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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68화 (68/147)

68화

에슬린은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옆에 선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왠지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역시 그런 거였어.”

소름 끼칠 만큼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주변을 얼릴 것 같은 냉랭한 기운. 제롬이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목을 움츠렸다.

“재미있군.”

그가 다시 에슬린의 어깨를 잡아 저를 향하게 했다.

“평범한 공작저 하녀가 황자에게 쫓기기도 하나?”

일렁이는 검붉은 눈동자가 눈앞을 메웠다. 흔들리는 눈동자에 지저분하게 얽힌 감정을 모두 읽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분노.

그는 그녀를 1황자의 사람이라고, 혹은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사실 날 그렇게까지 찾은 건 타툴란이었겠지만.’

카르단은 에슬린보다 디에리안을 잡고 싶어 했다.

하지만 타툴란의 목적은 처음부터 에슬린이었다. 정확히는, 그녀의 정체를 제 눈으로 확인하는 것.

‘그러니 굳이 살려서 데려오라고 한 거겠지.’

진짜 죄인이라면 그런 사족은 붙이지 않았을 터다.

어찌 됐든.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인 건 변함없네.’

“휴…….”

에슬린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비틀어 테베트의 손을 털어 냈다.

푸른 눈동자는 꽉 쥔 그의 주먹을 향해 있었다.

“일단 그 마법석을 돌려주세요.”

“이 상황에서까지 대단하군.”

테베트가 서늘하게 뇌까렸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었다. 반듯하고도 올곧은 시선이 테베트를 향했다.

올무에 걸린 듯, 테베트는 어쩐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투명하고 맑은 눈동자가 안타까운 빛으로 조금 일렁였다.

“당신을 위한 일이에요, 테베트 경.”

에슬린이 간절히 말했다. 제 진심이 조금이라도 닿기를 바라며.

그때 제롬이 검을 뽑아 들었다.

“감히 죄인 주제에 각하의 존함을 입에 담다니!”

그 칼끝이 에슬린을 향하는 순간.

“악! 각하!”

챙그르르. 젊은 기사의 검이 사정없이 바닥을 굴렀다.

“미친 건가?”

테베트가 검을 쥔 채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제롬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왜, 왜 이러시는 겁니까!”

“감히 누구에게 검을…….”

‘감히 누구에게 활을 겨누는 거지?’

테베트의 몸이 경직했다.

분명 이와 비슷한 말을, 어디선가 한 적이 있던 것 같았다.

“가주님?”

그때도 이렇게 검을 들었던 것 같은데…….

그래, 세하즈강 절벽에서. 전쟁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괜찮아요?”

이 여자를 지키기 위해서.

찢어질 듯한 두통이 찾아들었다. 테베트는 무심코 머리를 짚으려다 손안에 쥔 붉은 조각을 발견했다.

‘당신에게 받는 첫 선물이군요.’

감격에 젖은 목소리는 분명 제 것이었다. 그 말을 들은 상대방이 짧게 웃은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 상대는.

“어디 아파요? 왜 그러죠?”

“……내가.”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당신에게 존댓말을 했었나?”

다급한 손길이 그녀의 옷자락을 쥐었다.

“왜?”

그는 마치 망망대해에 빠진 사람 같았다. 구해 주지 않으면 곧 죽을 것처럼. 몹시도 절박한 몸짓이었다.

“왜?”

‘난 두 번 다시, 리페리우스의 이름 뒤에 비겁하게 숨지 않을 겁니다.’

“윽.”

테베트가 머리를 감싸 쥐며 비틀거렸다. 펠리서스 조각이 데굴데굴 바닥을 굴렀다.

“각하! 왜 그러십니까?”

제롬이 달려들었다. 에슬린은 입술을 깨물며 뒷걸음질 쳤다.

안 된다. 지금 기억이 돌아오면 안 된다.

‘아직 대가는 유효해.’

그녀는 펠리서스 조각을 집어 들었다.

‘펠리서스 없이 기억을 찾아선 안 돼.’

펠리서스는 변수였다.

대가의 굴레에서 잠시나마 벗어날 수 있는 변수.

하지만 그 변수가 지금은 통하지 않는다.

그러니 지금 테베트가 기억을 찾으면, 다시 에슬린이 기억을 잃는 걸 반복할 뿐이었다.

“일단 하녀를 잡겠습니다.”

제롬이 말했다. 테베트가 고통에 찬 신음을 흘리며 그를 붙들었다.

“그건…… 안 돼.”

“네?”

“안 돼.”

“설마 황궁의 명을 거역하실 생각이십니까?”

뒷걸음질하는 하녀와 테베트를 번갈아 가며 보던 제롬이 단호히 덧붙였다.

“각하께선 리페리우스십니다!”

그건 주박과도 같은 말이었다. 쇠꼬챙이에 몸이 꿰뚫린 듯 테베트의 동작이 멈추었다.

‘네가 진정 리페리우스를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으냐?’

울부짖던 모친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건 그가 잊은 기억이 아니었다.

영원히 뇌리에 박혀 있을, 잊으려야 절대 잊을 수 없는. 피를 타고 흐르는 저주와도 같은 기억.

