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화 [S공금]
싸아아-
비가 이어졌다. 깊은 숲의 공기는 점점 더 싸늘해지기 시작했다.
“젠장.”
테베트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에슬린의 떨림이 전혀 멎지 않고 있었다.
투둑. 툭. 나무 바닥 위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무심코 내려다보니 진하게 번지는 핏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테베트는 제 어깨에서 흘러내리는 피를 대충 막으며 침상 위로 올라갔다.
‘생각보다 더…….’
덜덜 떨며 신음을 흘리는 얼굴이 가까워졌다. 하얗게 질린 입술을 보자 이상하게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그는 모포째 그녀를 끌어안았다.
‘나도 지쳐 있었나 보군.’
마물에 뜯긴 어깨로부터 독이 퍼져 가고 있었다. 자각하지 못했으나 그의 몸 또한 한계에 다다른 상태였다.
얇은 옷자락 사이로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테베트는 가만히 그녀의 이마를 짚어 보았다.
“…….”
문득 그의 미간이 좁아졌다.
이전에도 이렇게 간호한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착각인가?
차가운 비가 나무 천장을 쉴 새 없이 때렸다.
체온을 나눈 덕분인지 에슬린의 떨림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비릿한 비 냄새에 섞여 그녀의 체향이 코끝을 파고들었다.
‘조금만.’
그는 물 밖에 나와 처음 호흡하는 생물처럼 그 체취를 들이마셨다. 왠지 모르게 막힌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덮어 두었던 피로가 몰려오는 건 한순간이었다. 가물가물 흐려져 가는 시야 속에서 테베트는 생각했다.
‘조금만 이대로…….’
불을 피울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었다.
전쟁터에서도 불 없이 추위를 견디려면 서로의 체온에 기대곤 하니까.
그는 그렇게 제 행동을 합리화했다.
천천히, 그의 눈꺼풀이 내려앉았다.
‘보기보다 겁쟁이시네요.’
맑고 청명한 목소리가 호수 위 물결처럼 퍼졌다.
‘좋아요. 제가 슐든 대륙 너머에 다녀온 다음, 알려 드릴게요.’
‘뭘?’
‘바다를 건너는 게 얼마나 쉬웠는지 말이에요.’
테베트는 그때의 황당했던 감정을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부셨는데.
그렇게 말하던 얼굴이 말이다.
‘네 이름이 뭐지?’
꿈은 어딘가 이상했다.
상대의 얼굴이 거친 낙서가 된 것처럼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바람에 흩날리던 연보라색 머리카락만이 선명할 뿐.
‘전…….’
얼굴이 보이지 않았음에도 알 수 있었다. 그 순간 그녀가 만개한 꽃처럼 눈부시게 웃었다는 것을.
그때 제가 어떤 표정을 지었더라?
그때 느꼈던 감정은…….
“…….”
테베트는 불현듯 눈을 떴다.
품 안에서 미약한 움직임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테베트 경?”
낮게 갈라진 목소리가 들렸다.
창문을 때리는 빗소리에 파묻혀 몹시 작은 소리였지만, 테베트는 기민하게 그 목소리를 잡아냈다.
열에 들뜬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품속 에슬린의 푸른 눈동자를 내려다보았다.
“로즈벨.”
“……네?”
“당신이 내게 알려 준 이름. 로즈벨이었어.”
가라앉은 테베트의 목소리가 울렸다.
에슬린은 놀란 듯 잠시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시선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테베트의 가슴 언저리에서 깜빡, 깜빡 움직였다.
“맞아요.”
에슬린이 속삭였다.
“제 이름은…… 에슬린 로즈벨이에요.”
“에슬린, 로즈벨?”
“네.”
“당신은.”
테베트의 목울대가 크게 한 번 꿈틀거렸다. 에슬린은 눈을 들어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내게 뭐였지?”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이전에 따로 만난 적이 있나?”
에슬린은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이 두 개로, 네 개로, 끝내 수십 개로 흩어졌다.
하아. 긴 숨을 내뱉으며 눈을 질끈 감았다. 절절 끓는 열 때문인지 명징한 사고가 어려웠다.
“……맞아요.”
숨결 섞인 목소리가 가슴 언저리에 닿자 테베트의 온 신경이 바짝 긴장했다.
“날 찾아온 건 주로 당신이었죠…….”
