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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60화 (60/147)

60화

날은 밝았으나, 흐렸다.

에슬린은 숲길을 오르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저 멀리 테베트의 등이 보였다. 따라잡으려면 다시 조금 달리듯 걸어야 했다.

“하아…….”

지친 숨이 터져 나왔다.

숙련된 기사의 걸음은 몹시 빨랐다. 걸음을 조금만 늦추어도 뒤처지고 말 것이었다.

단호한 뒷모습이 조금 야속했다.

“날이 춥네.”

에슬린이 흐린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지금은 오전인 걸까, 오후인 걸까?

햇빛이 나지 않아 시간 가늠이 어려웠다. 그저 온몸이 녹초가 될 정도로 오래 걸었다는 사실만이 확실할 뿐.

바람이 불자 소름이 돋았다. 날씨가 흐려서인지 공기가 아프고 싸늘했다.

“테베…… 가주님.”

에슬린은 조심스레 눈앞의 남자를 불렀다.

“상처는 괜찮으신가요?”

에슬린이 그의 어깨를 보며 물었다.

테베트가 흘끔 돌아보곤 차갑게 대꾸했다.

“입 다물고 가도록 해.”

그 말에 에슬린이 피식 웃었다. 식은땀 맺힌 이마 위로 빗방울이 툭 떨어졌다.

“저한테 그렇게 말하지 마세요.”

“별…….”

“난 다 기억할 거니까.”

설핏 장난스럽게 들리는 말투였다. 테베트의 걸음이 잠시 느려졌다.

“그나저나 조금 쉬었다 가면 안 될까요?”

에슬린이 한쪽 팔로 나무를 짚으며 물었다. 테베트는 그런 그녀를 가볍게 무시했다.

“서둘러야 한다고 말한 게 대체 누군지 모르겠군.”

“못됐어…….”

툴툴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흘끔 그녀를 돌아보았다.

작고 가느다란 몸과 창백한 얼굴, 지친 숨결…….

이런 거친 숲길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여자였다.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대체 공작저의 하녀가 왜 이런 곳에 있는 거지?”

“그건 그러니까 우연히.”

“어설픈 거짓말은 집어치워.”

테베트는 냉랭하게 말했다. 에슬린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는 가주님께서는요?”

“뭐?”

“가주님께선 왜 이곳에 오게 된 건지 기억나시나요?”

떠보는 듯한 물음이었다. 깊은 호수 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테베트는 자기도 모르게 기억을 더듬었다.

“황궁으로 돌아가는 길에 절벽이 무너져 휩쓸렸다. 부상을 치료하고 돌아가는 길에 이 산기슭에 마물이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부랴부랴…….”

부랴부랴? 그는 인상을 구겼다. 마물 때문에 긴급한 상황이었던 건 맞지만…….

그는 잠시 생각하다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래도 에슬린의 페이스에 말려든 모양이었다.

“……질문을 한 건 나야. 대답해.”

그러자 에슬린은 가볍게 웃었다. 그녀의 시선이 비스듬히 바닥을 향했다.

“전 이곳에서 소중한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어요.”

“뭐라고?”

테베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에슬린은 천천히 말을 골랐다.

“이곳에서 다시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마물이 나타났고, 타이밍 좋게 등장하신 가주님께서 구해 주신 거예요.”

문득 발 주변에 그림자가 졌다. 올려다보니 테베트가 다가와 에슬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딱딱히 굳은 표정이었다.

“연인인가?”

“네?”

에슬린은 눈을 깜빡였다.

“이곳에서, 연인이라도 만나기로 했다는 말인가?”

“어…….”

우리는 연인이었나?

하녀와 비밀 연인이라고 했던 건, 에슬린을 공작저에 잡아 두기 위한 테베트의 임시방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황녀일 땐?

마지막에 그의 마음을 확인한 건 맞지만, 연인까지는…… 글쎄?

에슬린은 신중히 생각했다. 길어지는 침묵에 테베트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으나 눈치채지 못했다.

“음…… 연인은 아니었지만.”

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좋아하는 사람이기는 했어요.”

다시 굳어지고 말았지만.

“우습지도 않군.”

테베트는 그런 제 표정 변화를 자각하지도 못한 채 혀를 찼다.

기분이 급격히 더러워졌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거칠게 몸을 돌렸다. 나무에 기대어 서 있던 에슬린이 아쉽다는 듯 말했다.

“벌써 가는 건가요? 더 이야기하는 건 어때요? 궁금한 게 있으시면 알려 드릴게요.”

“필요 없어. 정 가기 싫거든 거기서 당신 연인이나 기다리도록 해.”

문득 그가 고개를 기울였다. 싸늘한 비웃음을 걸친 채였다.

“아,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했던가? 일방적으로.”

에슬린은 할 말을 잃었다.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그녀가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하여튼 사람 열 받게 말하는 데 선수라니까.”

저런 식으로 유치하게 굴어서 티격태격했던 적이 도대체 몇 번이었는지.

하지만 참지 못하고 먼저 다가와 사과하는 건 언제나 테베트였다.

에슬린은 옅게 웃으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빠르게 그의 뒤를 따라잡았다.

“나중에 진짜 후회할 거예요.”

테베트를 스치듯 지나가며 말을 던졌다. 일부러 가벼운 어조를 가장했다.

“…….”

테베트는 제 앞을 불쑥 치고 나가는 작은 등을 응시했다.

도대체 뭘 후회한단 말인가?

그는 코웃음을 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연한 보랏빛 머리카락이 눈앞에서 살랑거렸다.

‘그런데.’

저 하녀의 이름은 뭐지?

그제야 궁금해졌다.

그러나 의문은 곧 해소되었다.

