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화
‘디에리안이 날 찾고 있는 거구나. 산에서 그런 폭발이 있었으니, 걱정했겠어.’
푸른 말은 서서히 사라졌다.
둘은 얼마 남지 않은 길을 걸어 롭시온으로 들어섰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오고 있었다.
“분위기가 어수선하군.”
거리를 살피던 테베트가 중얼거렸다. 에슬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요.”
롭시온은 이 근방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곳이었다.
그러니 어느 정도 활기찬 분위기인 건 이해하지만.
‘활기차다기엔 뭔가 이상한데?’
들뜬 것 같기도 하고,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것 같기도 한 애매한 분위기.
“일단 식사를 좀 하지.”
테베트가 걸음을 멈추었다. 음식을 파는 식당 앞에서였다.
자극적인 음식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지금 이 상황에서요?”
에슬린이 짧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식사도 못 할 상황은 아니지 않나?”
테베트는 그렇게 받아치며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지금까지 제대로 된 걸 못 먹었잖아.”
“그야 그렇지만.”
여정은 짧지만 험난했다. 중간중간 산지기들의 쉼터나 작은 촌락에서 휴식을 취하긴 했지만, 식사보다 길을 재촉하는 게 더 중요했다.
“기운이 없으니 아무 데서나 잠드는 거 아니겠어?”
테베트가 건조하게 말했다. 에슬린은 다시 민망해졌다.
“그러죠, 뭐…….”
식당 안으로 들어선 에슬린은 깜짝 놀랐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 식당은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눈만 깜빡거리고 서 있자, 테베트가 그녀를 빈 테이블로 이끌었다.
“적당히 주문하고 오지.”
그는 에슬린을 두고 주문대로 향했다. 전에 와 본 적이 있는 듯, 익숙한 동작이었다.
‘이런 곳은 처음이야.’
생각해 보니 평민 식당을 와 본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점원이 주문을 받으러 오지 않는다니.
그런 사소한 것조차 그녀에겐 생소했다.
‘여기까지 오게 될 줄이야…….’
새삼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말 그대로 산을 넘고, 강을 건넜다.
이런 식으로 베르타니아를 누비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것도 저 남자와 함께.
그녀는 주변을 둘러보며 피식 웃었다. 왁자지껄 떠드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여러 가지 걱정거리들은 여전히 산재해 있었지만.
‘일단 기특하네.’
여기까지 무사히 온 자신이.
고소한 기름 냄새와 매운 향신료 냄새, 싸한 술 냄새가 뒤섞여 주변을 메웠다. 늘 정갈했던 황궁 식사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과 신나게 식기를 부딪쳐 가며 뭔갈 먹는다는 건, 공작저에서 처음 해 본 일이었다.
‘다들 잘 있으려나?’
세피아와 앤, 레나가 문득 떠올랐다.
‘휴고와 헤즐턴도 지금쯤은 바쁘겠어.’
한번 떠오른 상념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생각이 멈춘 건, 술에 취한 어떤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을 때였다.
“에르단 황자님께서 대체 롭시온까진 무슨 일이시람!”
뭐? 누구?
에슬린이 발작처럼 홱 몸을 돌렸다.
“조용히 좀 해라! 아유, 죄송합니다. 이놈이 좀 취해서.”
일행인 듯한 남자가 머쓱하게 사과했다.
“아뇨…….”
에슬린은 다시 앞을 응시했다. 그러나 온 신경은 이미 제 뒤 테이블에 가 있는 상태였다.
남자가 목소리를 낮춰 대꾸했다.
“롭시온에 있는 세비스 자작가를 방문하신 거라잖아. 그쪽 영식과 꽤 친하시다지, 아마?”
“그 심약하신 분께서 황궁을 나서신 게 이상하잖아! 만나고 싶으면 황궁으로 부르면 되는 건데.”
