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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63화 (63/147)

63화

“뭐죠?”

에슬린이 벌떡 일어섰다.

“흠.”

문틈으로 등장한 인물이 짧은 콧소리를 냈다.

“이런 산속에 남녀가 단둘이…… 혹시 내가 지금 혈기 왕성한 뭔가를 방해한 건가?”

땅딸막한 노인이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그녀는 끝단에 기묘한 술이 잔뜩 달린 옷을 입고 있었다.

스으윽, 탁. 스으윽, 탁.

나무 지팡이가 일정한 박자로 바닥을 짚었다.

“당신은……!”

에슬린의 눈이 커졌다.

순간 흐릿한 시선의 노인과 눈이 마주친 듯한 착각이 들었다.

노인은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겨 망토를 벽에 걸었다. 지팡이를 벽난로 옆에 세워 두는 동작까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넌 누구냐.”

삐딱하게 자리에 앉은 채 테베트가 물었다. 그는 눈동자만 굴려 노인의 행동을 주시하고 있었다.

“누구냐고?”

파핫! 노인이 걸걸한 목소리로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구먼. 그건 내가 할 말이야! 대체 남의 집에 쳐들어온 당신들은 누구야?”

막힘없는 음성이었다.

‘확실해.’

레비브 마을의 골동품 가판에서 만났던 바로 그 노인.

‘나에게 펠리서스 마법석을 준 바로 그 여인이잖아.’

에슬린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다.

“어르신, 여기 살고 계셨던 거예요?”

“음? 그쪽은…….”

“절 기억하세요?”

노인은 주름진 입술을 끌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착각이 아니었다.

그녀는 정말로 에슬린의 눈동자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눈이 좋지 않은 게 아니었던 건가?’

동공 주변으로 푸른빛이 일렁거렸다. 에슬린은 고개를 갸웃했다.

노인이 휙휙 내부를 둘러보며 혀를 찼다.

“어후. 집 안 꼴이 엉망이구먼.”

그녀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주변에 굴러다니던 잡동사니들을 집어 들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청소 도구를 쥔 채였다.

“어르신.”

에슬린이 한 발자국 다가섰다.

그때 노인이 확 몸을 붙여 왔다.

“그래서…… 원하던 불행은 피했나?”

에슬린에게만 들릴 듯한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불행이요?”

“내게서 그 귀한 보물을 빼앗았지 않아?”

“빼앗았다니…….”

끌끌끌, 노인은 바람 든 것처럼 웃었다.

“근데 어째 기운이 이상하군?”

하얗게 센 눈썹이 비쭉 치켜 올라갔다. 그녀의 눈이 에슬린을 샅샅이 훑어 내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게야?”

“실은……”

“아, 잠깐. 기다려. 일단 더 중요한 걸 먼저 해결하지.”

중요한 거?

에슬린이 눈매를 찌푸렸다. 노인은 그런 에슬린의 팔을 쥐고 절뚝이는 걸음을 옮겼다.

끼이익. 테베트가 나왔던 문으로 들어간 노인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나왔다.

“가서 따뜻하게 몸이나 좀 데우고 나와. 그 시체 같은 체온부터 어떻게 해야 하지 않겠어?”

“네?”

모락모락, 김이 나는 나무 욕조가 눈앞에 있었다.

“뭐 해? 안 들어가고!”

“어르신?”

“얘기는 따뜻하고 씻고, 제대로 된 식사를 한 다음에 듣는 게 낫겠어.”

노인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느리지만 힘 있는 걸음으로 이번엔 테베트에게 다가갔다.

“자네는 식사 준비를 좀 돕도록 해! 여태껏 밥도 안 먹이고 몹쓸 남자구먼!”

“지금 뭘 하는 거지?”

낮은 목소리로 그가 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킬킬거리며 기묘하게 웃을 뿐이었다.

“내 집에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는 중인데. 왜! 불만들 있나?”

* * *

“소란스럽게 해서 죄송해요.”

에슬린이 식기를 집어 들며 말했다.

따듯한 수프가 식도를 타고 미끄러졌다. 막 씻고 나온 그녀의 머리카락 끝이 젖어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는데 테베트가 보이지 않았다.

“테베트 경…… 그러니까 저와 같이 있던 사람은요?”

“장작이 부족하길래 가져오라고 내쫓았지.”

“이 밤에요? 위험할 텐데.”

“위험? 누가?”

노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되물었다.

“저 사나운 기운에 맹수들도 배 뒤집고 죽은 척하고 있을 판인데.”

에슬린은 조용히 수프를 떠먹었다. 괜한 말을 했다 싶었다.

테이블 위에 놓인 램프 불빛이 깜빡, 깜빡 흔들렸다.

나이 든 여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상태가 왜 그 모양이야? 남부 열병이라도 걸린 사람처럼. 마을에선 멀쩡했잖아.”

“사정이 있어서 숲을 좀 헤맸어요.”

노인이 슥 눈을 들었다.

푸른 안개가 일렁이는 듯한 눈동자가 역시나 좀 묘하다고, 에슬린은 생각했다.

“그 우락부락하던 기사는 어디에 가고?”

“아, 젝스 경이요? 그것도…… 사정이 있어서.”

“펠리서스가 저렇게 된 것도 사정이 있어서겠지?”

뚝. 에슬린의 동작이 멈추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노인은 이미 바닥이 드러난 그릇을 벅벅 긁고 있을 뿐이었다.

“어디 좀 보여 줄 수 있겠나?”

노인이 물었다. 에슬린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벗어 둔 로브 안쪽에서 청록색 주머니를 꺼내 들었다.

