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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66화 (66/147)

66화

“말 장수들? 당연히 안 왔지!”

“…….”

단호한 목소리에 테베트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며칠은 안 올 것 같은데…… 레비브 쪽에서 온 거요?”

“그렇다만.”

“비가 많이 왔다는 걸 알았을 텐데, 뭐 하러 이 마을에 들른 거요? 차라리 쩌어기 아랫마을에 가 보지!”

마시장 근처 상인이 혀를 끌끌 찼다.

그는 짧게 인사를 하고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렸다.

에슬린이 눈을 깜빡이며 텅 빈 마시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직접 확인했으니 이제 마음이 풀렸나? 알았으면 빨리 움직이도록 하지.”

“어딜 가시는 거예요?”

“당연히 마을을 나가야지.”

“왜요?”

테베트가 헛웃음을 내뱉었다. 지금껏 상인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던 건가?

“방금 들었잖아. 말 장수들이 없다고.”

그 말에 피식 웃은 건 에슬린이었다.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푸른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제가 언제 말 장수에게 말을 빌린다고 했어요?”

“……뭐?”

테베트가 한발 늦게 대꾸했다.

에슬린이 주변을 이리저리 돌아보았다. 아마 아까부터 저랬던 것 같기도 했다.

“아마 이 근방일 텐데…….”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음. 저기에 있네요.”

에슬린이 웃으며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 손끝으로 시선을 옮기자 작은 우편국이 눈에 들어왔다.

“사실 긴가민가하긴 했는데…… 일단 따라와 봐요.”

그녀가 테베트의 옷자락을 잡았다. 약한 힘이었는데도 뿌리칠 수 없어 그는 잠자코 따라갔다.

“어서 오쇼.”

우편국 안으로 들어서니, 더벅머리를 한 남자가 건성으로 인사했다.

에슬린은 그의 차림새를 눈으로 훑었다. 곧 매끄러운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정답이군.

“마법사를 만나고 싶어요.”

“음? 마법사?”

“네. 푸른 말을 만들 줄 아는 마법사였으면 좋겠어요.”

“…….”

스윽 테베트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과연.

뚫을 듯한 시선이 에슬린의 옆얼굴에 닿았다.

“어, 일단 내가 마법사이기는 한데…….”

남자가 더벅머리를 긁으며 몸을 일으켰다.

에슬린은 레비브 우편국에서 들었던 접수원의 말을 떠올렸다. 디에리안에게 소식을 보낼 때.

‘동쪽 산 너머 중턱 마을까지 인편으로 보내고, 거기서부턴 마법 전서구를 날리도록 하죠. 그 마을엔 마법사가 있으니까요.’

마법사가 있다면. 그가 마법 전서구를 띄울 줄 아는 마법사라면…….

그다음부터는 협상의 영역이었다.

“근데 난 전서구나 날리는 마법사라 말이지.”

“그게 가능하다면, 이동 마법도 가능한 거 아닌가요?”

“음, 뭐어…….”

남자가 말꼬리를 늘렸다. 입고 있는 마법사용 로브를 괜스레 툭툭 털었다.

“어디까지 갈 건데?”

“롭시온 입구요.”

“흐음…… 롭시온은 나도 들락거리는 곳이니까 어렵진 않지만…… 대가는?”

에슬린은 기다렸다는 듯 웃었다.

듣고 있던 테베트가 품을 더듬었다. 하지만 에슬린이 한 발짝 나서며 그의 행동을 막았다.

그녀는 청록색 주머니를 꺼내 안을 뒤졌다.

“자요.”

그녀가 꺼내 든 건 보라색 마법석이었다.

“레비브산 마법석이에요. 필요하다면 돈으로 드릴 수도 있지만, 이게 당신에겐 더 가치 있는 물건이지 않나요?”

마법사의 눈에 순간 이채가 스쳤다.

레비브산 마법석? 그가 턱을 쓰다듬었다.

“당신…… 마법사를 한두 번 움직여 본 솜씨가 아니군? 뭐, 좋아. 나쁘지 않네. 하지만 이 마법석 한 개로는 말 한 필 정도밖에 안 돼.”

“여기요.”

에슬린은 잽싸게 마법석 하나를 더 꺼내 들었다.