‘에슬린.’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아는 에슬린이라는 이름을 가진 여자는 한 명뿐이었을 텐데.’

죽은 에슬린 베르타니아 황녀.

테베트는 제 손으로 독배를 건네 죽인 여자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니…….’

그는 미간을 구겼다.

‘왜 내가 그동안 접점 하나 없던 황녀에게 굳이 독배를 갖다준 거지?’

그날의 기억은 이상하게 희미했다. 그저 독배를 건네던 제 모습만 어렴풋이 떠오를 뿐이었다.

‘대체 왜?’

리페리우스는 중립 가문으로, 테베트 또한 그 어떤 정치적 입장도 드러내지 않으며 살아왔다.

앞으로도 그렇게 리페리우스의 이름을 짊어진 채 살 예정이었다.

이 지긋지긋한 슐든 대륙에서, 평생을 아무런 감정 없는 전쟁 도구로.

아버지와 조부, 머나먼 선대들이 모두 그러하였듯이 말이다.

그렇기에 황녀에게 독배를 갖다준 제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마치 내가…… 1황자의 편에라도 선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걸음을 옮기는 그의 표정이 복잡했다.

화살 같은 시선이 앞서 걷는 자그마한 등에 꽂혀 들었다.

‘……에슬린이라.’

비틀비틀 걷는 발걸음이 위태로워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건 저 여자 또한 마찬가지다.

수상하기 그지없는 하녀.

‘좋아하는 사람?’

그는 속으로 비웃었다.

거짓일 것이다. 그런 엉성한 말로 저를 속여 다른 꿍꿍이를 모색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내게 감추고 있는 게 뭘까?’

그는 생각했다.

‘그게 뭔지만 알아내면…… 처리해야겠군.’

검을 말아 쥐었다. 이 검을 뽑는 데 망설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왜일까?

알 수 없는 찜찜함이 자꾸만 몸을 파고들었다.

쏴아아-.

가랑비처럼 이어지던 빗줄기가 갑자기 굵어졌다.

시야가 자꾸만 흐려져 앞서 걷는 여자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모습이 희미해지자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테베트는 자기도 모르게 걸음을 재촉했다.

그때 천천히 걷던 뒷모습이 우뚝 멈추었다. 제자리에 선 여자가 근처 나무를 짚고 섰다. 그녀는 가만히 서서 땅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턱 끝을 기울였다. 뭘 하는 거지?

그때 위태롭게 흔들리던 작은 등이 풀썩 무너져 내렸다.

“……!”

테베트는 단숨에 달려갔다.

감싸 안은 그녀의 숨이 뜨거웠다. 흐트러진 옷자락 아래로 하얀 손목이 드러나 있었다.

그는 크게 눈을 부릅떴다. 왼쪽 손목이 빨갛게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체, 언제부터……!

“왜…….”

그가 허겁지겁 에슬린을 안아 들며 중얼거렸다.

“왜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말을!”

‘왜?’

차가운 반문이 머릿속에 울렸다.

‘그걸 네가 몰라서 묻나?’

온몸의 피가 모조리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정신 차려. 제발 정신 차려!’

그건 자신의 목소리였다.

* * *

테베트는 버려진 오두막을 발견했다.

근방 산지기가 임시 거처로 쓰다 버린 곳 같았다. 오두막이라기보다는 낡고 허름한 헛간 같은 곳이었다.

그것도 몇 년이나 방치되어 다 쓰러져 가는.

그러나 비를 피할 지붕이 있었다. 테베트는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열이 심하군.”

침상 위에 누운 에슬린의 이마가 들끓고 있었다.

이불도 뭣도 없는 황량한 곳이었다. 벽난로였던 곳은 비와 습기가 스며들어, 불을 붙일 수조차 없었다.

그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대체 이 몸을 가지고 어떻게.”

색색거리는 숨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려왔다.

에슬린은 조금만 무리해도 열이 잘 오르는 체질이었다. 그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것이라, 늘 그녀의 컨디션에 신경 쓰곤 했는데.

‘……?’

그는 순간 드는 위화감에 눈썹을 구겼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에슬린의 젖은 로브를 떼어 내던 손이 뚝 멈추었다.

“…….”

하얗게 질린 얼굴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갑자기 꽉 닫힌 눈이 영원히 뜨이지 않을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사실 그녀는 죽은 게 아닐까?

헐떡이듯 이어지는 숨소리에도 불구하고, 테베트는 황급히 그녀의 숨을 확인해 보았다.

“……하.”

손끝에 뜨거운 숨결이 닿았다. 그제야 그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긴장 줄을 놓을 수 있었다.

저절로 다리가 풀려 바닥에 주저앉았다.

‘왜 이렇게 불안한 거지?’

시체처럼 눈 감고 있는 저 여자가.

마치 그녀가 죽은 것을 본 적이 있는 사람처럼…….

테베트는 고개를 저었다.

장대비가 낡은 창문을 세차게 때렸다. 그는 그녀가 누운 곳에 비가 들지 않도록 창문에 판자를 덧댔다.

‘마른 천이 있어 다행이군.’

주변을 뒤지자 낡은 모포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그는 에슬린의 몸을 정성스레 닦았다.

‘손목의 부상은 오래되어 보이는데.’

손목을 단단히 고정하며 그는 생각했다.

문득 그녀의 손길을 쳐 냈던 자신이 떠올랐다.

‘그때…….’

에슬린의 오른손을 쳐 냈던가, 왼손을 쳐 냈던가?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 순간 아랫배가 차갑게 조여드는 듯했다.

내가…… 내가 지금 뭘 잊어버린 거지?

번쩍, 번개가 그의 황망한 얼굴에 비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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