자락이 부욱 찢어지는 것까지는 막지 못했다.

“역시.”

구름 뒤로 모습을 감췄던 달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탓일까? 마법사의 몸을 얼룩덜룩 뒤덮은 검은 핏줄이 지나치게 선명하게 보였다.

“넌 흑마법사구나.”

죽여도 죽지 않는 몸.

마물을 부리는 능력.

상식을 뛰어넘는 마력과 감지력.

“감히 타락하다니.”

낮은 분노가 깔린 목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흑마법사는 개인의 욕망을 위해 마물의 피를 받아들여, 이 땅에 파괴와 절망만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입니다.’

디에리안은 그렇게 설명했다.

이 땅에 파괴와 절망을 불러일으킬 존재.

‘하지만 이상한 일이지…….’

역사에서도 몇 번 등장하지 않은 정체 모를 흑마법사를 눈앞에 두고도, 에슬린은 별로 두렵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울렁거림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갑자기 옷을 찢다니, 예의가 많이 없네.”

마법사가 옷을 추스르며 말했다.

“그럼 나도 사양하지 않을게.”

노란 눈동자가 번뜩인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검은 마력이 붕 솟구쳤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인지하기도 전, 뇌 속을 크게 한 번 휘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윽.”

“에시!”

머리를 잡고 크게 휘청이는 에슬린을 테베트가 붙잡았다. 간신히 주저앉지 않고 버텼으나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무언가 기분 나쁜 것이 관통한 기분. 차가운 뱀의 혀가 온몸을 핥은 듯한 감각.

“하하하하! 역시! 역시! 역시!”

마법사가 검은 마력을 거두며 소리쳤다. 그는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번쩍 펼쳐 들었다.

“살아 있었어! 나의 황녀님! 에슬린 베르타니아!”

그제야 그가 흑마법을 사용해 에슬린의 정체를 확인한 거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 그렇게 죽었을 리가 없다고 믿었어!”

마법사는 주변을 빙빙 돌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시체처럼 죽어 있던 낯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에슬린은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지끈거리는 두통은 흑마법의 기운에 당한 여파인 듯했다.

테베트가 사납게 물었다.

“무슨 짓을 한 거지?”

“아무것도.”

마법사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마물의 눈으로 영혼을 좀 들여다본 것뿐이야.”

“죽여도 된다고 제발 허락해요.”

테베트가 이를 짓씹으며 속삭였다. 에슬린은 관자놀이를 짚으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노란 눈을 깜빡이는 마법사와 시선이 부딪쳤다.

‘아.’

그 순간 번득이는 빛이 뇌리를 스쳤다.

‘드디어 찾았네.’

네 약점.

에슬린의 한쪽 입꼬리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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