에슬린의 목소리가 꺼질 것처럼 사그라들었다. 제대로 대답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눈꺼풀이 지나치게 무거웠다.
“그렇군.”
한참이 흐른 뒤에야 그가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나른하고도 몽롱한 시선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그랬던 거였어.”
“……가주님?”
“당신은 내게…….”
자신을 옭아맨 팔의 힘이 강해졌다. 테베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에슬린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냥 하녀가 아니었던 거야.”
나른한 숨이 머리 위로 떨어졌다. 그의 체온 역시 뜨거웠다.
“그렇다면 이해가 돼…….”
그가 눈을 감으며 횡설수설했다. 커다란 손이 에슬린의 뒤통수를 조심스레 감싸 쥐었다.
에슬린은 그의 말뜻을 헤아려 보려 했다. 하지만 지친 몸이 더 이상의 생각을 거부했다.
결국 그녀는 그냥 그의 품에 몸을 맡기는 것을 택했다. 죽음 같은 잠에 빠져든 건 순식간이었다.
* * *
‘그렇다면 이해가 돼…….’
이해되기는 무슨.
“하.”
테베트는 손질하던 검을 거칠게 내려놓았다.
밤사이 적당히 마른 벽난로에서 시뻘건 불길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쩌적! 장작이 쪼개지는 소리가 유독 컸다. 그는 반사적으로 홱 뒤를 돌아보았다.
“…….”
침대 위 에슬린이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들어 있었다.
“돌겠군.”
불빛을 머금은 미간이 사정없이 구겨졌다. 실내엔 훈훈한 온기가 맴돌았으나, 테베트 주변은 그저 냉랭하기만 했다.
“내가 왜 그따위 짓을.”
그는 머리를 쥐어뜯었다.
문득 어깨에서 욱신거리는 통증이 올라왔다. 에슬린을 옮기다 벌어진 상처 때문이었다.
옷을 갈아입으며 보았던 몸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크고 작은 상처들이 있었지만, 특히 상체를 가로지른 부상이 가장 심했다. 아마 최근에 다친 듯했다.
‘어디서 다친 것인가?’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어깨도 그렇고, 상체의 부상도 그렇고.
‘마물에게 당한 건 확실한데.’
이상했다. 그는 열 살 때부터 전장을 누빈 자였다.
마물을 상대하는 건 숨 쉬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몸이 다 자라고 난 뒤에는 다치는 일도 거의 없었다.
그런데 이 누더기 같은 몸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특히 어깨는 일부러 다친 것 같잖아.’
혹은 뭔가를 보호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
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은은한 햇살을 맞으며 잠든 여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이 상처마저 저 하녀와 연관이 있는 것인가?
그의 표정이 무섭게 굳어 가기 시작했다.
“…….”
테베트는 아주 느린 동작으로 몸을 일으켰다. 단단하게 각 잡힌 신체가 벽에 커다란 그림자를 그렸다.
그림자는 침대맡에서 멈추었다.
‘모든 게 이 하녀 때문이란 말인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이 기절하듯 잠들어 있었다.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은 그녀의 열이 내리고 있다는 증거였다.
비가 그친 뒤 해열과 진통에 좋은 약초를 찾아다 먹인 게 떠올랐다. 반쯤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대체 나와 무슨 사이였기에?’
그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게다가 그 기억.’
그건 꿈이 아니었다.
‘그건 대체 무엇일까?’
단단한 턱에 꽉 힘이 들어갔다.
‘전 로즈벨이라고 해요.’
따뜻한 햇살 속 활짝 웃던 여자.
그 미소에 발끝이 움찔거리고 입 안이 메마르던 감각. 난생처음 느껴 보는 이름 모를 감정의 덩어리들.
테베트는 강한 위기감을 느꼈다.
‘미친 일이지.’
흔들리는 눈으로 에슬린을 내려다보았다.
‘정말 미친 일이야.’
그는 참지 못하고 잠든 얼굴 위로 손을 뻗었다.
허공에 손을 띄운 채 그녀의 이목구비를 천천히 덧그렸다.
동그란 이마, 살짝 찌푸린 미간, 반듯한 눈썹, 핏줄이 비치는 눈꺼풀, 작고 오뚝한 코, 도톰한 입술, 부드러운 턱선…….
커다란 손이 멈춘 건, 가느다란 목덜미 위에서였다.
“…….”
