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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56화 (56/147)

56화

에슬린은 폭풍 한가운데를 걷고 있었다.

여긴 어디일까? 깨닫기도 전이었다.

“안 됩니다, 전하.”

폭풍을 헤치고, 깨끗한 목소리 하나가 선명하게 들렸다.

“한 번만, 로사나. 제발. 내 부탁이야.”

에슬린은 눈앞의 인물에게 애원했다.

“안 된다니까요. 저도 부탁드려요!”

“나 진짜 답답하단 말이야.”

“황후 폐하께서 전하의 외출을 금지하신 지가 고작 하루도 안 됐어요.”

역시.

밀색 머리카락을 가진 시녀는 만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에르단 전하랑 몰래 황궁을 빠져나가시려다 우물에 빠지신 게 바로 어제라는 걸, 그새 잊으셨어요?”

“황궁을 빠져나가려는 게 아냐. 책 빌리러 가고 싶은 것뿐이라고.”

“제가 빌려다 드릴게요.”

로사나는 단호했다. 에슬린이 입술을 쭉 내밀었다.

“……그 핑계로 지금 나가려는 거잖아. 밖에 봄꽃이 한창인데 방에 틀어박혀서 이게 뭐야?”

한껏 눈썹을 늘어뜨리자, 로사나가 으아아 하는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러더니 자신의 짧은 단발머리를 헝클어뜨린다.

“갑자기 누가 찾아오기라도 하면 전 어떡하라고요?”

“자, 부채 줄게. 가발도. 너랑 내 체격이 비슷해서 멀리서 눈만 보면 누군지 모를걸.”

“……저보고 황녀 전하 행세를 하란 말씀이신 거예요, 설마?”

에슬린은 그저 씩 웃을 뿐이었다.

“내 시녀라면 그쯤은 아무렇지 않게 해야지.”

“아무래도 전 가문으로 내려가 봐야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로사나가 망설임 없이 뒤돌았다. 소박한 드레스 자락이 펄럭 휘날릴 정도로 빠른 몸짓이었다.

그 뒷모습에 대고, 에슬린은 말했다.

“대륙 너머에서 새로운 의술서가 들어왔다던데.”

뚝. 로사나의 움직임이 순식간에 멈추었다.

“베르타니아엔 없는 새로운 이론들이 많다지, 아마?”

에슬린은 근처에 놓인 화초 잎을 만지작거렸다.

“…….”

결국 백기를 든 건 로사나였다. 제 주인은 자신을 다루는 방법을 알아도 너무 잘 알았다.

“……30분만이에요. 옷은 바꿔 입고 나가세요. 사람이 없는 지름길은…… 말씀 안 드려도 저보다 더 잘 알고 계시겠죠.”

“당연하지!”

에슬린은 기다렸다는 듯 준비를 마치고 궁을 빠져나갔다. 그 신이 난 뒷모습을 보며 로사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성인이 되셔도 변함없으시다니까.’

어차피 황녀궁을 찾는 건 그녀의 측근들이나 2황자 에르단 정도였다.

‘30분 정도야, 별일 없겠지.’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별일이 들이닥쳤다.

북부 공작저에만 틀어박혀 있던 테베트 리페리우스 공작이 불쑥 찾아온 것이었다.

로사나는 언제나 그때가 인생 최대 고비였다고 말하곤 했다.

한편, 볼일을 마친 에슬린은 바쁘게 돌아가는 중이었다.

‘아, 늦었네. 로사나가 잔소리하겠어.’

동쪽 도서관까지 가는 게 아니었다.

약간의 후회와 함께 그녀는 거의 날다시피 뛰었다. 그러다 툭 튀어나온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야 말았다.

“아야야.”

무릎이 욱신거리고 손목이 찌르르 울렸다.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다.

“이런 데 돌부리가 있을 게 뭐람.”

수풀에서 몸을 일으키려던 그때였다.

“헉.”

검붉은 눈동자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순간 심장이 떨어질 뻔했다. 무슨 사람이 기척도 내지 않고 온단 말인가?

‘저 훈장은…… 리페리우스 공작?’

에슬린은 속으로 숨을 집어삼켰다.

얼굴은 초면이었으나, 절대 모를 리 없었다. 가슴팍에 주렁주렁 단 훈장은 전쟁 영웅에게만 수여하는 것이었으니까.

전쟁 말고는 아무것도 관심 없다던 냉혈한이 황궁엔 대체 어쩐 일일까?

‘다행히 날 알아보는 것 같진 않네.’

