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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64화 (64/147)

64화

“어르신.”

에슬린이 노인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테베트의 시선은 애써 외면했다.

“지금 남부로 떠나는 건 어려워요.”

“그런가?”

노인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일 따름이었다.

“네. 몹시 흥미로운 제안이지만, 지금은 여길 떠날 수 없거든요. 나중에 적당한 사람을 보낼게요. 그래도 될까요?”

“적당한 사람?”

“네, 아는 마법사가 있어요.”

“오호. 좋지, 좋아. 언제든 환영이야.”

시원스러운 말투에 에슬린이 작게 미소 지었다.

그녀는 수프 접시를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내 석고상처럼 굳어 있던 남자가 눈동자만 움직여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어요.”

“…….”

“전 도망치지 않아요, 가주님.”

테베트는 표정을 굳혔다.

그 얼굴을 오래 바라보지 않고 에슬린은 차분히 몸을 돌렸다.

“어르신, 그릇은 제가 정리할게요.”

“마음대로 해. 주방은 저쪽이야.”

타박, 타박. 에슬린이 희미한 불빛이 켜진 곳으로 사라졌다. 그때까지 테베트의 붉은 시선은 화살처럼 그녀에게 박혀 있었다.

“쯔쯧. 성질머리하고는.”

옆에서 짧게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혼란스러운가?”

그는 뻣뻣하게 고개를 돌렸다. 한심하다는 듯한 표정이 저를 향해 있었다.

“그렇게 세상 무너진 표정 지을 거면 그냥 다정하게 대해 주든가.”

“뭐?”

“그렇게 하면 손해는 안 볼 것 같아서 해 주는 말이야.”

읏차, 노인이 몸을 일으켰다. 푸른 기운이 일렁이는 눈동자가 보였다.

왠지 모를 기시감이 드는 눈빛.

“후회는 한 번으로 족하지 않겠어?”

데구르르.

그때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붉은 조각 하나가 굴러왔다. 마치 존재감을 드러내듯, 조각은 테베트의 손끝에 와 멈추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그 조각을 쥐었다.

차가울 거라고 생각했던 돌은 의외로 따뜻했다.

이 돌은 뭐지?

테베트가 손안에 있는 붉은 마법석을 내려다보았다.

‘이건 내 것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건 테베트가 가진 몇 안 되는 귀한 것이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받은 소중한 물건.

‘하지만…….’

누구에게 받았더라?

“…….”

그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자가 사라진 공간에는 어둠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의 빈자리는 뻥 뚫린 구렁텅이를 닮았다. 무엇으로도 메워질 것 같지 않은 공허함. 까만 공백.

그곳을 보고 있자, 갑자기 그 구덩이 속으로 내동댕이쳐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찔했고, 피할 수 없었다.

* * *

날이 밝았다. 그러나 두 사람은 산장을 떠나지 못했다. 새벽부터 다시 거센 비가 시작됐기 때문이었다.

비는 이틀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의외로 테베트는 잠잠했다. 오히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거의 입도 열지 않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불똥처럼 굴던 그가 조용하니, 에슬린 또한 별달리 신경 쓸 게 없었다. 간간이 노인의 일을 도우며 몸 회복에 집중할 뿐이었다.

“펠리서스는 잘 갖고 있다가 필요할 때 내게 보내도록 해.”

노인이 펠리서스를 담은 에슬린의 청록색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가 그쳤으니 허브나 좀 주우러 가야겠군.”

“도와드릴까요?”

“떠날 준비나 해.”

노인은 커다란 자루를 쥔 채 훌쩍 나갔다.

에슬린은 창문을 열었다.

“해가 떴네요.”

창틀을 짚고,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낸 햇볕을 듬뿍 쬐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숲 냄새가 코끝 가득 퍼져 들었다.

“드디어 떠날 수 있겠어요.”

햇살을 맞은 그녀의 얼굴이 모처럼 환했다.

“그렇군.”

그 모습을 지켜보던 테베트가 중얼거렸다.

“차라도 좀 드시겠어요, 가주님?”

에슬린이 정중하게 물었다.

제법 하녀 같은 말투였다고 테베트는 생각했다.

그건 에슬린도 마찬가지였다.

주전자에 물을 올리며, 공작저에서 일하던 날들을 떠올렸다.

이젠 익숙해져 버린 하녀의 일들. 아니, 그건 그냥 그녀가 지금껏 배우지 못했던 일상의 일들일지도 모른다.

‘우물 안 개구리였지.’

에슬린은 속으로 웃으며 머리 위 선반을 열었다. 가장 높은 곳에 찻잎 통이 놓여 있었다.

‘안 닿네.’

뒤꿈치를 들어도 꺼낼 수 없었다. 한참을 끙끙대는데 불쑥 뒤에서 그림자가 졌다.

“…….”

뒤통수에서 느껴지는 상체의 단단함. 에슬린은 순간 숨을 멈추었다.

“이건가?”

테베트가 찻잎 통을 꺼내며 물었다. 그녀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었다.

“고마워요.”

그러나 테베트는 그대로 등을 돌렸다. 찻잎을 가져가 직접 차를 우리기 시작한다.

“…….”

“뭐 해? 안 오고.”

테이블 위에 찻잔을 내려놓은 그가 여상하게 말했다. 에슬린은 멍한 표정으로 다가가 앉았다.

“몸은?”

그는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괜찮아요.”

“정말인가? 전처럼 갑자기 쓰러지는 건 사양이야.”

영 미덥지 못하다는 말투였다.

에슬린은 가만히 차를 마셨다. 눈을 살짝 내리깔자, 촘촘한 속눈썹이 흰 볼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정말 괜찮아요. 숲에선 폐를 끼쳐 미안했어요. 저도 그렇게 갑자기 컨디션이 나빠질 줄은 몰라서…….”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잖아.

