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화
테베트는 한참이나 입을 다물었다.
결국 에슬린이 침묵을 깨며 물었다.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거죠?”
“…….”
그는 답하지 않았다. 검붉은 눈동자가 거친 파도 위 난파선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에슬린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불안해하지 말아요.”
나직한 속삭임이 흘렀다. 그의 혼란을 어떻게든 잠재워 주고 싶었다.
“다 괜찮으니까.”
모포에서 손을 꺼내 그의 손등을 감쌌다. 그러자 테베트가 불에 덴 듯 화들짝 놀라며 멀어졌다.
에슬린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내 기억에 대해 당신은 알고 있나?”
테베트가 감정을 갈무리한 채 침착하게 다시 물었다.
“당신이 누구인지 사실대로 말해. 어차피 난…… 당신을 죽이지도 못하는 것 같으니.”
벼랑 끝에 선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에슬린은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그러나 해 줄 수 있는 말은 없었다.
[만약 네가 우연히라도 기억을 되찾게 된다면, 그땐 저 남자가 너를 잊을 것이다.]
‘테베트 경이 기억을 찾으면 안 돼.’
대가는 아직 유효했다.
그가 기억을 찾으면, 이번엔 제가 또다시 기억을 잃게 되리라.
‘처음으로 돌아갈 순 없어.’
에슬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숨기는 건 없어요. ……제가 말씀드린 게 전부예요.”
“하. 내가 하녀와 우연히 마력 폭발에 휘말렸다? 그걸 믿으라고?”
테베트가 비웃듯 물었다.
“……맞아요.”
에슬린은 모든 것을 얼버무릴 수밖에 없는 현실이 원망스러웠다.
‘나 같아도 절대 못 믿겠네.’
그렇다고 모든 걸 밝힐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답답해진 에슬린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현기증을 참고 반듯하게 걸어 테베트 앞에 섰다.
가까이에서 눈을 보고 말해 주고 싶었다.
“모든 걸 말할 수는 없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제가 가주님의 적이 아니라는 거예요.”
그는 불신 가득한 표정이었다. 그 시선을 참다못한 에슬린이 호소하듯 테베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믿어 주세요.”
“아무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대체 뭘 믿으란 말인지 모르겠군.”
그가 위협하듯 가까워졌다.
그 순간 테베트의 향기가 파고들었다. 에슬린은 뒤늦게 그 사실을 인지했다.
그러고 보니 이 첩첩산중 오두막에 오직 테베트와 자신뿐이었다. 게다가 어젯밤엔 그의 품에 안겨서…….
새삼스럽게 몸이 굳었다. 갑자기 모든 오감이 활성화된 듯 신경이 예민해졌다.
두근, 두근. 이 상황에서도 심장이 뛰었다.
“아.”
에슬린은 도망치듯 옷자락을 놓았다. 재빨리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본 테베트가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무섭나? 내가 당신을 해칠까 봐?”
“아뇨. 그게 아니라 갑자기 긴장해서.”
에슬린이 갈 곳 잃은 두 손을 맞잡았다. 어딘지 모르게 초조해 보이는 동작이었다.
“이제 와서?”
정작 목을 비틀려 할 때는 침착하더니?
테베트는 그렇게 비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도 그럴게.
“좋아하는 사람하고 있으니까…….”
불시에 그런 기습을 당하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뭐……”
라고?
짧은 단어조차 보기 좋게 뭉개져 버렸다. 그는 기다란 작살에 꿰인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
에슬린이 제 입을 틀어막고 뒷걸음질 쳤다. 스스로 조금 놀란 눈치였다.
그러나 잠시 생각하다, 곧 입가를 가린 손을 내려놓았다.
투명하고, 지나치게 반짝이는 눈동자가 테베트를 향했다.
한 치의 흔들림 없는, 확신을 담은 눈빛.
“좋아하는 사람하고 있으니까요.”
에슬린은 한 번 더 힘주어 말했다. 그러곤 고개를 숙였다. 이내 짧게 웃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야, 진작 말할걸.”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였다.
“세상이 무너지는 일도 아니었네…….”
이 말이 뭐 그렇게 어렵다고, 그땐 하지 못했던 걸까.
당신이 들었다면.
기억이 있는 당신이 들었다면…….
과연 어떤 표정을 지어 주었을까?
“테베, 가주님?”
에슬린은 고개를 들었다. 지나치게 아무런 반응이 없는 테베트가 의아해서였다.
‘하긴, 좀 어이가 없으려나.’
갑작스럽게 나타난 하녀가 좋아한다고 대뜸 말하다니 말이다.
에슬린은 괜스레 콧잔등을 긁었다.
“음? 물을 올려놨어요?”
무언가가 끓어 넘치는 소리에 에슬린이 몸을 돌렸다. 벽난로에 올려 둔 주전자가 끓다 못해 타고 있었다. 에슬린은 재빨리 다가갔다.
“…….”
그 뒷모습을 테베트는 망연히 바라보았다.
그는 오래도록 아무 말을 하지 못했다. 정말 오래도록.
일부러 입을 다문 것은 아니었다.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탓도 있었지만, 사실 입을 열려고 하면 자꾸만…….
이상하게 자꾸만 목을 치고 뜨거운 무언가가 넘어오려 했기 때문이었다.
* * *
에슬린은 넋이 나간 테베트를 포기하고 다시 잠이 들었다. 미열이 남은 몸이 자꾸만 까라졌기 때문이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에슬린은 혼자였다.
‘……버려진 건가?’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씁쓸한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어쩔 수 없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앉았다. 스스로 손을 들어 이마를 짚어 보았다. 여전히 미열은 느껴졌지만, 아까보다는 상태가 훨씬 나았다.