그들은 일면식도 없었다. 게다가 에슬린은 지금 하녀 차림새였다.

남자가 먼저 고개를 돌렸다.

“방해했다면 미안하군. 자리를 비켜 줄 테니 마저 울도록 해.”

길가 돌멩이를 보더라도 저것보단 감정이 느껴지지 않을까?

지독하게 무감한 목소리를 듣자, 에슬린은 갑자기 괜한 심술이 일었다.

“저.”

“뭐지?”

“실례인 줄 알지만 혹시…… 손수건 있으신가요?”

“너에게 내줄 손수건은 없다.”

거짓말. 행여라도 하녀랑 엮일까 두려워하는 거면서.

“……치사하시네요. 딱 보니 부잣집 도련님 같으신데.”

“뭐?”

그제야 남자의 얼굴에 처음으로 감정이 떠올랐다.

물론 경멸이었지만.

“어처구니가 없군.”

그러거나 말거나 에슬린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섰다.

‘키가 엄청 크고…… 잘생겼네.’

정면에서 본 그에 대한 감상이었다.

‘그럼 뭐 해? 표정에 생기라곤 하나도 없는데. 저게 중립을 지키는 리페리우스라는 건가?’

에슬린은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중립만큼 허울 좋은 말도 없지. 결국 아무것도 선택하지 않고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겠다는 뜻이니까.’

속으로 비웃음을 삼키며 그녀는 마저 입을 열었다.

“아니 고작 손수건일 뿐인데, 뭘 그렇게 깐깐하게 구세요?”

“깐깐?”

“그렇잖아요.”

“더 대꾸할 가치도 없군.”

공작이 짧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곤 에슬린을 스쳐 지나갔다. 냉랭한 기세는 북부의 악마 공작이라는 명성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였다.

에슬린은 멀어지는 널따란 등을 바라보았다. 그러길 잠시, 그녀 또한 미련 없이 반대 방향으로 걸어 나갔다.

지금은 로사나의 잔소리가 더 걱정이었다.

‘지루한 남자.’

테베트 리페리우스에 대한 첫인상이었다.

다음 날.

“…….”

저 남자가 왜 또 눈앞에 있지?

에슬린은 생각했다.

“황궁 하녀는 담벼락 사이를 기어 다니는 게 일인가?”

공작이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에슬린은 재빨리 도서관 담벼락 구멍을 통과했다.

“여, 여긴 또 왜?”

“경비병을 불러야겠군.”

“안 돼요!”

등을 돌리려는 그를 재빨리 붙들었다.

절대 안 된다. 이번에 들키면 최소 3개월은 밖에 못 나올지도 모른다.

그때 에슬린의 품에서 뭔가가 떨어졌다.

“앗.”

“이건 뭐지?”

에슬린보다 공작이 그걸 주워 드는 게 더 빨랐다.

그는 손에 든 책을 대충 넘겨 보았다.

“지도?”

싸늘한 눈동자가 에슬린을 향해 굴렀다.

“돌려주세요.”

“하녀가 지도를 볼 일이 뭐가 있지? 게다가 이건 슐든 대륙 너머의…… 너.”

그의 눈이 가늘게 좁아졌다.

“첩자인가?”

무슨 망상을 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에슬린이 퉁명스레 말했다.

그의 손에 들린 지도책을 빼앗으려 했으나, 키가 닿지 않았다. 별로 높게 들고 있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애초에 키 차이가 너무 났다.

“그…… 제가 모시는 주인께서 이걸 가져오라 하셔서 그런 것뿐이에요.”

“네 주인이 누구이길래?”

“누구냐면…… 황녀님?”

에슬린은 되는 대로 지껄였다. 공작의 팔에서 힘이 조금 풀렸다.

그때를 틈타 에슬린은 지도책을 낚아챘다.

“아. 지도가 엉망이 되었잖아요.”

겉면에 묻은 흙을 털며 에슬린이 중얼거렸다.

그 모습을 보던 공작이 낮게 물었다.

“황녀는 슐든 대륙 밖으로 나가고 싶은 건가?”

“그럼 평생 여기에만 갇혀 있고 싶은 사람도 있나요?”

“…….”

그는 이상한 걸 물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그 무감했던 검붉은 눈동자가 일렁이는 걸 에슬린은 보았다.

“너도?”

“네?”

공작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하녀인 너도 대륙 밖으로 나가고 싶으냐는 말이다.”

“뭐…… 그렇죠?”

에슬린의 대답에 공작이 바람 빠지듯 웃었다. 비웃음에 가까웠다.

“불가능해.”

“뭐가요?”