“기분 전환이 필요하셨던 거겠지. 쌍둥이 황녀님께서 그렇게…… 되어 버리고 난 다음엔, 거의 두문불출하셨으니까.”
“그런가? 하여튼 요즘 이상하다니까.”
남자가 맥주를 벌컥이는 듯 잠시 말이 끊겼다.
“끄윽, 실종됐던 리페리우스 공작께서도 왜 갑자기 롭시온에 모습을 드러내신 거야?”
“그러게. 근데 또 사라지셨다는 소문도 있더라고?”
에슬린은 가만히 주문을 기다리는 남자의 등을 응시했다.
“그래? 아! 혹시 2황자 전하께선 리페리우스 공작님을 찾으러 오신 건가?”
“엥? 왜?”
“엄……. 무사한 걸 확인하고, 자기편으로 회유한다든가?”
푸하하! 커다란 웃음이 터졌다.
“후계자 싸움은 진작 접은 2황자께서 갑자기 리페리우스를? 굳이? 에라이, 이 새끼 이거 제대로 취했네!”
“그런가? 흐흐.”
남자들이 건배를 하며 화제를 돌렸다.
에슬린은 가만히 테이블을 노려보며 생각에 잠겼다.
그때 커다란 손이 불쑥 눈앞에 나타났다.
“정말 어디가 아픈 건가?”
고개를 드니 테베트가 눈썹을 살짝 구긴 채 에슬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음식이 든 트레이를 내려놓았다.
“아뇨, 괜찮아요.”
에슬린은 작게 대답한 뒤 입을 다물었다.
식사는 조용하게 이어졌다. 간단한 생선 요리와 야채 구이, 깨를 뿌린 빵 같은 것들을 에슬린은 천천히 먹었다.
탁. 포도주잔을 내려놓은 테베트가 입을 열었다.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 다시 떠나도록 하지. 이번엔 마차를 타도록 해.”
그 말에 에슬린이 포크를 내려놓았다.
“떠나다니, 어디로요?”
“당연히 공작저로 돌아가야지.”
그가 날카로운 눈빛으로 말했다.
“공작저 하녀라고 하지 않았나?”
“…….”
짧은 침묵이 머물렀다. 에슬린이 입을 여는 순간, 테베트가 차갑게 일갈했다.
“당연히 황궁으로 돌아가는 건 안 돼.”
‘에르단 황자님께서 대체 롭시온까진 무슨 일이시람!’
술 취한 남자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에슬린은 마른침을 삼켰다.
에르단이 여기에 있다.
그가 움직인 이유는 굳이 생각하지 않아도 명확했다.
거기다 아까부터 제 주변을 맴도는 디에리안의 마력…….
‘모두가 날 찾고 있어.’
에슬린은 복잡한 얼굴로 다시 식기를 움직였다. 생각에 잠긴 탓에 자극적인 음식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테베트가 놓치지 않고 모두 지켜보았다.
식당에서 나와 잠시 길을 걸었다.
저 멀리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장이 보였다.
‘어쩌지?’
여기서 일단 헤어지는 게 나은 걸까? 아니면 일행을 만나고 오겠다고 말해 볼까?
‘뭐든 호락호락할 것 같진 않네.’
어쩐담. 에슬린은 한숨을 삼키며 테베트를 흘깃거렸다.
노을이 그림 같은 얼굴에 주홍빛 윤곽을 그렸다. 깎아지른 듯한 콧날과 섬세하고도 단단한 턱선. 서늘한 눈매는 도저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기 어려웠다.
“앗.”
그때 에슬린의 다리를 뭔가가 툭 건드렸다. 비틀거리는 그녀를 테베트가 잡았다.
“엇, 죄송합니다아.”
아이가 꾸벅 사과했다. 친구와 뛰어가다 부딪친 모양이었다.
“다치지 않게 조심하렴.”
에슬린은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혼날까 봐 주춤거리던 아이가 다시 까르르 웃으며 달려 나갔다.
