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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57화 (57/147)

57화

기억은 흐르고 흘렀다.

찬란하게 기쁜 기억도, 저리듯 아픈 기억도 세하즈강의 물결처럼 그저 흘러 지나갔다.

시간은 그날에서 멈추었다.

모든 게 끝나던 날.

에슬린이 죽던 날.

“그 위세 좋던 황녀도 여기까진가 보군.”

자신을 감시하던 1황자의 시종 중 하나가 툭 말했다.

에슬린은 집행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마취약을 먹어 정신이 몽롱했다. 늘 총기 어렸던 눈동자가 탁했다.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리, 리페리우스 공작 각하! 왜 이렇게 빨리 오셨습니까? 아직 1황자 전하께선……”

“황녀가 마실 독배를 가져왔다. 비켜.”

“하지만…….”

시종은 잠시 망설였다. 리페리우스 공작이 집행인이라는 소리는 들었지만, 시간이 너무 일렀다.

“감히 내 앞을 막는 건가?”

“아, 아닙니다! 가, 가십시오. 그 뒤의 분은……?”

“독배를 가져온 내 시종이다.”

그가 대충 말했다. 테베트의 뒤에 선 남자가 로브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시종은 의아했으나 감히 귀족의 앞길을 막을 수도 없었다.

어차피 그 누구의 편도 아닌 중립의 리페리우스이니, 상관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제기랄.”

집행실에 들어서자마자 테베트가 주먹을 말아 쥐었다. 바닥에 쓰러진 에슬린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은 걸 참느라 피를 토할 뻔했다.

에슬린을 감시하고 선 기사 두엇이 보였다.

그들의 눈을 파 버리거나, 목을 자르면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입 안에서 피 맛이 나고 나서야 이성이 돌아왔다.

마법사에게서 독배를 건네받았다.

“에슬린 베르타니아 황녀, 그대가 마실 독배를 가져왔다.”

목소리가 평소와 다름없어 다행이다.

그러나 떨리는 손끝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그 바람에 검은 액체 한 방울이 툭 튀어 올랐다.

“…….”

에슬린이 멍한 눈을 들어 테베트를 바라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반짝임도 없는 죽은 눈.

테베트는 심장을 칼로 난도질당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 때문이다.

주변을 느리게 훑던 에슬린이 테베트의 뒤에 있는 남자를 발견하곤 놀란 듯 눈을 키웠다.

“다 괜찮을 겁니다, 전하.”

이에 응답하듯 마법사가 속삭였다. 감시자들이 경계의 눈초리로 이쪽을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자, 황녀. 시간이다.”

테베트는 부러 그들을 의식하며 차갑게 말했다.

그는 몸을 기울여 에슬린에게 바짝 붙였다. 그러곤 뒤를 향해 짧게 신호했다.

그러자 마법사의 손가락이 움직였다.

공기의 흐름이 멈추고, 얇은 크리스털 막이 생긴 것처럼 세상이 분리되었다.

“하…… 서두르십시오, 각하. 지금의 제 마력으로는 고작 1분 정도가 한계입니다.”

입가에 흐르는 피를 닦으며 마법사가 말했다.

테베트는 기다렸다는 듯 에슬린을 끌어안았다. 잔뜩 커진 짙푸른 눈동자가 테베트를 향해 있었다. 메마른 입술이 안타까워 죽을 것 같았다.

“에슬린, 지금부터 당신을 구할 겁니다. 하지만 그러려면…….”

입에서 나오는 게 말인지 칼인지 알 수 없었다.

“그 몸은 한 번 죽어야 합니다.”

칼일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이 고통은 설명할 수 없을 테니까.

에슬린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떨리는 눈으로 테베트를 응시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습니다. 절 믿을 수 있겠습니까? 못 믿겠다면 당신의 마법사를 믿으십시오.”

테베트는 다급하게 말했다. 마법사의 마력으로 버틸 수 있는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때 에슬린의 입술이 조그맣게 벌어졌다.

“당신을 믿어요.”

바람 앞 촛불처럼 꺼져 가는 목소리였다.

“믿고 싶으니까.”

“…….”

그 말에 테베트는 눈가가 뜨거워졌다.

“에슬린…… 에시.”

테베트가 에슬린의 이마에 제 이마를 붙였다.

“이것만 기억해 줘요.”

그는 맹세했다.

“내가 선택한 건 에슬린 베르타니아 당신입니다.”

최후의 최후에 와서야 깨달은 진심이었다.

“그러니 난 두 번 다시. 리페리우스의 이름 뒤에 비겁하게 숨지 않을 겁니다. 당신 앞에서 난 더 이상…… 리페리우스 공작이 아닐 거예요.”

에슬린은 길게 눈을 감았다. 몽롱한 정신 속에서도 그의 말만이 오직 뚜렷했다.

‘가장 듣고 싶었던 말.’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가장 갖고 싶었던 사람.’

드디어 그를 손에 넣었다.

비로소 모든 걸 바꿀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너무 늦었어.’

에슬린은 절규했다. 그리고 간절하게 바랐다.

그 어딘가에 신이 있다면, 자신의 소원을 들어 달라고.

그때였다. 어디선가 천둥이 쳤다.

에슬린은 화들짝 놀라며 번쩍 몸을 일으켰다.

어? 어떻게 몸이 움직이지?

분명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일 수 없었는데.

