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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55화 (55/147)

55화

테베트는 에슬린을 막아서며 근처에 꽂혀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다친 게 왼쪽 어깨라 다행이었다. 사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두 팔이 붙어 있기만 한다면.

“그거 알아? 흑마법은 아주 편리해. 어려운 수식이 없어도 내 맘대로 마력이 움직이거든!”

불길한 빛이 한 번 번쩍였다.

그러자 순식간에 검은 기운들이 한 덩어리가 되어 뭉치기 시작했다.

마법사는 양손을 치켜들고 그 기운을 한데 모아 압축했다.

주변에 있던 나무들이 푹 말라붙기 시작했다. 꽃들도, 풀들도. 모두 오래 타 버린 것들처럼 꺼멓게 죽어 갔다.

“저건…….”

“흑마법으로 주변의 생명력까지 전부 흡수했군요.”

“이제, 어떻게 해야……”

에슬린이 헐떡거리며 말했다.

“뭘 걱정합니까?”

테베트는 부드럽고 다정하게 웃었다.

단단한 손이 에슬린의 이마를 한 번 쓸어 그녀의 식은땀을 가져갔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은 어깨의 부상이 마치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졌다.

“제가 당신 곁에 있을 건데.”

그가 속삭였다. 다정하게 휜 눈과 시선이 마주쳤다.

“에시.”

그가 이마에 두었던 손을 내려 그녀의 볼을 쓰다듬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전 당신을 두 번 다시는…….”

테베트가 말을 멈추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무언가를 참아 내듯 강인한 목울대가 크게 한 번 움직였다.

“두 번 다시는 그런 식으로 잃지 않을 거니까.”

에슬린은 입술을 물었다.

이런 상황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의 마음을 떠올려 본다.

에슬린을 살린 건 그녀를 사랑한 테베트였다.

모든 기억을 잃고 자신을 거부하는 에슬린을 보며, 테베트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그는 어떤 희망으로 하루하루를 버틴 거지?

그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맹세해요.”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거리에서 테베트의 숨결이 닿았다.

“기필코 당신에게, 에슬린 베르타니아에게…… 리페리우스는 물론 제 모든 걸 드릴 겁니다.”

“…….”

“그걸 위해 난 이 모든 시간을 기다렸던 거예요.”

기어코 눈물이 맺혔다. 한 번 깜빡이면 분명 흘러내릴 것이었다.

떨리는 눈동자를 보며 테베트가 다정하게 웃었다.

북부 공작저의 버려진 정원에서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달콤한 미소였다.

“자, 금방 끝내고 오겠습니다. 산을 내려가면 일단 함께 식사를 해요. 그리고 목욕을 하고, 한숨 늘어지게 잔 뒤 당신이 좋아하는 감국차를 마시면서 쉬는 게 좋겠습니다. 그러고 나면 아마 모든 게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거예요.”

“테베트 경, 나는…….”

에슬린은 참지 못하고 눈을 깜빡이고야 말았다. 후드득. 가득 고여 있던 투명한 눈물이 뺨을 적셨다.

테베트는 손을 들어 그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의 등 뒤로 보이는 흑마법의 기운이 지나치게 거대해져 있었다.

“너무 위험, 위험해요.”

“이제 두려울 건 없습니다. 걱정하지 말아요, 에시.”

그의 뜨거운 손이 떨어져 나갔다. 왼쪽 어깨에선 여전히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베트는 오른손으로 단단히 리페리우스의 검을 말아 쥐었다.

“당신은 그저 눈을 감고 기다리면 됩니다. 모든 건 순식간일 거니까.”

망설임 없이, 테베트가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테베트 경!”

에슬린을 가득 감싸고 있던 온기가 멀어졌다. 테베트의 모습이 검은 마력 덩어리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 순간 하늘에서 벼락이 한 번 쳤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울었다.

그가 검은 마력 덩어리로 뛰어들기 전.

붉은 펠리서스 마법석이 마지막 빛을 발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이것이 그와의 마지막일 것이다.

그건, 예감을 넘어선 확신이었다.

“왜…… 왜!”

에슬린은 절규했다.

돌아온 기억 속 제 목소리가 천둥처럼 울려 퍼졌다.

‘왜입니까!’

[순리를 거스른 죄, 대가를 치러야 한다.]

‘마우시스!’

[때마침 네게 받을 만한 대가가 생겼구나.]

‘그게 대체 무엇입니까?’

엄숙한 신의 목소리가 세계를 갈랐다.

[인연.]

그래. 이건 줄곧 각오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너와 저 남자의 인연을 가져가겠다.]

‘안 돼. 안 됩니다!’

아무리 각오한 일이라 한들, 어떻게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신이시여!’

[넌 테베트 리페리우스와 연관된 모든 기억을 잃을 것이다.]

쩌저저적!

그때 완연한 구 형태를 이룬 흑마법의 결정체가 안쪽에서부터 갈라지기 시작했다.

