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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69화 (69/147)

69화

바람은 빠르게 잦아들었다.

병사 몇이 주변에 널브러져 있었다. 저 멀리 날아갔던 제롬이 달려왔다.

“세상에! 마법사였던 겁니까?”

그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한참을 난리 치다 문득 주위가 지나치게 고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얼음처럼 굳어 있는 테베트를, 제롬은 그제야 올려보았다.

“……각하?”

그러나 제롬은 그 이상 말을 붙이지 못했다.

그조차도 처음 보는, 몹시 어둡고, 위험한 기운이 제 주군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 같은 무언가를 보는 기분.

지금 함부로 입을 놀리면 죽는다.

제롬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쫓아.”

한참을 침묵하던 테베트가 말했다. 그는 빈주먹을 꽈악 말아 쥐었다.

테베트의 시선이 제롬에게로 향했다.

어둠 속 맹수를 닮은 눈동자. 먹이를 향한 집착인지 살기인지 모를 것이 지저분하게 뒤엉킨 눈빛.

기사의 등골에 다시 소름이 내달렸다.

“롭시온을 샅샅이 뒤져. 당장 찾아서 내 앞에 데려와.”

검은 것이 묻어 나올 것 같은 음성이었다.

“예, 예!”

제롬은 후다닥 움직였다. 엉거주춤 서 있던 병사 몇을 데리고 사라지려는데.

“잠깐.”

테베트가 그의 발길을 붙잡았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 덧붙였다.

“은밀하게 움직여라. 병사들에게 오늘 본 것들에 대해 입단속을 시켜. 목격자가 있다면 마찬가지다.”

“각하, 왜 그런 명령을…….”

1황자에게 빼앗길 순 없지.

하지만 테베트는 아무런 설명도 덧붙이지 않았다. 제롬은 더 묻지 않고 빠르게 사라졌다.

홀로 남은 테베트는 이를 사리물었다.

‘찾아야 해.’

흔들리는 눈동자가 허공 어딘가를 헤매었다.

‘그 하녀의 정체가 무엇이든.’

돌풍 속에서 사라지던 말간 얼굴이 떠올랐다.

‘반드시 찾아야 한다.’

그는 꽉 쥐고 있던 손에 힘을 풀었다.

아무것도 쥐지 못하고 비어 버린 손.

그녀를 상처 입힌 손.

덜덜. 기다렸다는 듯 손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손에서 시작한 경련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숨이 막혔다.

‘그 여자를 찾아 어쩔 셈이지?’

그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하얀 목 위로 흐르던 빨간 핏줄기.

또다시 그렇게 만들 건가?

테베트는 급격히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보내서는 안 돼.’

그건 강렬한 직감이었다.

마지막 빛을 발하던 태양이 완전히 저물었다. 그는 오래도록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침내 어둠이 그의 발치를 물들이고, 머리끝까지 차오를 때까지. 아주 오래도록.

* * *

“에슬린!”

화악, 무언가가 제 몸을 덮쳤다.

에슬린은 갑자기 더해진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크게 휘청였다.

서둘러 중심을 잡았다. 다행히 넘어지지는 않았다.

“……에르단?”

에슬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짧은 연보랏빛 머리카락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녀는 저에게 달라붙은 에르단을 떼어 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네가 왜 여기 있어?”

“내가 왜 여기 있냐고?”

기다렸다는 듯 에르단이 쏘아붙였다.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는 에슬린만큼이나 초췌한 낯이었다.

“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옥에서 사라진 것도 모자라, 너를 쫓던 자들은 그 절벽에서 모두 죽거나 행방불명이 되었다는데!”

“에르단.”

“내가, 왜, 여기 있냐고?”

에르단은 길길이 날뛰었다. 푸른 눈동자에 불꽃이 이글거렸다.

쌍둥이가 저렇게 흥분한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저절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미안.”

에슬린은 빠르게 사과했다.

“너는, 진짜, 그렇게 말을 해도!”

하지만 에르단은 쉽사리 진정하지 못했다. 에슬린의 어깨를 쥐고 짤짤 흔드는 그를 누군가가 저지했다.

“그쯤 하시죠, 에르단 전하.”

까칠하고도 건조한 목소리였다.

“제 주인을 과다 출혈로 잃고 싶지는 않군요.”

에슬린은 아까부터 에르단 옆에 서 있던 두 사람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디엘, 젝스 경.”

긴 로브를 입고 있는 마법사와 허리에 검을 찬 커다란 몸집의 기사가 보였다.

“이 상처는 또 뭐야!”

그제야 에르단은 에슬린의 목에 난 상처를 발견했다. 어두운 색 로브라 눈치채지 못했는데, 목깃 주변이 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는 또다시 길길이 날뛰었다.

“누가 감히 황족의 몸에!”

“약을…… 처치할 것을 가져오겠습니다.”

젝스가 조금 허둥대며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좀 앉아야겠어.”

에슬린이 피곤한 낯으로 말했다.

에르단은 냉큼 크고 푹신한 소파로 그녀를 이끌었다.

“보여 주십시오.”

디에리안은 에슬린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로브를 젖히고 피 흐르는 목을 보는 그의 안색이 몹시 차가웠다. 그는 마력을 이용해 응급 처치하기 시작했다.

