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5화
“으악! 뱀! 뱀이요, 젝스 경!”
디에리안이 소리쳤다.
그는 번쩍 튀어 올라 젝스의 커다란 몸에 매달렸다.
스스스, 작은 뱀이 유유히 그들 앞을 지나갔다.
“독사는 아닙니다. 잘 피해 가시면……”
“저기 전갈, 전갈!”
“……전갈이 아니라 사마귀입니다.”
젝스가 한숨처럼 말했다.
디에리안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무래도 다시 푸른 말을 만들어야겠습니다.”
“곧 롭시온 입구가 보일 거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맞아요. 하지만 더는 이런 생물체들과 걷고 싶지 않단 말입니다. 발이 없거나, 혹은 너무 많거나!”
“……디에리안 님, 마법 약은 대체 어떻게 만드시는 겁니까?”
젝스가 진심을 담아 물었다. 디에리안은 뭔 소리를 하냐는 듯 얼굴을 구겼다.
“그것들은 소중하고 귀한 재료일 뿐입니다.”
지네, 독사, 갯지렁이, 온갖 종류의 정체 모를 벌레 같은 것들이?
젝스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한낮의 태양이 두 사람 머리 위에서 기세 좋게 타오르고 있었다.
“숲이 곧 끝납니다. 괜히 마력 낭비하지 마시고 조금만 참으십시오.”
“쳇.”
디에리안은 마른 손을 들어 거칠게 얼굴을 문질렀다.
며칠째 마법을 펼친 몸은 사실 이미 한계였다. 둘은 며칠째 이어진 폭우를 뚫고 산을 넘었다.
‘디에리안 님의 마법이 없었다면 아마 산 중턱에서 발이 묶였겠지.’
젝스는 새삼 그의 마법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그 대단한 마법사는 쉴 새 없이 투덜거리고 있었지만.
“하아……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젠장. 망할 리페리우스. 돌아가면 반드시 저주 마법을 완성해 보낼 테다…….”
“디에리안 님.”
“왜요?”
“정말 전하를 찾지 않고 우리끼리 롭시온까지 오는 게 맞았던 겁니까?”
디에리안은 불퉁한 낯을 들어 젝스의 얼굴을 훑었다. 우직한 기사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쯧, 디에리안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찼다.
“어쩔 수 없지 않았습니까. 추적은 어렵고, 어설프게 길이 엇갈리느니 그냥 목적지에서 기다릴 수밖에요.”
“추적 마법은 아직도 막힌 겁니까?”
그는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추적 마법도, 탐지 마법도, 그 무엇 하나 에슬린에게 닿지 못했다.
단순히 마력 부족이 문제가 아니었다.
‘대체 누가 감히 내 마법을 막고 있는 거지?’
날카로운 마법사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흑마법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 두죠. 빌어먹을.”
그는 거칠게 대꾸했다.
“공작이 함께 있으니 괜찮을 겁니다.”
인정하긴 싫지만 사실이었다.
그 남자라면, 제가 열 번 죽는 한이 있더라도 에슬린을 지킬 테니까.
“리페리우스 공작 각하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디에리안은 퉁명스레 대꾸했다.
“젝스 경?”
문득 옆자리의 인기척이 사라졌다.
뒤를 돌아보자, 동상처럼 가만히 서 있는 젝스가 눈에 들어왔다.
“디에리안 님.”
드물게 그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 있었다.
“왜 제게 사실을 말씀해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리페리우스 각하와 그런 일을 꾸미셨다는 걸.”
“젝스 경.”
“적어도 전하께서 살아 계셨다는 사실이라도 알려 주셨다면…….”
“…….”
“저는 전하의 호위 기사였습니다. 그건 알고 계십니까?”
휘이잉. 어디선가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디에리안은 입술을 일자로 다물었다. 날카로운 턱이 비스듬히 기울었다.
“알다마다요. 우리가 모두 그분께 충성을 맹세했는데, 제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젝스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침묵이 두 사람 사이를 무겁게 메웠다.
아악, 비명 같은 소리를 터뜨린 디에리안이 거칠게 제 머리를 헝클어뜨렸다.
“젠장, 방금 건 비아냥거린 거 아닙니다.”
마법사가 재빨리 덧붙였다.
“그게 최선이었습니다, 젝스 경.”