테베트는 뒷말을 삼켰다. 그녀의 사과에 이유 모를 불쾌감이 치밀었다.

“알아요. 그런 의미로 한 말 아닌 거.”

에슬린은 피식 웃곤 다시 그림처럼 차를 마셨다.

테베트는 입을 다물고 그녀를 응시했다.

군더더기 없이 반듯한 자세.

식사를 할 때도 그랬다. 몸에 익은 완벽한 습관은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것이었다.

‘하녀라고?’

그는 찻잔으로 입술을 감추며 조소했다.

승마를 할 줄 알고, 귀족들이나 배울 법한 식사 예절을 몸에 익힌 여자가.

정말 그냥 하녀라고?

테베트는 가늘게 눈매를 좁혔다.

“비 덕분에 허브 상태가 아주 좋군!”

그때 노인이 껄껄 웃으며 나타났다. 싱싱한 허브를 자루 가득 담은 채였다.

노인의 등장을 신호로 테베트는 생각에서 깨어났다.

“길이 괜찮은지 보고 오지.”

그는 몸을 일으켰다. 밖으로 나가는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에슬린 또한 자리에서 일어나 노인의 허브 정리를 도왔다.

“떠날 건가?”

노인이 물었다.

“네. 벌써 시간을 많이 지체했거든요.”

“기다리는 사람이 있나 보지?”

“네. 롭시온에서요.”

“흠. 롭시온이라…….”

조금 쉰 목소리가 중얼거렸다.

“길은 알고?”

허브의 물기를 털던 노인이 고개를 들었다. 에슬린은 곤란한 듯 눈썹을 늘어뜨렸다.

“아뇨. 어르신께선 혹시 이 주변 지리를 아시나요?”

“당연하지. 날 뭘로 보고? 음, 그러고 보니 예전에 그려 놓은 지도가 있어. 가져가겠나?”

“물론이에요. 감사해요.”

에슬린이 빙긋 웃었다.

노인이 건넨 지도는 몹시 조악했지만, 길을 찾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레비브 근방 지도는 예전에 황궁에서 봐 둔 적이 있었다.

그 기억을 조합하면 어렵지 않게 산을 벗어날 수 있으리라.

“그보다 걸어서 가려면 며칠은 거뜬히 걸릴 텐데?”

“가까운 촌락에 들러 말을 빌릴 생각이었어요.”

말? 노인이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 이 비에 산 중턱까지 오는 말 장수들이 있을지.”

“그건 맞지만…… 이걸 줘도 어려울까요?”

에슬린은 품 안에 갖고 있던 청록색 주머니를 내밀었다. 펠리서스 조각이 들어 있던 그 주머니였다.

노인이 주머니를 받아 들자 짤그락, 소리가 났다. 소리만으로 내부를 짐작한 노인이 잠시 눈을 크게 키웠다.

“이런, 내 생각보다 똑똑하군.”

에슬린은 다시 주머니를 받아 품에 넣었다.

“어르신께서는요?”

“나는 레비브로 돌아가야지. 장사할 허브를 가지러 온 것뿐이었거든. 뭐, 여러 가지 겸사겸사긴 했지만.”

노인이 지팡이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다시 흐려진 채였다. 완전히 보이지 않는 건 아닌 듯했지만 어쨌든 어제만큼 멀쩡한 건 아니었다.

밤에만 발동하는 시각 마법 종류인 걸까?

에슬린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흠, 이쯤인데.”

노인이 주변을 더듬었다. 그러다 아무렇게나 놓인 빈 종이를 집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내가 필요하면 거기에 편지를 써 보내도록 해. 아무렇게나 보내도 어떻게든 내게 도착할 거야.”

“아, 네. 감사해요…….”

한 손엔 지도, 한 손엔 편지지. 에슬린의 양손이 순식간에 종이로 가득 찼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에슬린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상한 질문일 수도 있는데, 여쭤봐도 될까요?”

“뭐지?”

노인이 허공을 응시하며 물었다.

부드럽게 웃는 얼굴이 어쩐지 제 질문을 예상한 사람 같았다.

“어르신과 제가, 이전에 만난 적이 있나요?”

당신은 제가 누군지 아시나요?

사실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그녀는 에둘러 말하는 걸 택했다.

어차피 에슬린의 정체를 아는 사람이라면, 제 질문의 의도를 파악했을 것이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노인이 목을 긁으며 웃었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어서요.”

“푸흐흐. 아쉽지만, 아니야.”

시원스러운 답변이었다.

스윽, 문득 노인의 고개가 창문 언저리로 돌아갔다. 에슬린의 고개 또한 따라서 움직였다.

창문 너머에서 테베트가 이쪽을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내가 일면식이 있는 건 오히려 저쪽이지.”

노인은 테베트를 가리키며 덧붙였다.

“네?”

“왜인진 몰라도 날 까맣게 잊은 것 같지만 말이야.”

무슨 말이지?

에슬린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노인은 더 설명하지 않았다. 분주히 몸을 움직여 짐 정리를 끝마칠 뿐이었다.

“자, 그럼 이제 아침 차리는 걸 좀 도울 텐가?”

걸걸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아니면 역시, 당신 시종 노릇을 자처하는 저 남자에게 맡길까?”

“어르신.”

클클클, 노인이 장난스레 웃으며 몸을 물렸다.

“든든히 배를 채우고 나면 떠나도록 해. 자네가 있을 곳으로.”

거칠지만 부드러운 목소리가 나직이 울렸다. 주름진 눈가가 우아한 곡선을 그리며 휘었다.

“비바람도 멈췄겠다, 길도 알았겠다.”

“…….”

“멈춰 있을 이유가 뭐가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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