“그 남자입니까?”

디에리안이 물었다. 주변을 서성이던 에르단이 고개를 갸웃했다.

“그 남자?”

“리페리우스가 전하를 배신했습니까?”

리페리우스의 이름을 언급하자 에르단은 입을 다물었다.

낮게 가라앉은 마법사의 눈을 바라보며 에슬린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냐.”

“그럼요?”

“많은 일이…… 많은 일이 있었거든.”

지친 목소리가 사그라졌다. 디에리안은 다시 상처에 집중했다.

잠시간의 침묵 후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아뇨.”

디에리안은 목의 상처를 노려보았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든, 그 남자는 이래선 안 됐습니다. 전하를 상처 입히는 일 말입니다.”

“디엘?”

“세상에서 가장 안전? 우습지도 않군.”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털끝 하나 다치지 않게 하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남자가 아닌가? 그런데 제 손으로 에슬린을 다치게 하다니.

디에리안은 그를 믿었던 과거의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사정이 있었어. 다 설명할게. 일단은…… 조금만 쉬고.”

잠이 오는지 에슬린의 눈이 가물가물 흐려졌다.

목에서 올라오던 고통이 멈추고, 따뜻한 기운이 맴돌았다. 등에 닿은 푹신한 소파에 몸이 한없이 늘어졌다.

“약과 붕대를 가져왔습……”

“쉿.”

에르단이 입술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젝스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소파에 파묻히듯 앉아 잠든 에슬린이 보였다.

디에리안이 조심스레 마력을 거두고 몸을 일으켰다.

“응급 처치로 피는 멈추었으니 곧바로 약을 바르는 게 낫겠습니다.”

“내가 할게.”

에르단이 나섰다.

디에리안은 조금 물러서서 기절하듯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쓱해진 얼굴만 봐도 그간의 고생이 짐작되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길래?

디에리안이 마른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뭐가 이렇게 쉽지 않지?

그는 생각했다.

마법사가 바랐던 것은 오로지 에슬린이 그녀가 가진 것들을 마땅히 누리는 것. 그것 하나뿐인데.

그 하나가 왜 이렇게 어렵고 버거운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 * *

“여긴 세비스 자작의 저택이야?”

주변을 훑던 에슬린이 말했다.

그녀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모처럼 개운한 얼굴이었다. 일어나자마자 깨끗하게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 후 에르단, 디에리안, 젝스와 함께 응접실에서 차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래. 여긴 세비스 자작가 저택이야.”

에르단이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 대꾸했다. 그는 얼음이 들어간 음료를 휘휘 저었다.

“주인은 지금 부재중이지. 내가 자작 일가에게 근사한 온천 여행을 선물했거든.”

“……그게 네가 빈집을 차지해도 된다는 허락으로는 안 들리는데?”

“당연히 하덴의 동의는 구했어.”

“하덴? 아, 세비스 자작 영식.”

에슬린은 뒤늦게 그 이름을 기억해 냈다.

“그래도 갑자기 황궁을 나오면 어떡해? 괜히 의심이라도 받으면 어쩌려고.”

그러자 에르단이 킥킥대며 웃었다.

“의심? 누가 나한테 관심이나 있겠어? 그냥 황궁 생활이 무료해진 황자가 친한 친구 집에 놀러 갔나 보다, 하겠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세비스 자작가는 한미한 집안이었고, 에르단은 정치적 영향력 따위 없는 연약한 황자였으니까.

“그래서 에슬린.”

에르단이 잔을 내려놓으며 덧붙였다.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나는……”

그때 디에리안이 큼, 하고 헛기침했다. 쌍둥이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먼저 그 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부터 말씀해 주십시오. 대체 리페리우스가 왜 전하를 배신했는지 알아야, 제가 그 작자에게 걸맞은 저주를 완성할 수 있을 것 같군요.”

“배신 아니라니까…….”

에슬린은 곤란한 듯 목을 긁으려다 친친 감은 붕대 때문에 포기했다.

그 모습을 본 디에리안의 눈빛이 더욱 뾰족해졌다.

“배신이 아니라면, 왜 그자가 주군에게 상처를 입힌 것입니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은 건 젝스였다.

에슬린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테베트 경이 기억을 잃었어.”

“뭐라고요!”

디에리안이 번쩍 튀어 올랐다.

주르륵. 에르단이 들고 있던 컵이 기울어졌다.

“지금 네가 뭐라고 한 거야?”

그러나 그 누구도 엉망이 된 테이블에 신경 쓰지 않았다.

‘이 일을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할까……?’

에슬린은 뜨거운 차로 입을 축였다.

“그 말 그대로야. 테베트 경은 나를 기억하지 못해. 하지만.”

“…….”

“나는 반드시 그를 되찾을 거야.”

실내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그러려면 필연적으로 신과 맞서야 하는데.”

짙푸른 눈동자가 맞은편에 앉은 에르단을 향했다.

정확히는, 그의 옷에 새겨진 문장을 바라보았다.

교차된 검. 그 안에 새겨진 고블릿 잔.

신의 성물. 황제를 상징하는…….

에슬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나랑 같이 성배 찾을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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