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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58화 (58/147)

58화

“헉.”

레비브 산기슭을 헤매던 디에리안의 무릎이 푹 꺾였다.

“디에리안 님?”

앞서 걷던 젝스가 뒤를 돌았다. 창백한 마법사의 낯빛이 경악으로 물들어 있었다.

“왜 그러십니까?”

“이게 무슨 기운이지? 그리고 왜……?”

그가 넋 빠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어둠에 반쯤 가려진 눈동자는 에슬린과 테베트가 있는 동쪽 언저리를 헤매고 있었다.

“왜 마력이…….”

“디에리안 님, 피가!”

디에리안이 코 밑에 흐르는 피를 닦았다. 비틀비틀 몸을 일으켜 젝스를 바라보았다.

“젝스 경, 출발하기 전, 제가 전하께 보호 마법을 걸어 두었단 말입니다. 위험할 때 발동되도록.”

“예? 설마……?”

“네. 방금 제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간 걸 보면 그게 발동된 것 같아요. 게다가 이 불길한 마력은 대체…… 대체 뭐란 말입니까!”

패닉에 빠진 디에리안이 미친 듯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뭐라고 더 덧붙이려는 순간.

퍼어엉!

엄청난 폭발음이 천지를 울렸다.

“뭐야!”

“디에리안 님!”

디에리안의 어깨가 번쩍 튀어 올랐다. 참다못한 그가 재빨리 마력을 움직여 푸른 매 한 마리를 만들어 냈다.

겨우 회복한 마력이 다시금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디에리안은 신물이 올라오려는 것을 애써 참았다.

“저 검은 마력은…….”

“뭔가 이상합니다.”

젝스가 중얼거렸다.

불길한 빛이 검은 하늘을 잠시 밝혔다 사라졌다. 디에리안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설마 흑마법?’

주위를 경계하던 젝스가 디에리안의 뒤통수를 푹 눌렀다.

“바람이 옵니다.”

“윽. 젝스 경.”

뭐라고 더 투덜대기도 전에 거센 바람이 사방을 뒤흔들었다. 로브 자락이 펄럭펄럭 나부꼈다. 젝스가 다른 손으로 나무를 붙잡고 버텼다.

그렇게 몸을 웅크리고 있기를 잠시.

거세게 몰아치던 바람이 점차 잦아들었다.

“주군께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합니다.”

젝스가 불안한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마법으로 저쪽을 살펴볼 수는 없습니까, 디에리안 님?”

“이미 시도해 봤지만.”

디에리안이 푸른 매에 옮겨둔 감각을 더듬어 보았다. 그러나 돌풍에 휩쓸려 연결이 끊어진 상태였다.

그는 다시 마법을 펼쳤으나, 초토화된 주변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이미 타이밍을 놓쳐버린 것이다.

“탐지 마법을 걸어 보겠습니다. 일단 우린 서두르죠.”

디에리안이 중얼거렸다. 그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심각함이 어려 있었다.

“디에리안 님, 주군께서는…….”

“리페리우스가 함께 있으니 괜찮으실 겁니다.”

그러길 바라는 간절함이 묻은 목소리였다. 젝스는 검을 꾹 쥐며 묵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빠른 속도로 산을 올랐다. 몸의 힘듦 따위는 느껴지지도 않았다.

우린 또다시 실책을 저지른 것일까?

둘로 나뉜 게 잘못이었던 걸까?

그냥 죽이 됐든 밥이 됐든, 전하 곁에 붙어 있는 게 옳은 것이었나……?

디에리안이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났다.

눈빛이 검어진 젝스 또한 그와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전하, 무사하셔야 합니다.’

하아. 긴 숨이 흩어졌다.

제 주인의 곁을 지키고 있을 남자가 떠올랐다.

‘전하를 지키지 못한다면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디에리안은 이를 갈며 생각했다.

그는 테베트 리페리우스라는 인간을 믿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실력만큼은 믿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슬린을 향한 그 맹목적인 애정을 믿었다.

“빌어먹을 공작.”

그는 피 섞인 침을 퉤 내뱉었다.

“이번에도 우유부단하게 군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디에리안이 중얼거렸다. 피곤한 안색 가운데 날카로운 눈빛만이 어둠 속에서 하얗게 빛났다.

* * *

“…….”

에슬린은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휘잉, 휘잉.

메마른 바람이 간헐적으로 불었다. 아까와 같은 돌풍은 아니었다.

바람에 실려 풀 냄새와 나무 냄새 같은 것들이 코끝을 간질였다.

주변은 여전히 어둠이었다.

‘폭발에 휘말렸는데.’

에슬린은 생각했다. 분명 엄청난 폭발이었다.

절대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어떻게?

그 순간, 제 주변을 감싼 미약한 마력의 기운을 읽었다.

‘디에리안.’

마법에 대해서는 무지했으나, 이 기운만큼은 모를 수 없었다.

‘디에리안이 보호 마법을 걸어 두었구나.’

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테베트에게 마력 포션을 받았다고는 하나, 분명 몸 상태가 완전하지 않았을 텐데.

“후우…….”

그녀는 긴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쇠사슬에 옥죄인 듯 갑갑했다.

“테베트 경?”

그제야 자신을 감싼 단단한 팔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살짝 돌리자, 죽은 듯 눈을 감은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또였다. 또 테베트가 제 몸을 방패로 에슬린을 감싼 것이다.

“테베트 경……!”

