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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54화 (54/147)

54화

눈을 깜빡이던 마법사가 바싹 마른 손가락으로 제 턱을 쓰다듬었다.

“그보다, 어떻게 살아남은 거야? 역시 그 재수 없는 녹색 머리의 작품인가?”

“네 목적이, 대체 뭐야?”

에슬린은 이를 악물며 물었다. 말을 뱉을 때마다 머리가 웅웅 울렸다.

“내 목적?”

“그래. 날 찾은 이유가 있을 거 아니야?”

“당연히 황녀님을 황제로 만드는 거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

“다른 황자들은 싫어. 황녀님이 좋거든!”

“왜?”

그는 대답하는 대신 음산하게 웃었다.

“그냥…… 황녀님이 제일 가치 있어 보였으니까. 내 인형으로 삼기에 말이지.”

에슬린은 피식 웃었다. 유치하기 짝이 없는 말이었다.

더 좋은 장난감을 갖고 싶다는 떼쟁이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뭔가?

“내가 가진 체스 말이 이기는 게 당연한 거잖아? 그래야 내가 가장 위대해지는 거고!”

아, 즐거워라! 마법사가 웃었다.

에슬린은 비웃음 섞인 긴 숨을 내뱉었다.

“그래…… 그때도 그런 정신 나간 소리를 들었던 것 같네.”

예전에 에슬린을 앞에 두고 그런 소리를 지껄였던 게 떠올랐다.

“근데 내가 순순히 네 인형이 되겠다고 했던가?”

에슬린은 짧게 조소하며 몸에 힘을 주었다.

“에시.”

“괜찮아요. 스스로 설 수 있어요.”

테베트의 품에서 벗어나 허리를 펴고 섰다. 다리가 후들거려 그의 팔에 한 손을 얹어 지탱한 채였으나, 표정만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고요했다.

그녀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때도 말했지만, 난 너 필요 없어.”

깔보듯 내리꽂는 말투에 마법사의 얼굴에 실금이 갔다.

“내 곁에는 너보다 뛰어난 마법사가 있으니까.”

“……뭐?”

마법사가 악귀처럼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두 손을 허공에 휘두르며 발작하듯 소리쳤다.

“지금 나보다, 이 타툴란보다! 평범한 마법사에 불과한 디에리안 프레이가 더 뛰어나다고 말하는 거야? 황궁에서 내 정체를 눈치조차 못 챈 그 멍청한 마법사가?”

“그래. 못 들었으면 다시 말해 줄까?”

“이런 건방진!”

다시 검은 마력이 솟구쳤다. 사슬처럼 뻗어 나온 마력이 에슬린에게로 쇄도했다.

이번엔 테베트 또한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휙!

그의 검날이 거칠게 움직였다. 크게 휘두르는 소리와 함께 검은 마력은 곧 힘을 잃고 스러졌다.

“제가 더 참아야 합니까?”

“아뇨.”

에슬린은 싸늘히 덧붙였다.

“이제 죽여요.”

“…….”

“필요한 정보는 다 얻었으니까. 저자의 정체, 목적…… 물론 약점까지.”

나른한 포식자 같은 목소리였다.

“뭐라고?”

고장 난 인형처럼 타툴란의 고개가 삐걱삐걱 돌아갔다.

흑마법사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았다. 그러니 최대한 많은 정보를 캐내야만 했다.

‘어떻게 심장이 뚫리고도 살아났는지 궁금했는데.’

에슬린은 피식 웃었다.

다행히 그는 몹시 경솔하고, 또 쉽게 발끈하는 자였다.

아무리 흑마법사라 한들 불사(不死)인 인간은 없다. 분명 어딘가에 약점이 있을 터.

“테베트 경, 저자의 눈을 노려요.”

“눈?”

“흑마법사의 신체는 마물과 비슷해요. 핵을 부수지 않으면 영원히 죽지 않죠.”

시간이 정지된 듯,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멍청하게도 그 핵을 눈에 숨겨 둔 것 같지만.”

에슬린은 과하게 눈꺼풀을 깜빡이던 마법사의 버릇을 떠올렸다.

거기다 테베트가 단도를 던졌을 때 그는 가장 먼저 눈을 가렸다.

‘칼이 날아오는데 눈을 가리다니.’

본능적으로 자신의 급소를 보호한 것이었다.

비웃음이 흘렀다. 집착하는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약점이 드러나기 쉬운 법이었다.

“닥쳐!”

마법사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그게 대답이었다.

“과연.”

테베트가 즐거운 것을 발견한 사람처럼 웃었다.

위험을 감지한 마법사가 재빨리 마력을 둘렀으나, 그가 한발 더 빨랐다. 테베트는 순식간에 마법사의 눈앞에 서 있었다.

“에슬린 베르타니아아!”

피맺힌 절규가 숲을 갈랐다.

“겁도 없이 그 이름을 입에 담다니.”

“젠장!”

“핵이 있는 곳이 입이었으면 훨씬 더 좋았겠군.”

푸른 칼날이 가차 없이 쏟아져 내렸다. 하얀 궤적이 번쩍임과 동시에, 피 분수가 뿜어져 나왔다.

“푸하하하!”

그러나 타툴란의 피가 아니었다.

“……마물?”

에슬린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갑자기 솟아난 검은 생물체가 마법사를 방패처럼 막아섰기 때문이었다.

테베트의 검에 깔끔하게 베인 마물은 피를 뿜으며 널브러졌다.

“황녀! 에슬린 베르타니아! 그래, 역시 당신은 날 실망하게 하지 않아!”

광기에 물든 목소리가 숲을 울렸다.

테베트가 한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채애앵!

방패처럼 두른 마법사의 결계에 그의 검날이 막혔다. 그러나 테베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의 검이 두꺼운 결계를 망설임 없이 파고들었다.