어디 필요한 만큼 말만 해 보라지.

맑은 얼굴에 방긋 웃음이 떠올랐다.

‘디에리안이 준 마법석을 이런 식으로 써먹게 될 줄은 몰랐네.’

에슬린은 생각했다.

레비브 마을 가판에서 디에리안을 다시 만났을 때, 얼떨결에 건네받은 것이었다.

디에리안이 고른 것이니 당연히 쓸모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만나면 더 귀한 마법석 많이 사 줄게, 디엘.’

에슬린은 굳게 다짐했다.

“잠깐만.”

그때 귀 옆에서 단단한 손이 뻗어 나왔다. 그러곤 테이블에 놓인 마법석 하나를 슥 가져간다.

“말은 한 필이면 돼. 두 사람이 탈 수 있는 것으로.”

“갑자기 무슨?”

에슬린은 옆을 돌아보았다. 테베트가 그녀의 반쯤 열린 주머니에 마법석을 쏙 넣어 주었다.

“설마 그 손목으로 말을 타겠다고?”

에슬린은 제 손목을 내려다보았다. 꼼꼼하게 감싼 손목은 계속 다치는 바람에 회복이 더뎠다.

“그리고.”

테베트가 한쪽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말을 탈 줄 안다고 아직 대답 안 한 것 같은데.”

아, 맞다. 에슬린은 입을 다물었다. 너무 당연한 일이라 잊고 있었다.

잠시 지켜보던 마법사가 끼어들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한 마리? 두 마리?”

마법사는 어깨를 으쓱이더니 빠르게 말했다.

“그냥 사이좋게 한 필로 타고 가는 건 어때? 어차피 내 마력에 두 필은 조금 버겁고, 보아하니 연인인 것 같은데 말이야.”

에슬린이 화들짝 놀라 입을 열었다.

“우린 그런 게 아니……”

“그러지.”

나직한 목소리가 말을 잘랐다.

“한 필이면 된다는 거지? 그럼 준비해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마법사가 안쪽으로 사라졌다.

에슬린은 몸을 돌렸다. 태연한 표정을 한 테베트가 보였다. 잠시 시선이 부딪쳤다.

“뭘 그렇게 봐?”

그는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오해하잖아요.”

“무슨 상관이지? 당신에겐 오히려 좋은 일 아닌가?”

“무슨 말이에요?”

“날 좋아한다고 했잖아.”

에슬린은 보기 좋게 말문이 막혀 버렸다. 가볍기 그지없는 말투에 하얀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표정 변화를 본 테베트가 싸늘하게 웃었다.

“역시 거짓말이었군. 그것도 이 우스운 역할 놀이에 필요한 대사였어?”

“그렇게…….”

에슬린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마음이 농락당한 기분이었다.

그것도 좋아한다고 말한 상대에게.

그녀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테베트가 에슬린을 의심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이 마음을 함부로 여겨도 되는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또다시 그런 식으로 절 모욕한다면 용서하지 않겠어요.”

“아무렴.”

테베트가 비웃듯 대꾸했다.

연기라면 수준급이군. 그는 생각했다.

“…….”

에슬린이 무언가를 참아 내듯 고개를 돌렸다. 동시에 마법사가 등장했다.

“자, 준비가 다 됐으니 밖으로 나가지. ……뭐야, 그새 싸운 건가?”

“아니에요. 가죠.”

에슬린은 덤덤하게 말하며 테베트를 스쳐 지나갔다.

‘뭐지?’

테베트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떠오르는 말을 떠오르는 대로 지껄였을 뿐인데.

고개를 돌리던 찰나의 에슬린이 뇌리에 박혔다.

입술을 깨문 채 눈을 내리까는 모습. 상처받은 게 명백한 그 얼굴.

그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왠지 모르게 손이 저렸다. 뽑지도 않은 검을, 제멋대로 휘둘러 버린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자, 그럼 편안한 여행 되라고.”

마법사가 설렁설렁 손을 흔들었다.

푸른 말은 디에리안이 만든 것보다 조금 엉성했지만, 적당히 훌륭했다.

에슬린은 구불구불 이어지는 길을 바라보았다.

이 길을 따라 달리면, 롭시온에 도착할 것이다.