에슬린은 고개를 들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테베트가 기어코 흑마법을 부수는 데 성공했다는 것을.

콰드득.

익숙하지 않은 소름 끼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검은 소용돌이 속 거친 숨을 몰아쉬는 테베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흑마법사가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포효했다.

“말도 안 돼! 어떻게 흑마법을 이렇게 간단히!”

“난 오늘만큼 리페리우스의 피에 감사했던 적이 없어.”

테베트의 비웃는 듯한 목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닥쳐!”

“네 핵 또한 내가 반드시 산산조각 내 줄 테니, 오늘은 지옥 맛이나 먼저 보고 있도록 해.”

“하! 절대!”

마법사가 발악했다.

그는 흑마법의 잔재를 그러모아 제 몸속으로 집어넣었다.

“절대 혼자 죽진 않아, 공작!”

테베트가 그 마법사의 몸에 검을 찔러 넣은 것과 동시였다.

“내 핵은 아직 멀쩡해! 그러니 다시 살아날 거야! 반드시 살아서 에슬린 베르타니아 당신을!”

그가 피 끓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테베트는 한 번 더 그의 눈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그러나 검은 마력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때 테베트가 목에 걸고 있던 펠리서스 마법석에 금이 갔다. 그의 고개가 반사적으로 에슬린 쪽으로 돌아갔다.

“안 돼…… 테베트 경.”

“에시?”

에슬린은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몹시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우뚝. 그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몹시도 급작스럽게.

[만약 네가 우연히라도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그땐…….]

기억 속 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검붉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땐 저 남자가 너를 잊을 것이다.]

‘안 됩니다!’

그래. 그건…….

기억을 찾았을 때부터 각오한 일이었다.

에슬린은 심장이 갈기갈기 찢기는 감각을 생생히 느꼈다.

아…… 그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마주해야만 했을 때.

이렇게 절망스럽고 또 고통스러웠던 걸까?

그렇다면 이건 대가가 맞구나.

구차하게 목숨을 이어 나간 대가.

이제는 오롯이 자신이 감당해야 하는 대가.

“폭발이에요, 테베트 경!”

에슬린이 테베트의 등 뒤를 보며 외쳤다.

한쪽 눈을 잃은 마법사의 몸이 공중으로 떠오르며 크게 부풀었다.

테베트는 뒤를 슬쩍 보곤 눈썹을 구겼다.

‘제 몸을 폭탄으로 만든 거군.’

곧 마력 폭발이 일어날 것이다.

그는 망설임 없이 달려가 무방비한 에슬린을 감싸 안았다.

“안 돼요…….”

가느다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테베트는 눈을 내려 그 흰 얼굴을 바라보았다.

“잊으면 안 돼요.”

“뭐라고 말한 거지?”

테베트가 되물었다. 여자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았다. 그의 신경은 폭발로부터 그녀를 보호하는 데에 전부 쏠려 있었다.

품 안의 여자는 너무나도 애처롭게 떨고 있었다.

‘그런데 내가 왜?’

문득 기시감이 느껴졌다.

그녀의 떨림, 젖은 눈동자, 알 수 없는 말들…….

마치 어디선가 본 듯한.

잊어서는 안 될 무언가를 잊은 듯한…….

그 순간 펠리서스 마법석이 붉게 빛났다.

‘그녀가 없는 삶이 곧 불행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가 누구지?

테베트는 미간을 구겼다.

[인연을 잃은 너희는 이렇듯 진정으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여자가 테베트의 옷자락을 쥐었다.

둑이 터졌다. 신의 운명이 흘러들어 온몸을 흠뻑 적셨다. 막을 수 없었다. 이미 모든 건 벌어진 후였다.

마지막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테베트의 눈동자가 크게 벌어졌다. 무언가를 깨달은 것 같기도, 또 중요한 걸 갑작스레 잊은 것 같기도 한 눈빛이었다.

퍼어엉!

기어코 거대한 폭발이 일어났다.

몸이 크게 한 번 휘청였다. 곧이어 지금까지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돌풍이 숲을 덮었다.

수백 년 된 나무들이 훅훅 꺾이고, 새들이 일제히 날아올랐다. 돌과 마른 가지, 풀, 꽃, 열매 같은 것들이 상승 기류를 타고 솟구쳤다.

테베트와 에슬린의 옷자락, 머리카락 같은 것들마저 한데 얽혀 제멋대로 흩날렸다.

그들은 소용돌이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거대한 흐름 앞에 무력한 두 사람은 속절없이 그 폭풍에 휘말릴 수밖에 없었다.

“절대 안 돼…….”

테베트가 속삭였다. 무엇이 안 되는지 중얼거리는 본인조차 잘 알 수 없었다.

그의 가슴 언저리의 붉은 마법석이 반짝 빛을 발한 뒤, 파사삭 깨졌다.

그러나 쇄도하는 바람과 몰아닥치는 대가 앞에 누구도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곧 검은 파도가 그들을 뒤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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