[가련한 아이야.]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아이의 목소리 같기도 했고 노인의 목소리 같기도 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이건 신의 목소리다.

[순리를 거스르려 하는구나.]

신이 엄숙하게 말했다.

[살고자 하느냐? 이 죽음을 선택한 건 너 자신이었다.]

‘살고 싶습니다. 살아야만 하는 이유가 생겼습니다.’

[그러나 모든 일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 순리를 거스른 죄, 대가를 치러야 한다.]

‘대가 말씀이십니까?’

[그래. 금기의 마법을 완성한 저들에게도, 그리고 그 마법을 이용해 순리를 거스르려 하는 너에게도.]

신의 목소리는 묵직했다.

[모두 대가가 필요하지.]

에슬린은 눈을 크게 떴다.

‘마우시스!’

[마법사는…… 이미 마력으로 대가를 치렀구나. 그렇다면 남은 건 기사.]

‘안 됩니다!’

[기사에게서 대가를 받겠다.]

‘안 됩니다. 차라리 제게서 다 가져가십시오. 디에리안의 마력 또한 다시 돌려주십시오!’

에슬린은 처절하게 소리쳤다. 자신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그들이 그 대가를 짊어질 필요는 없었다.

[그게 네 선택이냐?]

‘네. 뭐든 드리겠습니다.’

[너는 또다시 널 선택하지 않는구나.]

왜일까. 신의 목소리가 어딘지 모르게 황량하게 들렸다. 그럴 리 없는데도.

[좋다. 그럼 모두 네게서 받겠다. 때마침 네게 대가로 받을 만한 소중한 것이 생겼구나.]

‘그게 무엇입니까?’

[인연.]

잔혹한 울림이었다.

[너와 저 남자의 인연을 가져가겠다.]

‘신이시여!’

[넌 테베트 리페리우스와 연관된 모든 기억을 잃을 것이다.]

안 돼……. 에슬린은 신음했다.

[만약 네가 우연히라도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안 됩니다. 싫습니다!’

[그땐 저 남자가 너를 잊을 것이다.]

기억 속 신의 목소리는 어떻게 잊었나 싶을 정도로 강렬했다.

[인연을 잃은 너희는 이렇듯 진정으로 이어지지 못할 것이다. 그게 네 선택의 대가다.]

주변이 빛났다. 부드러운 바람이 에슬린의 몸을 감쌌다.

[가거라, 내 아이야. 자신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에게도 선택받을 수 없다는 걸, 이번엔 알았으면 좋겠구나.]

그 말을 마지막으로 에슬린은 눈을 떴다.

주르륵.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느리게 깜빡이는 눈에선 진한 눈물이, 메마른 입술에선 까만 독약이 흐르고 있었다.

“아…….”

그녀는 테베트에게 독배를 받아 마신 후였다. 독이 든 잔을 입에 댄 순간, 신의 부름을 받은 것이었다.

“경. 테베트 경.”

에슬린은 식도를 타고 흐르는 액체를 느끼며 중얼거렸다. 테베트가 재빨리 몸을 숙여 그녀의 입가에 귀를 기울였다.

오직 그에게만 겨우 들릴 정도의 가느다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에시.”

“나는 기억을…… 기억을 잃을 거예요.”

에슬린은 그 품 안에서 횡설수설 말했다. 혀가 빠른 속도로 굳고 있었다. 그 때문에 자꾸만 말이 헛돌았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미안해요. 나 때문…… 콜록!”

“말하지 말아요. 조금이면, 조금이면 될 겁니다.”

테베트는 고통스러운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어찌나 세게 이를 악문 건지 그의 잇새로 피가 흘러내렸다.

“부탁이 있어요. 기억을 잃은 내게…… 아무것도 함부로 밝히지 말아 줘요.”

기억을 잃고 헤매는 건 자신만으로 족하다. 당신만큼은 신에게 그 어떤 것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게 대체 무슨 뜻입니까?”

“이 모든 진실에 대해…….”

슬슬 숨이 가빠 왔다.

더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었다.

“대신…….”

에슬린은 가장 중요한 말을 전했다.

“성배를…… 찾아요.”

그때만큼은 이상하게 입술이 저절로 움직였다.

성배는 분명 100년 전 사라진 물건이라는 걸, 에슬린은 분명 알고 있었다.

그러나 기묘한 확신이 들었다.

“그 성물이라면…… 어떻게든.”

이 저주를 풀 실마리가 되리라.

그건 베르타니아의 피에 새겨진 본능 같은 깨달음이었다.

목소리가 잘 나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에슬린을 강하게 붙든 힘이 느껴졌다. 흰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계속, 계속 떨어져 내렸다.

그의 얼굴을 더 보고 싶었으나 결국 시력이 툭 끊어졌다.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겨우 잡은 인연을 끊어지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당신도 포기하지 않기를.

설령 운 나쁘게 이 굴레가 반복된다고 하더라도.

설령 이 얄궂은 운명이 다시 몰아닥친다고 할지라도…….

에슬린은 자신을 믿기로 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테베트 리페리우스를 믿기로 했다.

눈을 감았다.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고통에 젖은 절규가 흐리게 멀어졌다.

어둠이 여명처럼 밀려들어 왔다.

몸이 떠오르고,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기분이었다.

멀리서 둥, 둥 북소리가 들렸다. 그건 끝을 알리는 죽음의 신호였다.

그리고 동시에, 새 시작을 알리는 출발 신호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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