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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59화 (59/147)

59화

“당신은 마법사인가?”

고개를 기울인 테베트가 차갑게 물었다.

“아니에요.”

“그럼?”

“저는.”

에슬린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가장하며 웃었다.

“저는 리페리우스 공작저의 하녀예요.”

“뭐?”

“하녀라고요.”

에슬린은 테베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매서운 눈매가 의심의 눈초리를 담고 찌푸려졌다.

“이걸 보면 믿으시겠어요?”

“하.”

에슬린은 깊숙이 품고 있던 수석 하녀의 배지를 내밀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배지엔 분명 리페리우스의 사용인 문장이 새겨져 있었다.

“어이가 없군.”

“그보다 상처를 좀 보여 주세요.”

에슬린이 불쑥 다가섰다.

그의 어깨에 가늘게 흐르는 피가 아까부터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에슬린은 입고 있던 로브 자락을 북 찢었다. 대충이라도 지혈해야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옷자락으로 그의 피를 닦아 내려 손을 뻗었다.

“그만.”

탁! 테베트가 에슬린의 손을 거칠게 쳐 냈다. 에슬린이 눈썹을 구기며 물러섰다.

상태가 좋지 않던 왼쪽 손목을 감싸 쥐었다. 붕대는 모두 풀려 어디론가 사라진 상태였다.

“건방지군.”

“지혈을 해야 해요.”

“정말 공작저의 하녀가 맞긴 한 건가?”

“배지를 보셨잖아요.”

“글쎄.”

테베트는 턱을 기울였다. 싸늘한 비웃음이 그의 반듯한 입가에 떠올랐다.

“내가 부관도 아닌 하녀를 데리고 이런 곳까지 왔다는 게 황당해서 말이야.”

“…….”

“그것도 기억에 없는 공작저 하녀를.”

영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에슬린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거죠?”

“아무래도 당신이.”

테베트가 다가섰다.

긴 그림자가 에슬린을 잡아먹을 듯 드리워졌다.

“나를 속이고 있는 것 같은데.”

감이 좋은 남자였다.

순순히 넘어갈 남자도 아니었고.

알고 있었음에도 에슬린은 머리가 복잡했다.

“정체를 말해.”

에슬린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말한다 한들 지금 당신이 내 말을 믿을까?’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테베트는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처음 하녀의 몸으로 눈떴던 자신과 마찬가지로.

저 상태라면…… 어떤 말을 해도 믿지 않겠지.

“지금 사실대로 말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까.”

툭. 등 뒤에 딱딱한 나무가 닿았다.

어느덧 그에게 양어깨가 잡혀 있었다. 미간이 좁아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베트는 차가운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이거 놔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테베트가 픽 웃었다.

“명령하면 내가 들을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에슬린은 한숨처럼 말했다.

“당신을 위해서예요, 테베트 경.”

이름이 불리자 테베트의 눈동자가 크게 한 번 흔들렸다. 에슬린은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감히, 내 이름을 겁도 없이.”

에슬린은 순간 작게 웃고야 말았다.

긴 속눈썹을 늘어뜨리고 입꼬리를 올려 웃는 모습에 테베트는 왠지 모르게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몇 번이나 이름을 불러 달라고 조른 게 누군지, 물론 기억은 안 나시겠죠. 하지만.”

푸른 보석 같은 눈동자가 테베트를 향했다.

“나중에 분명 오늘 일을 후회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만 놔줘요.”

“…….”

“힘도 제대로 안 줘 놓고선.”

에슬린이 테베트의 손을 툭 밀어냈다.

바싹 마른 낙엽처럼 그의 손이 속절없이 떨어져 나갔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이었다.

“혼란스러우실 거 알아요.”

“…….”

“하지만 전 가주님의 적이 아니니 걱정하지 마세요.”

깨끗하고도 힘 있는 목소리였다. 테베트는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전 가주님을 돕기 위해 이곳에 있는 거니까요.”

그렇게 말한 에슬린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난 당신을 돕기 위해 있는 거니까.’

공작저의 치료실. 제이슨에게 다친 다리를 치료해 주던 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에슬린은 쓰게 웃었다.

잠시 침묵하던 그녀는 이내 몸을 돌렸다.

“롭시온까지 가려면 서두르죠.”

“롭시온?”

“네. 우리 목적지는 롭시온이었거든요.”

에슬린은 자박자박 길을 걸었다.

몸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었다.

흑마법사를 상대하느라 시간이 지체되었다. 목적지까지 가려면 아직 한참이나 더 가야 했다.

“…….”

테베트가 본능적으로 에슬린의 뒤를 쫓았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걸음이 이어졌다.

“가주님께선 레비브 마을에서부터 이 산을 오르셨어요. 중간에 마물을 만나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아무튼 이 능선을 따라가다 산을 넘으면 말을 빌릴 수 있을 거예요. 그럼 목적지까지는 금방이겠죠.”

에슬린은 떠오르는 대로 쉬지 않고 말했다. 그가 혼란스럽지 않도록 최대한 많은 걸 설명해 주고 싶었다.