“당신 물건인 것 같은데.”
테베트가 턱짓했다. 아래로 시선을 옮기니 익숙한 물건이 떨어져 있었다.
“마법석 주머니군.”
“아, 떨어졌나 보네요.”
에슬린이 허리를 숙여 물건을 주워 들었다. 그때 반쯤 벌어져 있던 주머니 밖으로 붉은 조각 하나가 데구르르 굴러 나왔다.
“이런.”
에슬린이 그 조각을 주우려 했다.
하지만 테베트가 더 빨랐다.
“전부터 묻고 싶었는데. 이건 누구 것이지?”
그는 손안에 든 물건을 보며 물었다.
붉게 빛나는 조각난 펠리서스 마법석을.
“그건…….”
에슬린이 잠시 말을 골랐다. 테베트는 얌전히 그녀의 대답을 기다렸다.
“제 거예요.”
기다렸다는 듯 냉소가 터져 나왔다.
“또 거짓말.”
“네?”
“내 걸 훔친 건 아니고?”
“이게, 기억나시나요?”
에슬린이 살짝 입을 벌렸다. 긍정하는 듯한 그 말에 테베트는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어처구니가 없군.”
그가 조각을 꽉 말아 쥐었다.
“말이 나온 김에 나머지 조각도 돌려받아야겠어.”
“안 돼요! 이건 쓸데가!”
“쓸데?”
에슬린이 입을 합 다물었다.
영험한 마법사에게 재생시켜 당신의 기억을 되찾게 할 예정이라고, 대체 어떻게 말한단 말인가?
침묵이 길어지자 불쑥 몸이 가까워졌다. 노을빛을 받은 눈동자가 거칠게 일렁였다.
“쓸데?”
그가 한 번 더 속삭였다.
에슬린이 입을 떼려던 순간이었다.
“공작 각하?”
어디선가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슥, 테베트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 틈을 타 에슬린은 청록색 주머니를 잽싸게 품에 넣었다.
“각하!”
“제롬?”
테베트가 미간을 구겼다.
멀리서 이쪽을 발견한 남자가 한달음에 달려왔다. 젊은 기사의 얼굴에 놀라움인지 기쁨인지 모를 감정들이 뒤범벅되어 있었다.
“각하! 이런 곳에서 대체 뭐 하고 계신 겁니까? 제가 얼마나 찾았는지 아십니까?”
제롬이 숨도 쉬지 않고 물었다. 테베트는 슬쩍 눈썹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롭시온에서 제롬을 만났던 것 같기도 하고.
그의 눈동자에 순간 이채가 스쳤다.
“때마침 잘 만났군.”
“예?”
제롬이 얼빠진 소리를 냈다.
테베트는 옆으로 몸을 옮겼다. 그러자 어느샌가 제 등 뒤에 몸을 숨기고 있던 여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테베트는 에슬린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하녀를 아나?”
“예에? 갑자기 무슨…….”
기사가 인상을 와작 구겼다.
정말 각하께서 왜 이러시는 걸까? 그러나 눈동자는 착실하게 에슬린의 모습을 훑고 있었다.
“제가 하녀 따위를 어떻게 알겠…… 알겠잖아?”
“뭐?”
“황궁의 죄인입니다!”
제롬이 소리쳤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 몇몇이 이쪽을 흘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제롬은 에슬린을 삿대질하며 크게 지껄일 뿐이었다.
“화화화황궁에서 연보랏빛 머리카락에 짙푸른 눈동자를 가진 하녀를 쫓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발견하면 즉시!”
“즉시?”
“잡아다가 1황자에게 대령하라고…….”
“그렇군. 1황자에게.”
“예. 그…… 1황자께서 엄청나게 찾으셨다고 합니다. 반드시 살려서 데려오라고요.”
어깨에서 테베트의 손이 미련 없이 떨어져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