“길이 생각만큼 나쁘지는 않네요.”

에슬린이 중얼거렸다. 아까의 일은 잊었다는 듯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테베트는 에슬린을 먼저 말에 올렸다.

‘사과를…….’

해야 하지 않을까?

그는 불현듯 생각했다. 상처 입은 옆얼굴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그때 말 위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흘렀다.

“거봐요. 내 말이 맞았잖아요.”

그는 한 손에 고삐를 쥔 채 홀린 듯 고개를 들었다. 높은 곳에 앉은 여자가 부드럽게 웃음 지었다.

“포기하지 않고 와 보기를 잘했죠?”

그렇게 말하는 얼굴 뒤로 청량한 푸른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

테베트는 그 얼굴을 조금 더 응시했다. 그러곤 훌쩍 몸을 움직여 말에 올라탔다.

단단한 손으로 고삐를 말아 쥐었다. 제 품에 들어온 에슬린의 온기가 따스했다.

푸르릉, 말이 고개를 털었다. 그는 천천히 말을 몰아 길을 달렸다.

“바람 기분 좋아…….”

동그랗게 올라간 광대뼈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제 가슴팍에서 통통 움직이는 동그란 정수리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롭시온까지 가면 끝인 건가?’

그는 생각했다.

롭시온에 도착하면 어떻게 할 생각이었지?

제롬을 부르고, 기사단을 불러 모아 제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샅샅이 들을 것이다. 그리고 이 하녀의 정체를 파헤쳐야지.

정체를 알게 되면 판단이 설 것이고, 그러면…… 그러고 나면…….

‘모든 건 그 이후야.’

그는 고삐를 꽉 쥐었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땅 위에 새겨지듯 길게 늘어졌다.

* * *

‘테베트 경, 이거 봐요. 이번에 연구한 새로운 이론인데.’

‘뭐죠? ……겨울 포도?’

테베트는 코웃음 쳤다.

‘이젠 하다 하다 농부 자리까지 넘보는 겁니까?’

‘교역품으로 삼으면 어떨까 싶어서.’

‘교역품?’

‘남부 바다 너머 대륙과 교역할 때 말이에요. 젝스 경에게 듣자 하니 그곳은 언제나 날씨가 춥다더군요.’

테베트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왜 그런 표정이에요?’

‘전하께서는 이곳을 떠날 생각이십니까?’

‘아하하. 제가 베르타니아를 왜 떠나요? 뭐, 나중에 교역이 활발해지면 한번 찾아가 볼 수는 있겠지만.’

‘안 됩니다.’

‘네?’

‘……그러다 그곳이 당신 마음에 들면 어떡하죠?’

이번에 코웃음 친 건 에슬린이었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신이 여길 떠나면…….’

‘테베트 경?’

‘난 어떡하고요?’

말 위에서 잠이 들다니.

에슬린은 스스로에게 조금 어이가 없었다.

마차도 아니고 흔들리는 말 위에서 잠들어 보기는 난생처음이었다. 심지어 꿈까지 꾸면서 말이다.

“일어났군.”

머리 위에서 나직한 음성이 들려왔다.

“어……. 네.”

에슬린은 민망함에 허리를 조금 일으켰다. 하지만 단단한 팔이 다시금 몸을 기대게 만들었다.

“잠들 줄은 몰랐는데. ……민망하네요.”

솔직한 말투에 등에서 짧은 진동이 느껴졌다. 웃은 건지 뒤돌아 확인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더 자도 상관은 없지만.”

테베트가 손가락으로 앞을 가리켰기 때문이었다.

“저걸 보면 잠이 깨겠지.”

롭시온 입구였다.

‘드디어…….’

잠기운을 몰아낸 눈이 또렷해졌다.

‘드디어 도착했어.’

기나긴 여정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목적지를 보자 반갑다 못해 감격스러울 지경이었다.

동시에 푸른 말의 기운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정말 롭시온까지였군요.”

“그렇군.”

칼 같네, 진짜. 에슬린이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푸른 말의 마력과는 다른, 이질적인 마력이 느껴졌다.

‘이건…… 디에리안?’

에슬린은 제 곁을 맴도는 익숙한 마력을 읽었다. 동시에 테베트가 말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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