‘너 때문이다. 너만 포기했다면. 너만 욕심부리지 않았다면. 너만 없었다면!’

테베트의 눈빛이 심연으로 가라앉았다. 문득 제가 쥐고 있는 검의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에도 기울지 않은 천칭.

그 완벽한 균형을 위해, 그 어떤 것도 올려선 안 되는 양 받침대.

“각하, 명령을!”

그래, 명령을. 명령을 내려야지.

테베트는 검은 눈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하지만 쉽사리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뭘 망설이십니까, 각하!”

그때였다.

“제롬 경, 그만해.”

새벽 공기 같은 목소리가 그를 깨웠다.

제 온몸을 뒤흔드는, 도저히 무시할 수 없는 목소리.

테베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조금 피로한 얼굴의 여자가 제롬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은 하얀 얼굴에선 어째서인지 거부할 수 없는 위압감이 느껴졌다.

“무, 뭐? 지금 나한테 뭐라고.”

제롬이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에슬린은 다시 테베트를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테베트의 낯이 창백했다. 그녀는 손을 들어 그 관자놀이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테베트는 그 체온에 저도 모르게 기대고 말았다. 막혔던 숨을 토해 냈다.

“혼란스럽겠지만, 조금만 기다려 줘요. 다 괜찮아질 테니까.”

제가 그렇게 만들게요.

마지막으로 덧붙인 말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테베트는 그 얼굴을 느리게 훑었다. 혼이 나간 듯 그의 눈동자가 탁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당신은…… 리페리우스의 적인가?”

그러자 에슬린이 짧게 웃었다. 매끄러운 입술에 매달린 미소를 그가 본능적으로 눈에 담았다.

“그럴 리가.”

에슬린이 코웃음 쳤다.

“전 가주님의, 테베트 경의 편이라고 말했잖아요.”

“……또 거짓말이겠지.”

테베트가 중얼거렸다.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한 말투였다.

“거짓말이 아니에요.”

에슬린은 명료한 말투로 말했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듯, 그녀의 시선이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그래요…… 진짜 제 속마음을 알려 드리자면.”

에슬린이 몸을 붙여 왔다. 숨통을 트이게 하는 체향이 해일처럼 밀려들었다.

비밀을 공유하듯, 그녀가 얼굴을 치켜들었다.

“사실 전 리페리우스를 아주…….”

짙푸른 눈동자에 스친 건 냉랭한 살기였다.

“아주 증오한답니다.”

쇄액!

무언가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났다.

“리페리우스 각하!”

그와 동시에 주변을 순찰하던 병사들이 주변을 포위했다.

“무슨 일이십니까? 적입니까?”

“그래! 각하께서 지금 포박하실 거다!”

제롬이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테베트는 주변에 시선을 두지 않았다. 모든 소리는 웅웅대는 소음일 뿐이었다. 시야 또한 안개가 낀 듯 온통 흐렸다.

선명한 건 오직 하나.

제가 검을 겨눈 눈앞의 여자뿐.

“벨 건가요?”

여린 목에 날카로운 금속이 닿았다.

“당신이 나를 죽인다고?”

이를 악문 듯한 말투에 번뜩, 정신이 들었다.

뒷걸음질 친 건 테베트였다. 에슬린은 그 자리에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에슬린이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그녀를 감싼 공기가 묘하게 일렁였다.

“이번엔 안 돼요.”

무슨 뜻일까?

그 의미를 헤아리기도 전에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눈매가 둥글게 휘고, 매끈한 광대뼈가 동그랗게 솟아올랐다.

“당신이 또 그런 짐을 지는 건 사양이니까.”

그 미소를 목격한 테베트는 발밑이 무너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리페리우스 각하!”

누군가 소리쳤고, 그 순간 굳어 있던 테베트의 팔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

새하얀 목 위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안 돼. 안 돼!’

누구 것인지 모를 절규가 제 안에서 퍼져 나갔다.

“테베트 경.”

에슬린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테베트를 불렀다.

검을 내려야 한다. 뭔가가 잘못되고 있어.

그러나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았다.

“전 괜찮아요. 그러니…….”

그런 얼굴 하지 말아요.

에슬린은 침울한 표정을 지었다. 목을 베인 건 자신인데, 테베트가 더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마치…… 제게 독배를 건네던 그 날처럼.

“어……? 이 바람은 뭐야?”

공기가 눈에 띄게 거칠어졌다. 에슬린 주변을 어슬렁거리던 마력이 급격히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설마……?’

에슬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목이 화끈거리고 비릿한 냄새가 올라왔다.

제 피 냄새에 길길이 날뛰던 마력이 기어코 강제 발동된 것이었다.

발밑에 푸른 마법진이 떠올랐다.

“잠깐만, 디엘……!”

거친 돌풍이 일었다. 으악! 제롬이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저 멀리 날아갔다.

챙그랑! 이변을 감지한 테베트가 검을 놓쳤다.

“……안 돼.”

이대로 보내선 안 돼.

“기다려!”

그는 두 눈을 부릅떴다. 돌풍 사이로 망설임 없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마법진이 푸른 빛을 발하고.

“에슬린!”

에슬린이 사라지는 게 더 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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