“하녀가 무슨 돈으로, 호위도 하나 고용하지 못할 텐데 어떻게 그 위험한 대륙 너머로 나가겠다는 거지?”

에슬린은 잠시 눈만 깜빡였다.

뭐야, 뭘 말하나 했더니.

“아하하.”

참지 못하고 웃어 버렸다.

“보기보다 겁쟁이시네요.”

활짝 웃으며 말하는 얼굴 위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공작은 홀린 듯 그 얼굴을 응시했다.

“불가능하다고 지레 겁먹고 포기한다면 아마 아무것도 할 수 없을걸요.”

“…….”

“원래 세상엔 불가능한 것투성이니까.”

딱딱하게 굳은 남자가 눈앞에 보였다. 어쩐지 더 이상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좋아요. 제가 슐든 대륙 너머에 다녀온 다음 알려 드릴게요.”

“뭘?”

“바다를 건너는 게 얼마나 쉬웠는지 말이에요.”

가벼운 목소리였다. 어디든 훨훨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은.

“나는.”

건조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공작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자신의 양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심각할 게 뭐 있어요? 이건 그냥 선택의 문제예요.”

에슬린이 말했다.

“원하는 걸 손에 넣을 것이냐, 아니냐.”

“…….”

그는 고개를 들어 눈앞의 여자를 바라보았다. 푸르디푸른 눈동자가 마치 머나먼 바다처럼 보였다.

“네 이름이 뭐지?”

“네?”

“네 이름.”

그가 저도 모르게 에슬린을 향해 다가섰다.

“잠시만요. 너무 가까……”

“테베트.”

그는 다짜고짜 이름을 말했다.

이상했다. 어딘지 모르게 자꾸 입 안이 마르고 초조했다.

“난 테베트다.”

“그렇군요. 알려 주셔서 감사해요.”

“넌?”

그가 되물었다.

에슬린은 그 붉은 눈을 바라보다 잠시 고민했다.

그의 머리 위로 문득 시선이 갔다. 나무를 가득 메우며 피어난 분홍색 꽃이 우연히 눈에 들어왔다.

“전…….”

그 드레스 자락 같은 꽃잎을 바라보며 에슬린이 말했다.

“로즈벨이라고 해요.”

응답하듯 만개한 로즈벨 꽃나무가 몸을 흔들었다.

“아아아! 진짜 길고 긴 근신이었어. 모후께서도 너무하시지.”

에르단이 기지개를 쭉 폈다. 근신이 풀리자마자 에슬린에게 달려온 그였다.

“넌 근데 배신이야. 하녀 복장으로 혼자 돌아다니다니. 거기다 뭐? 몰래 리페리우스 공작을 만나? 그 스릴 넘치는 모험을 혼자만 즐기다니. 가만 보면 네가 제일 사고뭉치라니까.”

“칭찬으로 들을게.”

둘은 함께 외출하기 위해 황녀궁 복도를 걷고 있었다. 출구로 향하는 모퉁이를 막 돌려던 참이었다.

“저저저전하! 큰일 났습니다. 지금 밖에!”

시종 하나가 호들갑을 떨며 달려왔다.

“무슨 일이야?”

에슬린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그렇게 모퉁이를 도는데.

“로즈벨이요? 그런 하녀는 없습니다, 각하.”

그런 목소리가 들렸다.

“……!”

한순간이었다.

로비에 선 태산 같은 남자와 눈이 마주친 것은.

그는 늘 그렇듯 빈틈없이 제복을 갖춰 입은 차림이었다.

에슬린을 발견한 테베트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왜 그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

에슬린은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에르단이 옆에서 무슨 일이냐며 속삭였다.

멀리 서 있던 시종장이 잽싸게 달려와 허리를 조아렸다.

“각하, 반말은 삼가 주십시오. 황녀 전하십니다.”

“……뭐?”

반듯하게 뻗어 있던 짙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상황 파악을 마친 에슬린은 짧게 웃음을 흘렸다.

“이런.”

작은 목소리였음에도 테베트는 홱 고개를 돌려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빨리 들켰네요.”

어쩔 수 없다는 듯 체념한 말투였다. 흔들리는 붉은 눈동자를 향해 에슬린이 씩 웃었다.

로즈벨 꽃나무 아래에서 보던 것과 다를 바 없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소였다.

“어떻게…… 원하는 걸 선택할 결심은 섰나요?”

그제야 테베트는 깨달았다.

“테베트 리페리우스 경.”

자신이 저 함정 같은 미소에 덜컥 빠지고야 말았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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