“최선이라고요?”
“전하께서 기억을 잃으실 줄은…… 그 작자도 저도, 몰랐던 일이니까 말입니다.”
적갈색 눈동자가 어둡게 침잠했다.
‘전하께서 기억을 잃으셨다고요?’
넋 나간 제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대체 왜……? 아니, 그보다. 그럼 빨리 사실을 밝혀서 안심시켜 드리는 게……’
‘안 돼.’
남자는 싸늘하게 일축했다.
‘아무것도 밝히지 말라는 게, 에슬린의 마지막 당부였으니까.’
‘그게 무슨 개 같은!’
‘에슬린이 기억을 잃은 건 너나 나나 예측하지 못한 일이었어.’
테베트 리페리우스는 피곤한 낯으로 중얼거렸다. 며칠째 제대로 자지도, 먹지도 못해 쑥 꺼진 눈빛이 깊고 어두웠다.
‘그런데 죽기 직전, 그녀는 자신이 기억을 잃을 걸 알고 있었지.’
‘그건…….’
‘에슬린은 뭔갈 깨달은 거야. 그 독배를 마신 순간. 무언가를 만났거나…….’
테베트의 눈이 순간 날카롭게 빛났다.
‘……그렇다면 전하의 기억 속에 답이 있겠군요.’
굳어 있던 마법사의 머리가 끽끽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저흰 그저 입 다물고 전하의 기억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려야 하고요.’
‘그래. 에슬린이 무슨 기억을 얼마만큼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지금 상황에선, 그게 최선일 거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모른 척……’
‘주인을 거스를 셈인가, 마법사?’
‘당연히 아닙니다! 그저 전하께서 겪으실 혼란을 생각하면…….’
‘내가 지킬 거다. 이 제국에서 가장 안전한 곳에서.’
‘그게 북부 공작저라는 말씀입니까?’
‘적어도 프레이 백작저는 아니지.’
‘…….’
디에리안은 입을 다물었다. 맞는 말이었다.
‘켈라 로네인이라고 했던가? 그 하녀장을 움직여. 그 누구도 의심하지 않을 수 있도록 에슬린의 신분을 만들도록 해.’
‘하! 백작저 하녀장이 제 말을 들을 것 같습니까?’
‘그 여자가 마법사라는 걸, 내가 모를 줄 알았나?’
메마른 어깨가 움찔 튀었다.
테베트는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러나 오랫동안 웃지 않은 얼굴은 비웃음조차 제대로 만들어 내지 못하고 그저 굳어 있을 뿐이었다.
결국 그는 표정을 짓는 걸 포기했다.
‘그 영혼 약. 정말 너 혼자만의 작품이 맞긴 해?’
‘…….’
‘에슬린이 북부에 도착하면, 넌 얌전히 틀어박혀서 기억 마법이나 연구하는 게 좋을 거다.’
침묵을 지키던 디에리안이 테베트를 잠시 노려보았다. 대답 대신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 어떤 고통도, 부작용도 없는 방법이어야 할 거야.’
사나움을 감춘 목소리가 마지막이었다.
“빌어먹을 공작.”
뜬금없는 혼잣말에 젝스가 흘긋 그를 보았다.
“하아. 디에리안 님, 그래서 제게 하실 말씀은 무엇입니까?”
한숨 섞인 목소리에 디에리안의 정신이 퍼뜩 돌아왔다.
“아, 맞다. 음…… 그러니까.”
디에리안이 볼을 긁었다.
“전하께서 기억을 잃으시는 바람에 말할 수 없었다는 게 결론입니다. 기억을 찾으시면 당연히, 당연히 말하러 갔을 겁니다. 그러니까 절 그렇게…… 죽일 듯이…… 노려보는 건 좀 그만두는 게 어떠냐고 말하고 싶군요.”
젝스는 긴 침묵을 지켰다. 디에리안이 흘끔흘끔 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정말 부득이하고, 불가피하고, 어쩔 수 없는 상황들이 여기저기 산재해 있었다는 걸 당신이 얼마나 이해할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
“……미안했습니다, 젝스 경. 미리 말 못 한 거요.”
디에리안이 감정 없는 어투로 중얼거렸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건 젝스였다.
“하아…….”