“이봐, 날 앞에 두고 어디다 정신을 파는 거야?”

“으윽, 내 결계를 이렇게 쉽게 찢다니…….”

마법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렸다. 테베트가 가볍게 목을 꺾었다.

“사실 흑마법이든 그냥 마법이든.”

“…….”

“나한텐 다 같은 사술일 뿐이거든.”

“리페리우스 공작!”

찢어질 듯한 고함과 함께 챙!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제야 주변을 두르고 있던 얇은 장막이 거두어지고 현실 광경이 돌아왔다.

잊고 있던 산바람이 에슬린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때처럼 당할 생각은 없어, 공작!”

타툴란이 발끈하여 소리쳤다. 땅으로부터 불길한 기운이 솟아올랐다.

‘어둠이 뭉치는 것 같아……. 저게 흑마법인 건가?’

저토록 어둠이 짙은 마력은 난생처음 보는 것이었다.

불길한 바람이 불었다. 테베트의 목에 걸려 있던 펠리서스 마법석이 거칠게 흔들렸다.

“건방지긴.”

테베트가 붉은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전장을 누비며 마물들을 상대하던 이였다.

눈앞에 있는 게 흑마법사라 한들 그에겐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제가 망설이면 에슬린이 다친다.

그 사실만이 중요했다.

“조심해요!”

뒤에서 에슬린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마법사의 주변으로 검은 마력이 솟구치며 거대한 돌풍이 일었다. 메마른 나뭇잎들이 일제히 회오리치며 흩날렸다.

“날 얕보지 마!”

마법사가 기이한 모양으로 손가락을 꺾었다. 그 손끝에서부터 검은 마력이 가시처럼 푹, 푹 튀어 올랐다.

바람이 더욱 거세졌다. 나무와 풀숲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테베트 경!”

테베트는 바닥에 검을 꽂아 넣어 몸을 지탱했다. 조금이라도 힘을 풀면 태풍 같은 마력에 휘말릴 것이었다.

우르릉.

설상가상 마른하늘에 벼락이 쳤다.

“걱정 말아요, 에시.”

그가 중얼거렸다. 바람이 거세어 에슬린에게 들렸을지 어떨지 알 수는 없었다.

검은 마력은 창이 되어 날카롭게 그의 몸을 스쳤다. 옷자락이 찢기며 피가 흘렀다. 그러나 동요하지도, 물러서지도 않았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나 보자고, 공작!”

“너야말로.”

마법사가 길게 웃었다. 그가 한 번 더 손을 움직이자 바닥이 꿈틀거리더니 마물들이 재차 튀어 올랐다.

그는 본능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나무를 붙잡고 선 에슬린이 보였다. 다행히 그녀에게까지 마물들이 닿지는 않았다.

그가 모두 베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조금 실망이야.”

“뭐?”

“그 흑마법이라는 거…… 난생처음 보는 종류인 줄 알았는데.”

테베트는 진심을 담아 웃었다.

“고작 마물을 불러내는 게 전부라면, 썩 새롭지도 않아서 말이지.”

그는 어느새 돌풍 따위 상관하지 않고 움직이고 있었다. 마물들이 재차 튀어 올랐으나 그의 검날의 희생양이 될 뿐이었다.

마물의 수가 많았다. 그러나 그 또한 테베트에게는 익숙한 것이었다.

“젠장, 젠장!”

마법사가 이를 으득 갈았다. 테베트가 점점 더 가까워졌다.

그의 모습이 잠시 시야에서 사라졌다 싶은 순간.

“으아악!”

타툴란의 한쪽 눈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그는 자신의 눈을 손으로 누르며 다시 검은 마력을 일으켰다.

“크윽! 아직 왼쪽 눈은 멀쩡해!”

“누가 더 버티나 보자고.”

싸늘한 어조에 타툴란이 포효했다. 수천 개의 바늘 같은 마력이 테베트에게 쏟아졌다.

그때 마물 하나가 그의 옆으로 튀어 나갔다.

“…….”

그는 망설임 없이 제 유일한 무기인 검을 집어 던졌다. 에슬린에게 향하려던 마물이 머리를 꿰뚫린 채 쓰러졌다.

동시에 다른 마물이 테베트에게 달려들었다. 무기가 없는 테베트는 이를 막지 못하고 어깨를 물어뜯겼다.

“테베트 경!”

에슬린이 비명처럼 그의 이름을 외쳤다. 동시에 찌를 듯한 두통이 찾아왔다. 그녀는 머리를 짚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던 테베트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는 듯했다. 어깨를 파고든 마물을 맨손으로 비틀어 죽였다.

재빨리 에슬린에게 달려갔다.

“에시!”

그가 바닥에 쓰러지듯 앉은 에슬린을 부축했다.

에슬린이 겨우 고개를 들었다. 경악으로 물든 짙푸른 눈동자가 테베트의 어깨를 응시했다. 그녀의 입술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떡해요, 피가…… 피가 너무…….”

“전 괜찮습니다.”

“하지만 피가…….”

에슬린이 횡설수설했다. 테베트는 그런 그녀의 얼굴과 몸을 집요하게 살폈다. 다행히 외상은 없어 보였다.

하지만 하얗게 질린 안색이 지나치게 좋지 않았다. 아까부터 그녀는 이상한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흑마법 때문이로군.

테베트는 이를 아득 갈았다. 빨리 저 빌어먹을 흑마법사를 처리하고 그녀를 쉬게 해 주고 싶었다.

한쪽 눈을 잃은 타툴란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말했다.

“그래, 리페리우스 공작. 이깟 마물로는 당신을 쓰러뜨릴 수 없겠지.”

검은 기운에 감싸인 흑마법사의 얼굴은 더 이상 잘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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