“다행히 예전에 본 지도책에서 이 근방 지리는 대충 익힌 적이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세요.”

“이봐.”

“곧 날이 밝을 테니, 더 속도를 낼 수 있겠죠. 마물이 더 나타날 것 같지는 않지만…… 아, 일행이 있어요. 그 소란이 있었으니 일행이 우릴 찾고 있겠죠. 운이 좋으면 만날 수도 있고요.”

그러고 보니 흑마법사, 타툴란은 어떻게 되었을까? 테베트가 핵을 완벽히 파괴한 것일까?

만약 그렇지 않다고 하더라도, 눈 한쪽을 잃었으니 아마 부활하는 데까지는 시간이 걸릴 것이다.

에슬린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황궁에서 타툴란은 변장 마법을 사용한 채 1황자에게 붙어 있었다.

‘그럼 나 대신 1황자를 주무르겠다는 건가?’

그 짐작이 맞는다면, 황궁은 지금 흑마법사의 손아귀에 빠져 위험하다는 얘긴데.

“이봐.”

거친 손길이 에슬린을 잡아 세웠다.

“뭐죠?”

에슬린은 눈을 깜빡였다. 마주친 남자의 눈매가 못마땅한 듯 찌푸려져 있었다.

“위험하잖아.”

“네?”

그제야 슬쩍 고개를 돌려보았다. 코앞에 야트막한 비탈길이 있었다. 한 걸음만 잘못 떼었어도 미끄러졌을 터였다.

“조잘댈 정신은 있고, 앞을 볼 정신은 없는 건가?”

냉랭한 어조에 에슬린은 머쓱하게 입술만 우물거렸다.

“고마워요.”

아프지 않게 잡힌 팔에서부터 뜨거운 그의 체온이 느껴졌다.

지그시 이쪽을 바라보는 테베트의 얼굴에 문득 빛이 스며들었다.

에슬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

저 멀리 어둠이 물러나고 있었다.

“밤이 끝났네요.”

드디어. 에슬린은 조금 지친 듯 중얼거렸다.

깊은 숲이라 지평선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어둠을 몰아내고 밝아 오는 하늘은 분명히 새로운 아침을 알리고 있었다.

절대 올 것 같지 않던, 바로 그 아침.

“…….”

문득 자신의 팔을 쥔 남자의 손끝에서 미약한 박동이 느껴졌다.

뜨거운 체온,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 밝아 오는 여명 속 당신의 모습.

‘……이런 상황에서도 나는 당신과 있는 게 좋구나.’

에슬린은 눈을 구기며 웃었다.

‘산을 내려가면 일단 함께 식사를 합시다. 그리고 목욕을 하고, 한숨 늘어지게 잔 뒤 당신이 좋아하는 감국차를 마시면서 쉬어요. 그러고 나면 모든 게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질 겁니다.’

눈앞의 남자가 다정한 얼굴로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 말 하나에 순간 얼마나 안심했는지, 그는 알지 못할 것이다.

에슬린은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산을 내려가면 씻고, 식사를 하고, 한숨 자면 분명 기분이 나아질 거예요. 그리고 가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차를.”

그런데 순간 말문이 막혔다.

“차를…….”

에슬린은 고장 난 인형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가만히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던 테베트가 한쪽 눈썹을 치켜올렸다.

에슬린의 고개가 툭 떨어졌다.

‘당신이 좋아하던 남부산 감국차입니다. 노는 것에 환장한 남부 놈들이라 그런지, 찻잎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말리더군요.’

그땐 왜 몰랐을까?

감국차는 에슬린이 황녀였던 시절 가장 즐기던 차 중 하나였다.

‘당신은 그런 식으로 줄곧 내게 외치고 있었던 거였구나.’

자신을 알아 달라고. 밀어내지 말라고.

에슬린의 시선이 하염없이 바닥을 헤매었다. 심장이 쿡쿡 쑤셨다.

그때 팔을 감싸 쥐던 체온이 떨어져 나갔다. 대신 부드럽게 턱이 잡혔다.

“왜 그런 표정을 하는 거지?”

테베트가 에슬린의 고개를 받쳐 들고 물었다. 갑작스레 마주친 시선에 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크게 일렁였다.

‘우는 건가?’

테베트는 생각했다.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으나 차라리 우는 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서글픈 표정이었다.

본능적으로 불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몰라서요.”

“뭘?”

“가주님께서 무슨 차를 좋아하시는지…….”

에슬린이 무언가를 삼키듯 말을 멈추었다. 희미한 미소가 곧이어 떠올랐다.

“전 아무것도 몰라서요.”

테베트는 혀를 찼다.

그게 대체 뭐가 중요하다고 그런 표정을 짓는단 말인가?

그는 그런 괴로워 보이는 미소 따위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절대. 두 번 다시는.

‘……왜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으나 답할 수 없었다. 알 수 없는 벽에 가로막힌 기분이었다.

“성가시군.”

그는 억지로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떼었다. 에슬린을 지나쳐 성큼성큼 걸었다. 곧이어 제 뒤를 따르는 작은 발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모르게 자꾸만 뒤돌아보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그 충동을 억누르는 게 지금으로선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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