세하즈강에서의 악몽이 떠올랐다. 에슬린이 서둘러 그의 숨을 확인하려던 때였다.

“…….”

그림 같은 얼굴이 한 번 꿈틀하더니, 천천히 눈꺼풀이 움직였다.

“여긴…….”

“정신이 들어요? 괜찮아요?”

에슬린은 다급하게 물었다.

테베트가 몸을 일으켰다. 디에리안의 보호 마법이 에슬린을 감싼 그에게까지 미친 것인지, 다행히 큰 부상은 없어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당신은.”

그가 머리를 부여잡으며 중얼거렸다.

그 순간 에슬린은 어깨를 딱딱하게 굳혔다.

기억이…….

그의 기억이 멀쩡한 것인가?

‘펠리서스 마법석은 부서졌는데.’

에슬린은 생각했다.

원래였다면, 동굴에서 제 기억이 모두 돌아옴과 동시에 테베트의 기억은 사라졌어야 했다. 그게 대가였으니까.

하지만 그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중간중간 고비는 있었으나…… 에슬린은 그게 불행을 피하게 해 주는 마법석, 펠리서스 덕분이라고 어렴풋이 추측했다.

하지만 이제 그 마법석은 깨어지고 없다.

‘설마 대가의 굴레에서 벗어난 건가?’

문득 희망이 고개를 들었다.

조금 밝아진 낯으로 테베트를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쳤다.

“윽.”

“테베트 경!”

그가 고통스러운 듯 신음을 흘렸다.

지면이 뒤집히며 드러난 시뻘건 흙을 단단한 손가락이 거세게 쥐었다. 에슬린은 당황하여 안절부절못했다.

“머리가 아픈 건가요? 어디 봐요.”

손을 뻗어 테베트의 어깨를 짚었다.

그때.

툭. 커다란 손이 에슬린을 밀어냈다.

“당신은…….”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공기를 메웠다. 그가 고개를 들었다.

다시금 눈이 마주쳤다.

붉은 눈동자에 중요한 무언가가 빠져 있었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던 무언가.

다정함, 애정, 갈망, 애틋함 같은 것들…….

에슬린은 깨달았다.

“누구지?”

아. 빌어먹을 신이.

기어코 둘의 인연을 앗아 가 버렸음을.

“대답하지 않으면 베겠다.”

테베트가 으르렁대듯 말했다. 처음 듣는 차가운 목소리였다.

에슬린은 칼에 찔린 사람처럼 굳어 버렸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현재와 과거가 씨실과 날실처럼 얽혀 하나의 흐름으로 완성되었다. 에슬린은 테베트를 거부했던 과거의 자신을 떠올렸다.

당신이라는 커다란 조각이 빠져나갔음에도, 나는 그곳에 조각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이젠.

‘당신이 나라는 조각을 빼낼 차례란 건가?’

기억을 되찾은 순간부터 각오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막상 경험하니…….

‘가슴이 아파.’

에슬린은 울컥 올라오는 덩어리를 억지로 내리눌렀다.

“하아. 젠장.”

답 없는 그녀가 답답한 듯, 테베트가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다 어깨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미간을 좁혔다.

무슨 부상이지?

짧게 혀를 찬 그가 땅을 짚어 몸을 일으켰다. 근처에 마물의 흔적이 있었다. 그는 멋대로 고위 마물에 당한 것이라고 치부했다.

저벅, 저벅.

넓은 등이 멀어졌다.

그 모습을 에슬린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켰다. 가슴이 아프지만 주저앉아 울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나는 포기하지 않아.’

둘의 인연을 끊어 버리겠다는 신의 냉엄한 말 앞에, 자신은 어떻게 마음먹었던가?

‘그렇게 다짐했잖아.’

기억이 돌아온 순간부터 줄곧.

‘당신을 되찾을 거라고.’

짙푸른 눈동자가 명료해졌다.

에슬린은 반듯하게 일어서서 멀어지는 등을 향해 입을 열었다.

“가주님.”

돌산 같던 뒷모습이 우뚝 멈추었다.

반쯤 몸을 돌린 남자의 표정이 어둠에 묻혀 잘 보이지 않았다.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군더더기 없는 정갈한 움직임은 어딘지 모르게 시선을 잡아끄는 데가 있었다.

“가주님께선 마력 폭발에 휘말리셨어요.”

무감한 눈동자가 스르륵 굴렀다.

“마력 폭발? 이런 곳에서?”

“아마…… 이곳에 급한 볼일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기억이 혼란스러우시다면…… 폭발의 충격 때문이겠죠.”

에슬린은 떨리는 손끝을 부여잡으며 말했다. 테베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어떤 따뜻함조차 느껴지지 않는 싸늘한 시선.

온몸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지만, 에슬린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래, 나는 되찾을 거야.’

눈앞의 딱딱한 표정을 한 남자는 분명 자신이 한 번 손에 넣은 제 것이었다. 에슬린의 눈동자에 순간 푸른 불꽃이 일렁였다.

‘비단 당신뿐만 아니라…….’

내 것이었던 모든 걸 되찾겠어.

사아아-.

나무가 몸을 움직였다. 차가운 숲의 공기가 그녀의 흰 뺨을 감쌌다. 젖은 풀 냄새도, 건조한 바람 소리도 모두 선명하게 느껴졌다.

에슬린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짙은 숲의 공기가 폐를 한 바퀴 돌았다. 굳어 있던 뇌가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비로소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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