‘그나저나 여긴 어디지?’
창밖을 보니 어둑하게 날이 저물어 있었다.
‘버려진 산장 같은데.’
시야를 넓혀 내부를 살펴보았다.
활활 타오르는 벽난로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테이블과 그 위에 놓인 램프, 주변에 어지러이 놓인 약초들, 낡은 양철 주전자와 컵들, 천을 가지런히 잘라 만든 듯한 붕대…… 붕대?
에슬린은 그제야 제 왼쪽 손목을 들여다보았다. 수제 붕대가 친친 감겨 있었다.
‘간호해 준 거구나.’
왠지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렸다.
지금이야 혼자 남겨지고 말았지만, 어쨌든 숲에서 버려진 게 아니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솔직히 버려지는 건 어느 정도 예상했던 일이다.
기억을 잃은 테베트에게 자신은 우선순위가 아닐 테니까.
‘이제 어쩌지……?’
에슬린은 몸을 일으켰다.
아우우! 그때 멀리서 야생 동물 우는 소리가 들렸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일어섰다.
‘맹수가 있나?’
깊은 숲 한가운데였다. 게다가 이 산장은 언제 쓰러질지 모르는 낡은 나무집이었고.
‘문을 잘 잠갔는지라도…… 봐야겠어.’
에슬린이 걸음을 옮겼다.
출입문으로 다가가 잠금 장치를 달칵거리는데.
“어딜 도망가려는 거지?”
으르렁대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어깨가 홱 뒤를 돌았다.
“테베트 경?”
“감히 이름을…….”
말을 삼킨 테베트가 긴 숨을 내쉬었다.
“됐어.”
“아, 죄송해요, 가주님.”
꿈틀, 그의 눈썹이 크게 움직였다.
대체 어디서 등장한 거지? 에슬린은 그의 뒤를 살폈다. 어둠에 잠긴 벽면에 작은 문이 있는 걸 발견했다.
그의 머리카락이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아마도 몸을 씻은 것 같았다.
“그래서? 왜 도망가려고 했지?”
“도망가려고 했던 거 아니에요.”
에슬린이 고개를 저었다.
“변명은.”
그는 비뚜름하게 웃을 뿐이었다.
“변명이 아니라 가주님께서 절 버리고 가신 줄 알았거든요. 늑대 소리가 들리길래 문단속을 해야 할 것 같아서…….”
“내가 왜 당신을 버려?”
“네?”
당연한 듯 흘러나온 말에 에슬린이 턱을 기울였다.
“지금부터 당신 정체를 파헤칠 작정인데. 왜 놔줘야 하지?”
테베트는 감흥 없는 눈으로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는 냉정한 표정이었다.
“파헤친다고요?”
“그래. 그런 거짓말로 날 흔들면서까지 뭘 숨기고 있는지, 끝까지 알아내고 싶어졌어.”
흔들리긴 한 건가? 그러나 에슬린은 굳이 말하지 않았다.
“제 고백이 거짓말이라는 거예요?”
“그럼 진심이었다고 할 셈인가?”
에슬린이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그녀의 고백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한 임시방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하여튼 의심 많다니까.’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예상은 했지만 조금 허탈했다.
“그러니까.”
테베트가 쑥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이 에슬린의 귓불을 슬쩍 스치고 지나갔다.
“당신은 도망 못 가.”
철컥, 등 뒤에 있던 자물쇠가 잠기는 소리가 났다.
“내 곁에서 하녀 노릇이든, 첩자 노릇이든, 어디 한번 잘해 보라고.”
붉은 홍채가 알 수 없는 기색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에슬린은 모포를 두른 채 벽난로 앞에 앉아 있었다.
불을 쬐며 창 너머를 응시했다. 밤이 깊었으나 온종일 잤던 탓에 전혀 졸리지 않았다.
“그래서 여긴 어디예요?”
에슬린이 물었다.
떨어진 곳에서 검을 손질하던 테베트가 고개를 들었다. 잠시 간격을 두고 그가 대답했다.
“글쎄. 정상은 한참 지난 것 같지만.”
애매한 대답에 에슬린의 눈꼬리가 살짝 떨어졌다.
“길을 잃은 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롭시온은 어느 방향인지 아시나요?”
“……그것도 글쎄. 되는대로 이동하는 바람에 길을 벗어났어.”
에슬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걸음을 재촉해야 하는 마당에, 경로를 이탈해 버렸다는 말은 솔직히 달갑지 않았다.
“큰일이네요. 이곳은 어떻게 찾은 거죠? 비가 많이 왔나요? 말을 타야 하는데 길이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승마를 할 줄 아는 건가?”
테베트가 검을 내려놓고 에슬린을 빤히 보았다.
가느다란 어깨가 미세하게 경련했다. 테베트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제가 아니라, 가주님께서 말을 타셔야 하니까요. 그보다.”
“불리한 대답은 얼버무리는 습관이 있군.”
……예리하네.
에슬린은 속으로 한숨을 삼켰다.
“머리 굴리지 말고 대답해, 에슬린 로즈벨. 말을 탈 줄 알아? 하녀가 승마를 어디서 배운 거지?”
그의 얼굴에 차가운 조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것 봐, 넌 역시 첩자야. 냉기 어린 표정은 그렇게 확신하는 듯했다.
‘감이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에슬린은 일렁이는 불길을 바라보았다.
‘이건 또 뭐라고 둘러대야 하나?’
옆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견디며 차분하게 머리를 굴리는 순간.
쿠웅!
산장 문이 거칠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