재차 터진 긴 한숨과 함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디에리안을 더 추궁해서 뭐가 나아지나 싶었다.
에슬린 없이 버티던 시간은 가히 지옥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디에리안 덕분에 에슬린이 살아 있게 되었으니까.
“……됐습니다, 디에리안 님. 어쨌든 목숨 걸고 전하를 구해 주신 것에 대해선 감사드리니까요.”
“젝스 겨엉…….”
디에리안이 조금 감격한 얼굴을 했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젝스의 말처럼, 숲길은 곧 끝이 났다.
깔끔하게 정비된 길이 나타났다. 길의 끝에는 롭시온 입구가 웅장하게 버티고 서 있었다.
“저는 이렇게 넘어가지만, 앞으로는 각오하셔야 할 겁니다.”
묵묵히 걷던 젝스가 덧붙였다.
“무슨?”
“로하르트 님께서는 아직 모르고 계신 거 아닙니까? 로사나 님도 그렇고.”
“혹시 여기가 지옥의 입구인가요?”
디에리안의 얼굴이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젝스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눈썹이 슬쩍 치켜 올라갔다.
“일단 오늘은 저기 계신.”
그가 앞을 가리켰다.
“무시무시한 표정을 한 에르단 전하부터 상대하셔야겠습니다.”
엑, 뒤돌아 도망치려는 뒷덜미를 젝스가 가볍게 잡아챘다.
* * *
“불가능해.”
테베트가 말했다.
자박자박 길을 걷던 에슬린이 걸음을 딱 멈추었다.
“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알아요?”
“이 비에 말 장수들이 있을 리 없잖아.”
그는 엉망으로 길을 막고 있는 바위나 돌들을 밀어내며 말했다.
두 사람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아닐 거 같은데.”
에슬린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가장 가까운 산 중턱에 있는 마을에 들르자고 주장하고 있었다.
테베트는 당연히 반대했다.
“괜한 시간 낭비야. 이 비에 말을 끌고 여기까지 올라오는 얼간이가 어디에 있지? 있던 장사꾼들도 내려갔을 판에. 일단 좀 더 걸어서 내려가는 게 나아.”
“하지만 한번 들러 볼 순 있잖아요.”
“들러 보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니까. 혹시 시간 낭비가 취민가?”
에슬린은 물러서지 않았다.
“여기서부터 말을 탈 수 있으면 시간 낭비가 아니죠.”
“그러니까 불가능한 일을 왜 자꾸 말하냐는 거야.”
“그러니까 가 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냐는 말이에요.”
에슬린이 재차 걸음을 멈추었다.
시선이 얽히고 정적이 흘렀다.
먼저 고개를 돌린 건 테베트였다. 그는 에슬린 앞에 늘어져 있던 덤불을 거둬 내며 앞서 나갔다.
“말이 안 통하는군.”
멀어지는 등을 보며 에슬린이 턱을 기울였다.
“뭘 새삼스럽게.”
둘은 대체로 의견이 맞지 않았다. 그래서 자주 부딪쳤고 만날 때마다 입씨름했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네.’
에슬린은 피식 웃었다.
앞서가던 커다란 등이 멈추었다.
“빨리 안 오고 뭐 해?”
비스듬히 저를 바라보는 시선.
모양 좋은 입술이 한쪽으로 치켜 올라갔다.
“시간 낭비하려면 서둘러야 하지 않겠어?”
에슬린의 한쪽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빈정거리는 재주는 여전하다니까.
에슬린은 그 말을 삼켰다.
모처럼 맑게 갠 하늘에 새 한 마리가 빙빙 돌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강렬한 햇살이 눈을 찔렀다. 손차양을 만들어 잠시 그 하늘을 응시했다.
‘이젠 나도 모르겠다.’
이 관계가 어디로 흘러가게 될지.
‘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겠어.’
그게 당신을 위한 일임을 안다.
그간 내린 비로 인해 길은 거칠었다. 깊은 숲은 무엇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이었다.
하지만 두렵지 않았다.
막막하지도 않았다.
그건 아마 비 온 뒤 하늘이 깨끗해서일 것이고, 내리쬐는 햇살이 포근해서일 것이다. 그도 아니라면.
“도대체 왜 이렇게 꾸물거려? 아직 열이 남은 건가?”
이마에 닿은 당신의 체온이 변함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서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