통, 통.
그녀의 맥박이 눈에 보였다. 죽어 가는 여린 사슴의 것처럼 몹시 느리고 연약한 박동이었다.
이대로 움켜쥐면 곧 멈추겠지.
‘여기서 죽일까?’
그는 생각했다.
‘이 이상 휘둘리는 건 사양이야.’
쿵, 쿵, 쿵. 다시 솟구치는 맥박이 느껴졌다.
이번엔 제 심장에서 들리는 것이었다.
‘정말 하녀가 맞긴 한가?’
테베트 리페리우스는 감이 좋은 남자였다. 위협이 될 만한 것은 언제나 먼저 발견해 처리해 왔다. 그렇게 지금껏 살아남았다.
생존을 위한 야생의 감.
그 감이 지금 제게 말하고 있었다.
‘이 여자는 위험하다.’
꿈속 하녀는 황궁 하녀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여자는 자신을 공작저 하녀라고 소개했다.
여자가 정체를 속였다.
그것만으로 없앨 이유는 충분했다. 사실 진작 결단을 내렸어야 할 일이었다.
쿵쿵쿵쿵.
심장은 이제 흡사 전력 질주한 사람의 것처럼 뛰고 있었다.
“왜…….”
그의 반듯한 얼굴이 허물어졌다.
허공에 멈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떨림은 곧 온몸으로 번져나갔다.
왜 죽일 수 없지?
패닉이었다.
그때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것 같던 눈꺼풀이 움직였다. 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고, 투명한 푸른 눈동자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테베트 경?”
고요한 호수 같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자, 테베트는 화살에 맞은 사람처럼 몸을 굳혔다.
에슬린이 잠시 상황을 파악하듯 침묵했다. 그러다 제 목 위로 뻗어져 있는 테베트의 손을 발견했다.
“날…… 죽이고 싶나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허공에 울렸다.
에슬린은 당황하지도, 크게 놀라지도 않은 얼굴이었다. 그 모습에 당황한 건 오히려 테베트였다.
“……그래.”
꽉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손을 뻗은 건 자신인데, 되레 제 목을 틀어 잡힌 기분이 들었다.
“왜 정체를 속였지?”
“무슨?”
“넌 황궁 하녀였어.”
에슬린이 아, 하고 짧은 소리를 냈다.
“역시 기억이 조금 돌아온 건가요?”
그녀는 곤란한 듯 웃었다.
테베트는 크게 숨을 고르고 몸을 낮추었다. 싸늘한 눈동자가 에슬린을 잡아먹을 듯 가까워졌다.
“황궁의 누가 널 보낸 건지 말해. 1황자인가? 2황자?”
“일단 이 손부터 치우고…….”
“무슨 명령을 받았지? 약점이라도 캐내 오라던가? 그도 아니면, 설마 암살?”
“암살이라니. 제가요?”
에슬린이 피식 웃음을 흘렸다.
감히 테베트 리페리우스를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게다가 지금 상황만 보면, 누가 누굴 암살하려고 하는지 모르겠는데.
“진정해요. 놀랍게도 정답은 하나도 없으니까.”
“그럼, 뭐지?”
테베트의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평정을 가장하고 싶었으나 아마도 실패한 것 같았다.
단단한 팔이 에슬린의 베개 옆을 짚었다. 허리를 굽히자 얼굴이 가까워졌다.
“가주님?”
시선이 얽혔다. 숨결이 닿을 듯한 거리에서 테베트가 속삭였다.
“왜 나는 기억을 잃은 거지? 거기다 날 속인 당신을 죽일 수조차 없어. 왜?”
가까이에서 보니 그의 눈이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기억이 돌아왔냐고 물었나?”
“…….”
“맞아. 황궁 하녀인 당신이 나오던 기억이었지.”
에슬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테베트의 혼란이 고스란히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애매하게 돌아온 기억 때문에 더 혼란스러워진 거구나.’
더 안심시켜 줄걸.
에슬린이 안타까운 마음에 입술 끝을 물었다. 작은 동작이었음에도 검붉은 눈동자가 무섭게 따라붙었다.
피식, 그에게서 일순 조소가 터졌다.
“그런데 더 문제는 뭔 줄 알아?”
그가 낮게 속삭였다.
“당신을 죽여야 하는 내가, 그 빌어먹을 기억 때문에…….”
“…….”
당신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