그 안에는 다양한 물건이 있었는데, 조각난 펠리서스는 그중 하나였다.

다섯 조각 난 붉은 돌이 테이블 위에 놓였다.

“이런.”

끙, 노인의 미간 주름이 짙어졌다.

“그래도 용케 다 모아 두고 있었군?”

“귀한 마법석이니까요.”

조각난 마법석을 고쳤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귀한 보물(이었던 것)을 아무 데나 내버려 두고 올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놈이 몹시 슬퍼하겠군.”

노인이 중얼거렸다. 에슬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주분이 아끼던 물건이었나 봐요. 그러고 보니, 여기까지 혼자 오신 거예요?”

“손주?”

“네. 그 가판에서…….”

젝스를 모욕하던 얼굴이 떠올랐다. 에슬린의 미간이 절로 구겨졌다.

푸흐흐, 노인이 바람 빠지듯 웃었다.

“난 결혼도 안 했는데 무슨 손주? 걘 그냥 옆 상점 주인의 자식이야.”

“그런가요?”

에슬린은 눈을 깜빡였다. 둘 사이가 친근하게 느껴져 당연히 가족인 줄 알았다.

“뭐, 옆 상점 주인이 내겐 아들처럼 깍듯이 굴긴 해. 그러니 영 틀린 말은 아니라고 해 두지.”

“하아…….”

“마을에서 무난하게 지내려면, 그런 것도 필요한 법이고.”

침묵이 흘렀다. 그녀의 말을 곱씹던 에슬린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어르신.”

“응?”

“왜 이런 산속에 위험하게 혼자 사세요?”

노인이 비식 웃었다.

“이곳이 나에겐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지.”

“그 눈은…… 어떻게 된 거죠?”

“밤이면 나름 말을 듣더군. 낮엔 영 쓸모없지만.”

램프 불빛이 곧 꺼질 듯 위태롭게 흔들렸다. 에슬린이 속삭였다.

“어르신께서는 역시 마법사시군요.”

끌끌끌, 노인은 대답 대신 몸을 들썩이며 웃었다.

근사한 주름이 잡힌 눈가에 즐거움이 한 아름 맺혀 있었다.

“펠리서스를 알아본 것도 그렇고, 눈치가 좋구먼. 아는 마법사라도 있나 보지?”

노인이 손을 뻗어 펠리서스 조각 하나를 집어 들었다.

“그렇다면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뭐죠?”

“부서진 펠리서스를 고치고 싶은 생각이 있나?”

그 말에 에슬린의 동공이 크게 부풀었다.

“그게 가능한가요?”

“붉은빛이 아직 살아 있는 걸 보면…… 완전히 못 쓰게 된 건 아니야. 그저 강한 힘에 의해 제 형태를 유지하기 어려워졌을 뿐.”

노인은 램프 불빛에 이리저리 조각을 비추어 보았다. 에슬린의 호흡이 살짝 가빠졌다.

“도대체 무슨 불행을 피하고 싶었길래 펠리서스가 이 모양이 된 거야?”

노인이 물었다. 그 말뜻을 헤아리던 에슬린은 한발 늦게 대답했다.

“……글쎄요. 그건 아마…….”

“저 남자에게 물어봐야 하는 건가?”

노인이 재차 낄낄 웃었다.

“재미있군. 역시 참으로 재미있어!”

‘이 여인은 누구지?’

에슬린은 그제야 이 마법사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동시에 함부로 물어선 안 될 것 같은 강렬한 예감도 들었다.

‘보통 인물이 아니야.’

어찌 됐건 엄청난 실력자다.

디에리안과 비슷하거나, 혹은 그 이상…….

“어르신, 펠리서스를 재생해 주세요.”

잠깐이었지만, 테베트의 기억이 멀쩡했던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에슬린은 그 원인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변수는 오직 하나였다.

불행을 피하게 해 준다는 이 보물.

‘펠리서스 덕분에 테베트 경의 기억이 잠깐이나마 멀쩡했던 거야.’

“좋아. 고쳐 주지.”

즉답이 튀어나왔다. 에슬린의 낯이 단박에 환해졌다.

“하지만 여기선 안 돼. 여긴 임시 거처라 보다시피 아무것도 없거든.”

실험 도구도 마법 책도, 재료도, 아무것도.

노인이 덧붙이며 웃었다. 에슬린의 상체가 테이블 위로 기울었다.

“그럼 어디서 가능한 거죠?”

“남부.”

“네?”

노인은 뭘 되묻느냐는 듯한 얼굴로 쩝 하는 소리를 냈다.

“베르타니아 남부 말이야.”

“…….”

“어때, 나와 갈 텐가?”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남부라니…….

에슬린은 짧은 숨을 삼켰다.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대답하기 위해 입술을 움직일 때였다.

“지금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사나운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누굴, 어디로 데려가?”

활짝 열린 문에서부터 차가운 밤공기가 거침없이 달려들었다.

쿵. 산더미 같은 장작이 아무렇게나 바닥에 놓였다.

“가주님?”

“무슨 작당 모의 중인가 했더니.”

순식간에 다가온 테베트가 테이블을 짚었다. 에슬린을 응시하는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는 듯했다.

“역시 도망칠 생각이었던 거군.”

에슬린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런 거 아니에요. ……지금은 진짜 도망칠 생각 없는데.”

왜 항상 이렇게 되는 거지?

마지막 말은 한숨에 가까운 혼잣말이었다.

기억이 있든, 없든.

왜 그는 늘 자신이 당장이라도 사라질 사람처럼 구는 걸까?

에슬린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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